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블록버스터]블록버스터는 여전히 진화 중 할리우드 블록버스터, 그 탄생과 진화

by.김형석(영화저널리스트, 전 스크린 편집장) 2013-07-10조회 2,242

블록버스터(blockbuster)를 이야기하는 것은 할리우드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이며, 이젠 한국영화를 이야기하는 것이 기도 하다. 할리우드에서 1975년 <죠스>(스티븐 스필버그) 이후 ‘블록버스터’가 자리를 잡았다면, 우리에겐 1999년 <쉬리>(강제규)가 어떤 계기다. 24년의 시간차가 있긴 하지만, 두 영화 이후 할리우드와 충무로의 산업 규모는 빅뱅을 맞이 했고, 영화는 멀티플렉스를 통해 대규모로 배급되는 상품이 되었으며, 영화를 본다는 건 어떤 ‘이벤트’가 되었다.

도시의 한 블록(block)을 날려버릴 만한 파괴자(buster)였던, 제2차 세계대전 시기 영국 공군이 함부르크에 떨어뜨린 4.5t짜리 폭탄이 그 어원이라고 하는 블록버스터. 이 단어는 영화에 적용되면서 엄청난 위력을 지닌 흥행작을 일컫게 되었고, 이후 북미 지역 박스오피스에서 1억 달러 이상의 수익을 거둔 영화를 지칭했다.

여기서 중요한 건 숫자 이상의 의미다. 블록버스터 시대의 개막은 토키영화의 등장만큼이나 거대한 사건이며, 토키영화가 할리우드에 스튜디오 시대를 열었다면 블록버스터는 퇴락한 스튜디오 시스템을 재정리하면서 활력을 불어넣었다. 그리고 21세기에도 ‘블록버스터’를 대체할 만한 패러다임은 등장하지 않았다. 과연 블록버스터는, “바~밤!” 하는 존 윌리엄스의 으스스한 사운드와 함께 식인 상어가 극장가를 공격했던 1975년 여름에 갑자기 등장한 신개념인 걸까? 블록버스터를 얘기하면서 <죠스>를 언급하지 않을 순 없지만, 이 영화에 ‘최초’나 ‘개척자’ 같은 영예를 선사하는 건 옳지 않아 보인다. <죠스>는 블록버스터의 개념을 ‘재정의’한 영화였을 뿐, 블록버스터는 절대로 영화 한 편에 의해 규정될 수 있는 개념이 아니다. 그것은 30년 가까이 되는 시간의 퇴적에 의해 실체를 지니게 된 ‘역사적 용어’이며, 아직도 그 생명력을 잃지 않고 있는 현재 진행형의 화두다.

할리우드의 첫 번째 위기

영화가 발명되고, 캘리포니아에 할리우드라는 ‘꿈의 공장’이 세워지고, 스튜디오와 장르와 스타의 시대가 열리면서 황금기를 맞이한 미국영화는 그때까지 단 한 번도 좌절하지 않았다. 이러한 산업적 안정성은 ‘제작’이 아닌 ‘배급’과 ‘상영’에서 온 것이었다. 그 시절 할리우드 메이저 영화사의 상업적 마인드는 간단했다. 자신들이 소유하고 있는 극장에서 최대한으로 이윤을 뽑아낼 수 있는 영화를 만드는 것이었다. 사실 할리우드 자본에서 영화 제작에 들어가는 돈은 아주 작은 비율이었다. 가장 중요한 건 ‘영화관’이라는 부동산 자본이었고, 그것을 기반으 로 월스트리트에서 별 어려움 없이 돈을 빌릴 수 있었다.

이것은 물론 ‘독점’의 산물이었다. 이른바 5대 메이저(파라마운트, 워너브라더스, MGM-로우, 20세기 폭스, RKO)는 자신들이 만든 영화들을 자신들이 소유한 극장에 자신들이 배급했다. 공장과 도매상과 소매상의 주인이 같은 셈이었다. 이것이 이른바 ‘수직 통합’(vertical intergration)이다. 이 시스템 안에선 퀄리티가 떨어지는 영화라도 흥행엔 별문제 없었다. 왜냐고? 이미 상영관은 확보되어 있고, 당시 미국 사회에서 영화는 거의 절대적인 엔터테인먼트였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매주 극장에 갔고, 공황기나 전시엔 장사가 더욱 잘됐다. 현실 도피의 욕구 때문이었다. 1940년 통계를 보면 미국 인구가 1억 3,200만 명 정도인데, 주당 관객은 8,000만 명에 달했다. 상영은 ‘클리어런스’(clearance), 즉 상영관에 차등을 두고 그 차등에 따라 상영 스케줄을 조정하는 방식으로 이뤄졌다. 대도시에서 첫 상영(first-run)이 이뤄진 후 점점 인구가 적은 지역으로 영화가 옮겨갔는데, 영화 한 편이 완전히 소비되려면 1~2년이 걸렸다.

