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극장]한국 극장의 어제와 오늘, 그리고 내일 비정기 상영관에서 멀티플렉스까지, 한국 극장의 변화

by.이길성(영화사연구자) 2011-07-12조회 2,006

극장은 어느 세대에게나 다양한 추억이 있는 곳이다. 전쟁 직후 난방이 되지 않아 추운 극장에서 <애수>를 보면서 남자의 장갑을 발에 신으면 얼마나 따뜻한지 알았다고 회상하는 할머니 세대의 추억이 있는가 하면, 1960년대 한국영화 흥행기록을 갈아치웠던 <미워도 다시한번>의 경우 상영이 끝난 후 극장 청소를 하면 흘리고 간 손수건과 고무신이 한 가마니가 되었다는 후일담도 있다. 1970~80년대 쇼브라더스의 무협영화와 박노식의 한국식 액션영화, 이소룡 영화가 동네 극장가에서 인기를 독차지했을 때 초등학교, 중학교 남학생들은 누구나 한번쯤은 쌍절곤을 돌리면서 외팔이의 의협심과 이소룡의 진정성을 복습하곤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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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 세대는 자신들의 특유한 극장문화와 추억을 가지고 있다. 20세기 초 신기한 구경거리였던 활동사진 시대를 거쳐 조선인 극장과 일본인 극장으로 나뉘어 있던 일제강점기, 전쟁의 폐허에서 스산한 삶을 위로해준 전후 시기를 거쳐 최고의 전성기를 누리던 1960년대, 점차 영화포스터의 노출이 심해지면서 야릇한 제목으로 시선을 사로잡던 1970년대, 그리고 1980년대 초반 심야영화 상영과 함께 복합관이 등장하기 시작했고 예술영화 전용관이 생기기도 했다. 그리고 멀티플렉스관이 거의 모든 영화관을 독점하는 현재에 이르렀고, 이제 극장은 일정한 정주의 공간에서 영화를 보지 않아도 되는 시대를 맞이해 다양한 매체와 경쟁하고 있다.

활동사진에서 발성영화까지 - 일제강점기의 극장

한국에 영화가 도입되었던 초기, 움직이는 사진을 보러 온 관객들은 이중의 충격을 경험했을 것이다. 카페 뤼미에르에서 달려오는 기차의 이미지를 본 프랑스 관객들이 실제로 기차가 온다고 착각해 카페를 뛰쳐나갔다는 소문이 있을 만큼 움직이는 사진을 처음 본 서구 관객은 충격을 받았다. 마찬가지로 조선의 관객들에게도 사진이 움직인다는 경험 자체는 매우 충격적이었을 것이다. 그리고 사진을 접한 지 채 반세기가 지나지 않아 움직이는 사진을 다시 접하게 된 조선 대중은 서구의 문물이 다다른 수준에 역시 충격을 받았을 것이다. 한국영화사에서 이러한 충격의 첫 경험이 언제였는지, 즉 한국에서 영화의 초기 명칭이었던 활동사진이 최초로 상영된 시기에 대해서는 아직 의견이 분분하다. 일반적으로 상업적 의도를 가지고 신문에 게재된 최초의 영화 선전은 1903년 <황성신문>에 실린 광고다. ‘동대문 전기회사 기계창’에서 ‘매일 하오 8시’에 영화를 상영한다는 이 광고는 대중을 상대로 한 유료 상영회로서, 최초의 선전이었다는 점에서 큰 의의가 있다.1)

초기 영화 상영은 사업관계로 한국에 와 있던 외국인들을 대상으로 했고 상영관도 상설적인 공간이 아니었지만, 대중에게 인기 있던 영화 관람이 산업으로 자리 잡는 데는 시간이 오래 걸리지 않았다. 초기 영화는 연극과 판소리, 창, 전통가무 등 다양한 공연물과 함께 비정기적으로 상영되었지만, 1910년 최초의 상설 영화관인 경성고등연예관이 개관했고 점차 대정관, 황금연예관, 단성사 등 활동사진 전용관이 개관하면서 영화를 안정적으로 배급받고 상영할 수 있게 됨으로써 영화산업이 정착되었다.

이 시기 영화관은 북촌의 조선인 극장과 남촌의 일본인 극장으로 나누어져 있었고, 지금의 인사동, 종로3가, 관철동에 위치한 조선인 극장은 변사의 해설로 미국영화를 중심으로 한 서양 영화를 주로 선보였다. 무성영화 시기에 영화관의 민족적 구분은 지역과 언어, 그리고 상영 프로그램 등에서 확연히 나뉘어 있었고, 조선인 극장이라는 민족적 결집이 가능한 특수 공간은 저항의 잠재성을 내재하고 있었다. 일제 역시 이 시기 극장이라는 집합적 공간의 정치적 위험성을 감지하고 검열과 감시를 강화해나갔다. 무성영화의 경우 영화 외부에서 내용을 설명해주거나 문화적 격차를 해설해주는 변사의 역할은 언제나 영화를 다양한 텍스트로 해독할 수 있는 변수를 제공해주었다. 극장에 모인 조선인들은 변사의 민감한 단어 선택이나 감정적인 설명에 의해 정치적 공분을 공유할 수 있었다. <아리랑>이 ‘민족영화’로 부상한 배경에는 당시 조선인 극장에 내재된 식민지의 불온한 분위기가 있었기 때문이라고 볼 수 있다.2)

