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면을 적시는 19세기적인 눈물의 순간-D.W. 그리피스 시네마테크 KOFA 5월 기획전 ‘발굴, 복원, 그리고 초기 영화로의 초대’②

by.정성일(영화감독, 영화평론가) 2012-05-18조회 3,779
D.W. 그리피스

이를테면 시네필들 사이에는 이상할 정도로 잘 알고 있다고 생각하면서 정작 보지 않은 영화의 감독 명단이 있다. 그 대표적인 이름은 데이비드 W 그리피스다. 사람들 대부분은 ‘세계영화사’에 대한 교양을 쌓기 위해서 <국민탄생>과 <인톨러런스>를 본 다음 (아마도 약간 질린 상태로) 더 이상 찾아보지 않는다. 그리피스라는 이름은 과도할 정도로 고전적 편집 이론과 연결지어져 있고, 할리우드 영화문법의 아버지로 설명된 다음 끝난다. 마치 죽어야 할 아버지처럼. 하지만 정말 그래도 괜찮은 것일까? 왜냐하면 그리피스의 영화를 보는 재미는 정작 ‘그 다음’이기 때문이다. 그걸 알기까지는 시간이 좀 걸린다.

더없이 아름답고 가련한 클로즈업

그리피스의 영화는 20세기의 예술을 여전히 19세기의 전통 안에 놓고 멜로드라마의 기구 절창한 이야기를 구현한 세계다. 그에게 영화는 그것을 구현하기 위해 동원된 (이런 말이 허락된다면) ‘디제시스-소설’ 이다. 하스미 시게히코는 영화사에는 이상하게도 ‘영화가 발명되기 이전으로 영화를 데려가는’ 감독들의 계보가 있다고 말했다. 나는 그리피스가 그 계보의 첫 번째 이름이라고 생각한다. 차라리 그리피스를 에이젠슈테인의 말처럼 디킨스의 자리에 가져다놓고 싶어진다. 빅토리아 시대의 사람. 그리고 여기 두 편의 영화 <흩어진 꽃잎>과 <풍운의 고아들>은 그걸 보여준다(물론 ‘위대한’ 그리피스의 멜로드라마를 설명하기 위해서는 여기에 반드시 <동쪽으로 가는 길>과 <이노크 아덴>을 포함시켜야 한다). 여기서 보여준다는 말은 다소 엄격하게 사용된 것이다. 이 두 편의 영화는 오늘날 우리가 보기에 다소 기괴할 정도로 잔인하고 위험한 상황을 만든 다음 거기서 ‘불쌍한’ (이라고밖에 달리 말할 수 없는) 여주인공을 구해내기 위해 이제 영화는 동분서주하기 시작한다. 잔인한 그리피스. 가련한 소녀들. 그때 감정을 감추고 있는 영화의 잠재적인 힘은 이미지 바깥을 향해서 흘러나오기 시작한다. 흘러나온다고? 그렇다. 그건 눈물이라는 인간의 감정을 물적인 상태로 담아놓은 힘을 통해서 화면을 적시기 시작한다. 그럴 때마다 나는 그리피스의 영화를 편집의 영화라기보다는 클로즈업의 영화라고 부르고 싶어진다. 그때 클로즈업을 한 얼굴의 힘이 너무나 크기 때문에 나는 이 영화들을 두 편의 그리피스 영화라기보다는 차라리 두 편의 릴리안 기쉬의 영화라고 부르고 싶어진다. 더없이 아름답고 가련한 클로즈업.

영화 사상 가장 슬픈 미소를 보다

그 중에서도 <흩어진 꽃잎>. 아마도 영화사상 가장 슬픈 미소라고 불러야 할 클로즈업을 보여주는 이 영화는 당신이 누구라도 눈물을 흘리게 만들 것이다. 그것만은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다. 권투선수인 의붓아버지는 울고 있는 자기 딸에게 기분 나쁘다는 이유로 짐승처럼 주먹을 휘두른다. 아버지 앞에서 눈물을 흘리면서도 매질을 피하기 위해 릴리안 기쉬는 양 손가락으로 입가 꼬리를 올려 마치 웃는 것 같은 얼굴을 만든다. 그런다고 해서 눈물이 멈추는 것은 아니며, 슬픔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거의 금방이라도 부서질 것만 같은 몸으로 휘청거리면서 릴리안 기쉬가 필사적으로 아버지 앞에서 웃음을 지어보일 때 영화는 클로즈업이 보여줄 수 있는 어떤 기적 같은 힘을 발휘하기 시작한다. 그걸 아무리 감상적인 것이라도 비판해도 할 수 없다. 그때 이 얼굴은 단지 감정의 재현이 아니라 가까스로 영혼의 윤곽을 유지하는 인간의 표정이라는 경계선을 그리는 것만 같은 느낌을 준다. 마치 감정 안으로 들어온 것만 같은 경험. 그리피스의 영화에서 눈물을 볼 수 있을 뿐 울음소리를 들을 수 없는 것은 얼마나 다행한 일인가. 나는 무성영화에 감사한다. 나는 영화에서 이 얼굴이 드레이어의 <잔다르크의 수난>에서의 팔코네티의 클로즈업에도 비견할 만하다고 생각한다.

견뎌야 하는 영화, 다행히 해피엔딩

<풍운의 고아들>은 약간 인내심이 필요한 영화이긴 하다. 이야기는 다소 장황하고 잔인한 상황을 될 수 있는 한 연장한다. 그래서 영화를 보는 당신은 이 상황을 견뎌야 한다. 무대는 프랑스 대혁명 전야의 파리. 언니 앙리에트는 눈먼 여동생 루이즈를 위해서 헌신적으로 봉사한다. 그걸 알고 프로이 공작은 그녀를 농락하기 시작한다. 덫에 걸린 토끼. 루이즈는 또 다른 음모에 말려들기 시작한다. 두 자매는 벗어나기 위해 필사적으로 몸부림치지만 그럴수록 점점 더 상황은 나빠진다. 이 영화에서 릴리안 기쉬는 동생 도로시 기쉬와 함께 자매로 출연했다. 누구를 더 불쌍하게 여길 것인가, 하는 질문은 전적으로 눈물에 대한 당신 취향의 문제다. 나라면 여전히 릴리안 기쉬 쪽이다. 특히 그녀가 거의 회복할 수 없는 절망적인 상태에서 멍하니 허공을 응시할 때 그 화면을 마주 보기 위해서는 용기가 필요하다고 말하고 싶을 정도다. 그나마 다행인 사실은 이 영화가 해피엔딩이라는 점이다. 아뿔싸, 내가 스포일러를 하고 만 것인가! 내게 기회가 주어진다면 전작을 모두 보고 싶은 감독들의 명단이 있다. 그리피스는 그 이름 중의 하나다. <흩어진 꽃잎>에서 맛보았던 19세기적인 눈물의 순간을 꼭 다시 한 번 경험해보고 싶다. 그게 그리피스가 아니라면 누가 다시 안겨줄 수 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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