여기서 블록버스터에 대해 가장 중요한 사실 하나! 블록버스터는 영화 제작보다는 배급과 상영과 마케팅의 혁명이다. 만약 블록버스터가 새로운 영화 제작에 의해 주도되었다면 그건 ‘뉴 시네마’라고 불러야 할 것이며, 그토록 오래 지속되지도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블록버스터가 지금까지 지속될 수 있는 건, 산업적 변화를 그 토대로 삼고 있기 때문이다. 간단히 말하면 블록버스터는 수직 통합과 클리어런스를 폐기 처분하고 그 자리에 고비용 전략과 와이드 릴리즈 방식의 극장 상영을 채워 넣은 것이다. 그렇다면 왜 할리우드는 그런 변화를 겪어야 했을까? 이유는 간단하다. 제2차 세계대전 후, 미국의 영화 산업은 처음으로 ‘위기’에 봉착했기 때문이다. 1947년부터 추락하기 시작한 박스오피스 수익엔 날개가 없었고, 1940년에 주당 8,000만 명이던 관객은 1960년에 이르면 2,500만 명으로, 1970년에 이르면 1,770만 명으로 떨어진다. 말 그대로 영화 산업이 ‘작살 나’ 버린 것이다.


거대한 변화, 새로운 세대

그렇다면 위기의 원인은 무엇일까? 여기 몇 가지 오해가 있다. 먼저 1948년 ‘파라마운트 판결’(Paramount case)이 할리우드를 약화시켰다는 거다. 전쟁이 끝나고 미국 대법원은 ‘제작-배급-상영’을 한 손에 쥐고 흔들었던 메이저 영화사의 수직 통합을 불법으로 판정 내리고, 상영 부분을 분리하도록 명령한 것이다. 미국 영화사에서 ‘분리’(Divorcement)라고 부르는 이 사건을 통해 메이저들은 더 이상 자신들이 만든 영화의 상영을 보장받지 못하게 되었다. 하지만 이것은 위기의 원인이 아니었다. 그들은 상영 대신 배급을 강화했고, 여전히 극장들은 메이저 영화사의 작품을 원하고 있었다. 배급과 함께 제작 분야도 정비해, 편수를 줄이는 대신 좀 더 공들인 영화를 내놓았다. 과거 1년에 350편의 영화를 쏟아내던 5대 메이저는, 1950년대 후반부터 1년에 200편 아래로, 1975년엔 100편 수준으로 영화를 제작했다. 전속 배우와 스태프도 모두 자유 계약 상태로 풀어주었다.

할리우드 위기론을 이야기할 때 또 하나 언급되는 것이 바로 ‘TV의 영향력’인데, 이것도 절대 결정적인 요인은 아니다. 할리우드는 1950년대 중반부터 남는 인력과 장비를 이용해 TV 작품들을 제작했고, 1963년 통계를 보면 미국에서 제작되는 TV 드라마와 영화의 70%가 할리우드에서 만들어졌다. 제작의 관점에서 본다면 TV는 위기가 아니라 호기였던 것이다.

그렇다면 ‘진짜’ 위기의 원인은 무엇이었을까? 그것은 미국 사회의 거대한 변화, 즉 도시 인구의 교회 이주와 베이비붐 세대의 등장이었다. 1960년대에 미국 가구의 1/4이 도시 외곽의 교외 지역에 거주했고, 60%가 집을, 75%가 자동차를 소유했다. 게다가 제2차 세계대전 후 주 5일 근무제가 도입되자 레저의 중심은 수동적인 영화 관람에서 능동적인 아웃도어 활동으로 변해갔다. TV를 중심으로 하는 홈 엔터테인먼트가 각광을 받았고, 그 결과 도시의 수많은 극장이 문을 닫았고, 대신 교외 지역에 드라이브인 극장이 생겨났다. 1945년에 2만 개에 달하던 극장은 1965년에 1만 개 이하로 줄었고 그 공백은 5,000개에 달하는 드라이브인 극장으로 헐겁게 채워졌다. 수십 년 동안 할리우드 영화 산업의 대동맥이었던 전통적조인 극장들이 자취를 감추기 시작한 것이다.