발성영화의 등장은 무성영화 시기의 일본인과 조선인의 극장 공간 분리 구도와 그간의 상영 관행을 변화시켰다. 우선 변사의 필요성이 사라졌으며, 서양영화의 경우 일본어 자막만이 제공되는 관행 때문에 일어 해독 능력에 따라 관객의 분할이 이루어졌다. 또한 조선인 극장이 차례로 시대적?산업적 상황으로 인해 쇠락해가면서 무성영화 시기의 극장 구도가 점차 사라졌다. 발성영화는 제작산업에도 자본 규모의 확장과 집약적 기술을 필요로 하지만 상영하기 위해서도 대규모 설비를 갖추어야 했다. 종로에 자리 잡은 조선인 상설관의 경우 단성사는 신축을 통해 재조선 일본인 관객까지 포함하는 다수의 외국영화 팬들을 유치하고 있지만 대다수 조선인 상설관은 설비를 구비하지 못함으로써 저렴한 입장료로 외국영화를 상영하거나 일본영화를 재상영하는 재개봉관이 되었다.3 더구나 중일전쟁이 일어나고 외국영화 수입이 금지되면서 배급 경쟁에서 밀린 단성사 역시 재개봉관으로 전락하고 대륙극장으로 개칭되면서 조선인들의 상설 극장은 사라진다.

광복 후부터 1970년대까지 극장 구도

광복 이후 대부분 일본인 소유였던 극장들은 새롭게 명칭을 바꾸고 영화 상영을 재개했다. 미군정기의 사회 제 분야에서 야기되었던 혼란스러움은 극장에서도 예외는 아니었는데, 특히 일본인 소유였던 적산극장을 불하하는 문제와 미국의 중앙영화배급소의 배급 관행의 횡포 등 한국영화는 큰 진통을 겪고 있었다. 이 시기 극장은 영화만을 상영하는 것이 아니라 악극단, 연극 등이 동시에 공연되고 있었고 상영된 영화들도 주로 외국영화였으며, 특히 미국영화는 전체 상영 작품의 80% 이상을 차지할 정도로 독보적이었다.

게다가 겨우 싹트기 시작한 한국영화의 산업기반은 전쟁을 겪으면서 대부분 파괴되었고, 여타 대중매체보다 자본과 기술을 필요로 하는 영화산업은 악극이나 연극 등의 공연예술과 힘겨운 경쟁을 하고 있었다. 그러다 1954년 한국영화면세조치 정책은 한국영화에 활기를 불어넣었고, 1955년 <춘향전>과 1956년 <자유부인>의 흥행 성공은 한국 영화산업의 가능성을 보여주었다. 급증하는 제작편수와 더불어 상영관 역시 증가했으며, 여타 공연물의 비중이 감소하고 영화관으로서 독자성을 지니기 시작했다. 1950년대 후반기 이후 1980년대 초반까지 영화관의 관습과 체계가 형성되기 시작했다.

1960년대에 이르면 영화관은 개봉관과 재개봉관, 하번관 체계가 성립되어 상영 순서별로 확연하게 구분되었다. 또한 하번관은 등급에 따라 3번관, 4번관, 5번관으로 분류되었다. 이 등급은 대체로 개봉관에서 상영되었던 영화가 재상영되는 순서다. 개봉관에서 상영된 작품은 이후 재개봉관으로 넘어가고, 그 다음에는 하번관의 순서에 따라 차례로 상영되었다. 하번관의 기준은 입장료였는데 문교부 고시에 의하여 등급별 입장료가 정해졌기 때문에 신고액에 따라 등급이 결정되었다. 대체로 지역과 관객의 경향에 따라 적정 수준의 입장료가 거의 고정되어 있어서 큰 변화는 없었다.4)

서울의 경우 개봉관은 종로구와 중구를 중심으로 형성되기 시작했다. 1951년에는 수도(이후 스카라로 개명)극장과 단성사 정도였는데, 1954년 국도극장, 1956년 중앙극장, 1957년 명보극장과 국제극장, 1958년 대한극장, 세기극장, 아카데미극장, 반도(이후 피카디리로 개명)극장, 1959년 을지(이후 파라마운트로 개명)극장, 1962년 아세아극장이 건립되면서 서울 시내 개봉관의 모습이 갖춰졌다. 이는 영화편수의 급증, 관객의 증가에 의한 것이었다. 서울 중심부에 위치한 개봉관들은 극장당 스크린이 1개인 단관극장이었고, 대도시의 경우 대다수 극장이 1,000석이 넘는 규모였다. 이 시기에 영화는 한 극장에서만 개봉했고, 재개봉관이나 하번관의 수급을 고려해 되도록 상영기간이 2주 이상 넘지 않는 것이 관례였다.5)

