파리에서 ‘파테 뉴스’를 상영하다 1909년 3월 31일

by.정성일(영화감독, 영화평론가) 2018-04-30조회 5,959
파리에서 ‘파테 뉴스’를 상영하다
한국영화사에서 사라진 프로그램 중 하나가 ‘대한 뉴스’다. 극장에서 본(本)영화를 보기 전 광고가 끝나고 나면 애국가를 상영했고 그런 다음 ‘대한 뉴스’를 보여주었다. (물론 그런 다음 기다리던 예고편들이 상영되었다.) ‘대한 뉴스’는 그때 프리미어 상영을 하는 개봉관이건 그 프린트를 받아다가 상영하는 변두리 재개봉관이건 관계없이 무조건 상영했다. 심지어 낡아서 비가 내리는 프린트로 상영하는 동시상영관에서 정작 ‘대한 뉴스’는 매주 방금 현상한 게 분명한 깨끗한 프린트로 상영했다. 기록에 따르면 휴전 직후인 1953년에 시작해서 1994년 12월까지 무려 2,040편이 제작되었다. 물론 ‘대한 뉴스’는 한국영화의 발명품이 아니다. 일제 식민지 강점하의 경성의 극장에서 상영되는 영화들은 동경에서 제작된 ‘일본 뉴스’를 영화 상영 전에 마찬가지로 상영했다. 그리고 이 프로그램은 이미 유럽과 미국에서 텔레비전이 도착하기 훨씬 이전 무성영화 시대부터 시작되었다.

이걸 처음 시작한 것은 1909년 3월 31일 파리의 파테 계열 극장에서였다. 처음에는 그 이름을 ‘Path faits divers’라고 불렀다. 약간의 설명이 필요할 것 같다. ‘faits divers’는 관용구로 ‘일상사’라는 뜻이지만 통상적으로 (이제는 당신의 기억에서조차 가물거릴지도 모를) 종이신문에서 ‘사회면’을 가리키는 말로 쓴다. 그런데 신문 편집국에서 1면이 가장 중요한 그날의 뉴스이고, (실제 페이지에 관계없이 신문에서는 관성적으로) 2면이 정치 기사, 그리고 3면을 사회에서 벌어지는 이런저런 소소한 사건들, 4면을 문화면으로 부르기 때문에 이 명칭은 ‘파테 3면 뉴스’ 혹은 ‘파테 세상 소식’이라는 뜻으로(도) 읽어야 한다. 그래서 영미권 학자들은 이걸 ‘Path-Journal’ 혹은 ‘Path-Weekly’라고 하기도 한다. 하지만 파테 제작소에서 이걸 매주 만든 것은 아니고 격주로 제작했다.
물론 뤼미에르 형제가 파리에서 시작해 세상의 여기저기를 여행하면서 일상을 찍었지만 그들은 사회적인 사건이나 역사적인 순간의 장소에 가는 일에 별 흥미가 없었다. (이를테면) 그들은 열차가 역으로 들어오거나 공장에서 퇴근하는 사람들을 찍었을 뿐이다. 파테는 뤼미에르 형제와 달리 상업적 관점을 갖고 신문 저널리즘의 태도로 새로운 장르를 개척했다. 텔레비전은 그때 SF 소설에나 등장하는 발명품이었다. 사람들은 신문에서 기사로 읽어야 하는 사건을 눈으로 보고 싶어 했다. 물론 파테 제작사는 신문사가 아니기 때문에 기자들에게 취재를 맡기듯 사건을 찍을 수는 없었다. 게다가 당시 카메라는 무거웠고 필름은 여러 가지 기술적 약점을 안고 있었다. 하지만 이 ‘영화-뉴스’는 사람들을 극장으로 끌어들이는 구경거리가 되었다. 그때는 뉴스가 오늘 날처럼 그렇게 빨리 전달될 필요가 없었다. 파테 제작소는 카메라 기사 여러 명을 고용한 다음 그들을 화재나 살인사건이 벌어진 장소나 혹은 중요한 스포츠 게임이 벌어지는 경기장에 보냈다. 그들이 찍어오면 파테 제작소의 편집실에서 알베르 가보의 진두지휘 아래 이 ‘영상-기사’들을 마치 방송국처럼 편집을 하고 순서를 정해 오늘날의 방송 뉴스처럼 만들었다.
 
스포츠, 사회 등 다양한 소식을 다룬 파테뉴스의 장면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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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포츠, 사회 등 다양한 소식을 다룬 파테뉴스의 장면들
스포츠, 사회 등 다양한 소식을 다룬 파테뉴스의 장면들
 
이걸 다큐멘터리의 원형이라고 부를 수는 없을 것이다. 차라리 ‘파테 뉴스’는 텔레비전 뉴스의 ‘원시적’ 모델일 것이다. 하지만 ‘파테 뉴스’는 그때 큰 성공을 거두었고 뒤이어 영국에서는 ‘매일 매일(Day by Day)’을 제작하기 시작했다. 또한 미국에서도 ‘파테 뉴스’를 수입해 유럽의 신기한 풍속을 소개하는 한편 미국의 일상사를 촬영해서 동시상영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파테 뉴스’를 가장 유심히 본 건 그때 막 혁명에 성공한 소비에트, 모스크바에서 레닌의 위대한 승리를 문맹이었던 인민들에게 알릴 방법을 찾고 있던 공산주의 예술가들이었다. 소비에트 전역에서 벌어지고 있는 혁명적인 뉴스들. 분명히 지가 베르토프는 ‘파테 뉴스’를 보고 자신의 방법을 찾았음에 틀림없다. 아마 당신은 ‘파테 뉴스’에서 영화사의 또 다른 순간이 이어지는 계보의 선을 그려낼 수 있을 것이다. 이제부터 영화사의 순간들은 점점 더 많은 거미줄을 펼쳐 보이기 시작할 것이다. 말 그대로 거미줄의 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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