한편 1945~1964년에 태어난 베이비붐 세대의 관객들은 새로운 취향을 드러냈다. 그들은 부모 세대처럼 습관적으로 영화관에 가지 않았다. 그들은 스펙터클과 리얼한 폭력과 강렬한 성적 표현과 동시대 모럴을 자극하는 코미디를 원했다. TV에 익숙한 베이비붐 세대가 스크린에서 ‘뭔가 다른 것’을 원했던 건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고, 점점 관객층의 중심으로 진입하는 그들을 사로잡기 위해 할리우드는 바뀌어야 했다.

<대부>, 첫 번째 블록버스터

위기에 대한 할리우드의 대응책은 블록버스터였다. 하지만 처음부터 그들이 배급이나 마케팅처럼 비즈니스의 관점으로 접근한 건 아니었다. 그들은 순진하게, 제작비가 많이 들어간 대작 영화가 영화에 대한 대중의 관심을 되찾아줄 거라고 생각했다. <삼손과 데릴라>(세실 B 데밀, 1949)를 필두로 <쿼바디스>(머빈 드로이, 1951) <성의>(헨리 코스터, 1953) <십계>(세실 B 데밀, 1956) <벤허>(윌리암 와일러, 1959) 등의 ‘빅 무비’가 등장한 건 그런 이유였으며 <클레오파트라>(조셉 L 맨키위즈, 1963)은 그 정점이었다. 관객을 사로잡기 위해 시네라마, 시네마스코프, 입체영화, 토드-AO, 아이맥스 등의 테크놀로지가 개발되었다. 하지만 백약이 무효였고, 1969~70년에 할리우드 스튜디오들이 기록한 적자는 총 6억 달러에 달했다. <사운드 오브 뮤직>(로버트 와이즈, 1965) <닥터 지바고>(데이비드 린, 1965) <메리 포핀스>(로버트 스티븐슨, 1964) 같은 초대박도 있었지만 하향세를 막진 못했다. 급기야 1971년엔 영화인들의 청원을 받아들여 영화 산업을 살리기 위한 감세 정책이 등장해 1976년까지 지속되었다.

이 과정에서 가장 중요한 건, 1960년대에 할리우드 스튜디1989들이 M&A를 통해 팔려버렸다는 사실이다. 유니버설은 MCA에(1962년), 파라마운트는 걸프&웨스턴에(1966년), 유나이티드 아티스츠는 트랜스아메리카에(1967년), 워너브러더스는 킨니 서비스에(1969년), MGM은 라스베이거스의 금융업자인 커크 코커리언에게(1969년) 넘어갔다. 스튜디오의 창업주나 거물급 프로듀서의 시대는 갔고, 그 자리를 에이전트와 변호사와 금융 전문가와 MBA들이 채웠다. 어쩌면 1970년대에 활짝 열린 블록버스터 시대는 그들이 있었기에 가능했을지도 모른다.

할리우드의 새로운 정복자들은 영화에 대해선 잘 몰랐다. 그래서 그들은 영화 자체는 그다지 중요하지 않다고, 영화 산업에서 핵심은 ‘영화’가 아니라 ‘산업’이라고 생각했다. 할리우드의 기존 비즈니스에서 그들이 가장 이해할 수 없는 건 배급 방식이었다. 그들은 배급의 규모를 확장해 자본 회수의 속도를 극대화하는 방식을 도입했다. 이른바 ‘집중’(saturation)으로 <대부>는 이 방식으로 개봉된 ‘최초의 블록버스터’였다. 혹자는 <대부>부터 시작된 블록버스터를, 과거 1950~60년대 거대 예산의 에픽들과 구분해 ‘슈퍼 블록버스터’로 부르기도 한다. 과거의 블록버스터들이 영화 자체에 집중했다면, 1970년대엔 할리우드의 비즈니스 모델 자체가 블록버스터로 재편되면서 흥행적 폭발력을 지니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그 효과일까? 1947년부터 1971년까지 이어졌던 관객 수 감소는 1972년에 25년 만에 드디어 상승곡선을 타기 시작한다. 불황의 긴 터널을 벗어나 맞이한 서광이었다.

<죠스>와 <스타 워즈>, 작렬하는 원투 펀치

1975년엔 스필버그의 <죠스>가 등장한다. 물론 <대부>와 <죠스> 사이에, <엑소시스트>(윌리엄프리드킨, 1973) <스팅>(조지 로이 힐, 1973) 같은 블록버스터가 있었다. 하지만 “모든 것은 <죠스>로부터 시작됐다”는 블록버스터계의 격언 아닌 격언이 있을 정도로, 이 영화는 혁신적이었다. <대부>가 배급의 혁명이었다면, <죠스>는 여기에 마케팅의 혁명을 더했다. 이전까지 크리스마스 시즌 중심이던 미국 영화 시장은 <죠스> 이후 여름 시즌 중심으로 바뀌었다. 개봉 3일 전부터 주요 TV 방송사 광고의 프라임 타임엔 <죠스>의 30초짜리 예고편이 집중적으로 방영되었고, 라디오에서는 존 윌리엄스가 작곡한 주제가가 지겹게 흘러나왔다. 여기에 OST를 비롯 티셔츠, 완구, 놀이기구 등 다양한 파생 상품 시장이 형성되었다.

1977년에 나온 조지 루카스 감독의 <스타워즈>는 블록버스터의 결정판이었다. 이 영화는 블록버스터의 테크놀로지를 규정했다. <스타워즈>는 <대부>가 보여준 장르적 힘이나 <죠스>가 과시했던 스릴 넘치는 극적 구성 같은 것엔 아예 관심이 없었다. 대신 “블록버스터가 과연 무엇을 보여주어야 하는가”에 집중했다. <죠스>가 단지 상어의 ‘커다란 크기’를 강조했다면 <스타워즈>는 액션의 스피드와 그 박진감을 내세운다. 조지 루카스는 감독이자 ILM이라는 SFX 전문 회사를 이끄는 테크니션이었고, <스타워즈>는 과거의 특수효과 기술과 단절하면서 영화사의 새로운 장을 연 것이다.

특히 <스타워즈>는 마케팅에서 한발 더 내디딘다. 바로 재개봉 전략이다. <스타워즈>는 1977년 5월 25일에 개봉한 이래로, 미국 내에서만 1978년, 1979년, 1981년, 1982년 총 네 번을 재개봉했다. 그리고 1997년에는 <스타워즈>와 <제국의 역습>(어반 케쉬너, 1980)과 <제다이의 귀환>(리처드 마퀸드, 1983)을 ‘특별 편집판’으로 재편집해 재개봉해 전 세계적으로 3억 달러의 수익을 거두었다. 사실 예전에도 수많은 재개봉이 있었지만 <스타워즈>처럼 계획적이며 상업적으로 접근한 사례는 없었다. 디렉터스 컷, 리덕스, 3D, 리마스터링 등 다양한 이름으로 이뤄지고 있는 재개봉 전략은 모두 <스타워즈>에서 비롯된 것이다.

여기서 ‘블록버스터의 숨은 공로자’를 소개하자면, 루 와서먼이라는 인물이다. 베티 데이비스나 제임스 스튜어트 같은 클래식 스타들의 에이전트였던 그는 인디펜던트 영화 제작으로 유니버설 스튜디오를 장악했고, 1970년대에 제작과 배급 시스템의 유연성이 어떤 것인지를 보여주었다. 그는 필름 라이브러리의 중요성을 인식한 첫 번째 인물로, TV를 통해 고전 영화들을 영원히 우려먹을 수 있다는 걸 알았다. 그는 TV 산업과 스튜디오를 결합해 시너지 효과를 만들었고(1977년에 내놓은 TV 시리즈 <뿌리>는 당대 최고의 프로그램이 된다). TV에서 거둔 성과를 기반으로 영화에 접근해 <죠스>와

스필버그 식으로 정리하면 “25단어 이내로 정리할 수 있는 영화”인 하이 콘셉트 무비도 할리우드의 대세가 되었다. 파라마운트의 배리 딜러 회장이 가장 먼저 고안했고 마이클 아이즈너 사장이 구체화했다는 이 개념은, 무엇보다 영화의 ‘소재’가 할리우드의 중심이 되는 세상이 올 거라고 생각이었다. 스타도 필요 없고 장르도 필요 없다. 아이디어는 기발하지만 예산 규모는 작은 영화, 한 문장으로 정리된 보편적 스토리를 지닌 영화, 30초짜리 광고 안에 핵심을 담을 수 있는 영화. 이것이 아이즈너가 생각한 ‘최고의 영화’였다. <에이리언>(리들리 스콧, 1979)는 “우주선이 등장하는 <죠스>”, <플래시댄스>(1983)는 “철공소의 신데렐라”, <귀여운 여인>(게리 마샬, 1990)은 “신데렐라가 된 콜걸”. 영화는 이렇게 한 줄로 요약되기 시작했다.

할리우드는 안전 장치가 필요했다. 지속적인 수익을 보장해줄 수 있는 그 무엇이 있어야 했다. <천국의 문>(1981)처럼, 거대한 제작비를 들이부은 영화 한 편이 망하면 스튜디오(유나이티드 아티스츠)가 무너지는 상황은 언제라도 일어날 수 있는 것처럼 보였다. 그렇다면 결론은? 두 가지였다. 바로 프랜차이즈 무비와 하이 콘셉트 무비. 1970~80년대 할리우드를 스필버그와 루카스의 시대라고 불러도 무방한 것은, 그들이 만들어낸 프랜차이즈 무비들의 놀라운 성과 때문이었다. 루카스의 <스타워즈> 시리즈는 물론, 루카스가 제작하고 스필버그가 연출한 <인디아나 존스> 시리즈가 이어졌고, 스필버그가 제작한 <그렘린>(1984)과 <백 투 더 퓨쳐> 시리즈도 큰 인기를 끌었다.

<대부>와 <죠스>와 <스타워즈>로 인해 할리우드에서 영화는 계산에 의한 투자 대상이 되었고, 거대한 상품이 되었다. 리스크가 큰 만큼 수익성도 큰, 일종의 도박처럼 여겨지게 된 것이다. 그 결과 1970년대 할리우드는 급격한 제작비 상승을 겪는다. 1972년 <대부>와 1977년 <스타워즈> 사이, 5년 동안 할리우드의 평균 제작비는 178% 상승했다. 물가상승률의 4배 수준이었다. 이제 영화 제작은 웬만한 흥행은 손익분기점을 맞추기 힘든 산업이 되었고, 마케팅 비용은 가파르게 상승하며 제작비의 두 배 수준에 육박했다. ‘도 아니면 모’(hit-or-miss)의 사행 심리마저 생겼고, 1970년대에 대해 레노 자노스 같은 영화학자는 “스튜디오 제작자들은 한 번에 크게 벌어야 한다는 필요성과, 그것을 보장할 만한 전문적 지식이나 기술이 없다는 현실 사이에 갇혀버렸다”고 요약하기도 했다.

프랜차이즈와 하이 콘셉트

(스티븐 스필버그, 1982)를 만들어냈다. 결국 그가 세워놓은 새로운 비즈니스 규범을, 다른 스튜디오들은 곧바로 모방하기 시작했다.

블록버스터의 완성, 미디어 그룹

1980년대에 들어서면서 미국의 미디어 환경은 급변했다. 이미 거대하게 성장한 TV 시장을 토대로, 케이블 TV와 비디오 시장도 점점 커지고 있었다. 1990년에 이르면 케이블 TV 보급률은 52%, VCR 보급률은 67%에 달했다. 이런 환경에서, 극장 중심의 블록버스터 전략은 수정될 필요가 있었고, 이 모든 것은 타임-워너의 창시자 스티븐 J. 로스에 의해 이뤄졌다.

장의업과 주차업으로 사업을 시작한 그는 ‘킨니 서비스’라는 회사를 차렸고, 1969년에 워너브러더스를 인수했다. 그의 야심은 수직 통합된 미디어 복합 기업이었다. 그는 수많은 회사가 모인 복합 기업 내에서 하나의 소프트웨어가 여러 경로로 소통되며 수익을 발생하는 구조를 생각했다. 극장 수익, OST, 영화 소설, 비디오 출시, 케이블 및 지역 네트워크 판매, 테마파크와 각종 파생 상품 등 다양한 수익원을 하나의 미디어 그룹 안에서 모두 해결하는 것이다. 그는 진정한 블록버스터는 홈 비디오와 유료 텔레비전과 케이블 TV에서 나온다고 믿었다. 그는 새로운 마케팅과 배급 수단을 개발하고 능숙한 비즈니스 전문가들을 도입해 영화 산업을 변모시켰다. 결과는 놀라웠다. 예전엔 한 편의 영화가 벌어들이는 수익에서 극장 수익이 75%를 차지했다. 하지만 로스는 그 비율을 25%로 낮추었다. 비율이 떨어졌다고 극장 수입이 줄어든 것은 아니었으니, 결과적으로 영화 한 편에서 거두는 수익이 3배가량 늘어난 것이다. 그는 HBO와 시네맥스 같은 케이블 네트워크를 만들었다, <타임>을 인수한 것도 잡지 때문이 아니었다. 그는 <타임>이 소유한 광대한 케이블 TV 사업이 탐났을 뿐이었다. 그 결과 워너에서 만들어지는 영화와 텔레비전 프로그램은 더 큰 시장을 얻었다. 20여 년에 걸친 로스의 경영 혁신으로 만들어진 미디어 그룹은 판매 및 거래 비용을 줄이고(모든 거래가 기업 내부에서 일어나기에) 자연히 이윤은 늘어났다. 낡은 방법을 고수하던 사람들은 금방 뒤처지게 되었고, 너도나도 로스의 경영 철학에 보조를 맞추었다. 여기서 로스가 가장 중요하게 생각한 것은 문어발식 확장이 아니라 ‘시장 통제의 중요성’이었다. 그가 수백만 달러를 지불하며 수직통합을 구축한 것은, 할리우드 스튜디오의 장기적인 생존과 번영을 위해서는 시장을 조절할 수 있는 장치와 안전판이 필수적인 조건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는 결코 망하지 않는 구조를 만들었다. 조지 루카스가 제작한 <윌로우>(1988)는 5,500만 달러의 제작비로 극장에서 2,800만 달러를 벌었을 뿐이지만, 비디오 판매로 1,800만 달러를, 텔레비전 판권료로 1,500만 달러를 챙기며 제작비를 모두 회수했고 해외시장에서 벌어들인 금액을 합쳐 7,000만 달러의 순수익을 냈다. <딕 트레이시>(워런 비티, 1990)도 캐릭터 산업과 테마파크로 손해를 만회했다.

최악의 블록버스터 중 한 편으로 꼽히는 <워터 월드>(케빈 레이놀즈, 1995)마저 적자가 아니었다. 만약 미디어 복합기업의 형태가 아니었다면, 극장에서의 실패는 스튜디오의 위기로 직결되었을 것이다.

로스는 할리우드의 예언자였다. 그는 새로운 매체와의 끊임없는 합병과 인수를 통해 수직적으로 통합된 미디어 제국의 중요성에 대한 교훈을 남겼고, 지금까지도 그의 아이디어는 유효하다. 2001년 타임-워너는 인터넷 업체인 AOL(American On-Line)과 합쳐, 세계 최초로 미디어 업체와 인터넷 업체를 결합한 ‘AOL 타임-워너’를 출범시켰다. 월트 디즈니의 마이클 아이즈너나 20세기 폭스의 루퍼트 머독은 로스의 충실한 계승자. 그들은 거의 도산 직전인 스튜디오를 합병해 미디어 제국으로 변화시켰다.

물론 미디어 그룹은 그 성과만큼 비난을 듣곤 한다. 하지만 그들이 블록버스터의 완성자들이라는 건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며, 현재 우리가 접하고 있는 블록버스터 무비들은 1970~90년대를 통해 다져진 수많은 비즈니스 모델의 연장선상에서 그 소재를 조금씩 각색하는 수준일 뿐이다. 그 결과 1970년대 <슈퍼맨>(리처드 도너, 1978)으로 발굴되었던 슈퍼히어로 무비가 다시 전면에 부각되고 있으며, 베스트셀러를 각색한 판타지 무비가 새로운 프랜차이즈로 떠올랐다. 제작비 증가도 여전하며, 여기에 컴퓨터그래픽을 중심으로 한 테크놀로지의 발전이 결합되고 있다. 3D와 아이맥스 같은 과거의 기술들이 다시 각광을 받고 있기도 하다. 프랜차이즈 전략도 리부트, 프리퀄, 스핀오프 등을 통해 조금 더 확장되었다. 하지만 그 본질은 변하지 않았으며, 블록버스터는 여전히 할리우드가 가장 정성 들여 만드는 상품으로 오늘도 박스오피스의 피 말리는 레이스는 계속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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