또한 당시 개봉관은 한국영화를 주로 상영하는 방화관과 외국영화를 상영하는 외화관으로 구분되었고, 극장이 위치한 지역과 프로그램의 성격에 따라 각기 다른 특색을 지니고 있었다. 교통 중심지인 종로에 있으며 주변에 중고등학교가 밀집해 있던 단성사와 피카디리극장은 스펙터클 중심의 외화를 주로 상영했고, 70mm 영화를 상영할 수 있었던 대한극장은 장점을 살려 대형 영화를 주로 개봉했다. 세 영화관에 비해 상대적으로 불리한 위치에 있었고, 좌석수가 적었던 중앙극장이나 파라마운트극장은 수입가가 거액이 아닌 작품성 있는 유럽영화나 아카데미상을 받은 할리우드 영화를 상영했다. 방화관으로는 국도, 국제, 명보극장 등이 있었으며, 1963년 방화관으로 전환했던 아카데미극장은 청춘영화의 상영으로 특히 청년층이 애호하는 상영관이었다.

이러한 극장들의 특색은 1970년대 한국영화의 관객 수가 점차 감소하고 제작산업이 불황을 겪으면서 변화한다. 이 시기 한국영화의 부진은 방화전용관에서도 외화를 상영하게 만들었는데, 국도극장을 제외하면 거의 모든 극장이 외화를 중심으로 재편되었다. 한국영화는 매해 제작되었지만 상영되지 않는 영화가 적체되었고, 이는 제작산업의 불황을 더욱 가속화했다. 서울시는 인구분산정책으로 강북지역에는 극장신규허가를 내주지 않아서 개봉관이 늘어날 수 없었고, 당시 교통이 불편한 강남에는 극장설립에 투자하는 사람이 없었다.6) 그러나 1970년대 영화산업의 불황이 관객의 감소로 이어졌지만, 상대적으로 재개봉관이나 하번관에는 관객 감소가 느리게 진행되었기 때문에 서울 관객 점유율 측면에서 재개봉관의 비중이 점차 높아졌다. 이것은 지속적으로 증가했던 서울의 인구유입의 영향으로, 서울로의 이동 인구는 비도심 지역이나 변두리 외곽지역에 집중되었다. 이러한 인구변동으로 도시 주변부 재개봉관을 중심으로 한 새로운 극장문화가 형성되었다. 특히 영등포, 성동, 동대문, 성북구의 급격한 극장 수 증가가 이를 방증한다.

재개봉관이나 두 편씩 영화를 묶어 상영하는 하번관의 경우 주된 관객층은 이러한 이동인구의 주류였던 하위계층 청년들이나 상대적으로 단속이 느슨한 틈을 노리는 학생들이었다. 하번관으로 갈수록 시설은 낙후되었고 여러 상영관을 거쳐온 필름은 노후해서 상태가 좋지 않았다. 당시를 회고하는 글에서 자주 나오는 일명 ‘비오는 영화’라는 표현은 여러 극장에서 상영되어 필름 상태가 나빠진 데다 하번관의 노후한 영사기 때문에 손상을 입어 스크래치가 많은 화면을 빗대 생겨난 말이다. 또한 1970년대 개봉관과 다른 하번관의 가장 주요한 특징은 홍콩 무협영화와 한국의 액션영화의 선전(善戰)이었다. 당시 하번관 관객의 정확한 수치는 알 수 없지만 신문광고를 참조할 때 아카데미 수상작의 경우 6개월 정도 하번관에서 재상영되는 데 반해 무협영화나 액션영화, 마카로니웨스턴의 경우는 2~3년 혹은 최장 4년까지 반복해 상영되는 것을 볼 수 있다.

위에 언급한 것처럼 1960~70년대의 상영 관행은 지금과 많이 달랐다. 이 시기 흥행의 가장 성수기는 신·구정과 추석 같은 명절이었다. 예매가 없었던 시절이라 명절 오전만 되면 영화를 보기 위해 매표소 앞에 긴 행렬이 늘어서곤 했다. 주로 고예산 스펙터클 전쟁영화나 대작영화, 특히 한국영화의 경우 볼거리 화려한 사극과 액션영화가 성수기에 인기 있는 장르였다. 그러나 1970년대에 한국영화의 인기가 떨어지면서 성수기의 대부분을 외국영화가 차지했다. 관객층 역시 계속 변화했다.

1950년대 후반 극장가의 주고객이었던 일명 ‘고무신 관객’이라고 지칭되던 중년 여성층이 1960년대 중반부터 퇴조하고 이를 대신해 20~30대 젊은 관객이 부상했다. 청춘물이나 문예영화의 선전은 이러한 변화에 기댄 것이었다. 이러한 경향은 1970년대까지 지속되었는데 특히 10대 관객층의 부상은 주목할 만하다. 이들은 개봉관의 여름 프로그램을 만화영화나 아동영화로 변화시키고 하이틴 영화가 주요 장르로 떠오르게 할 만큼 점차 소구력을 확대해나갔다. 이미 언급한 것처럼 학생층은 하위계층의 청년과 더불어 재개봉관의 주된 관객층을 형성했다.

새로운 관행의 시작- 소극장에서 멀티플렉스까지

1970년대 영화산업이 텔레비전의 확산과 힘겹게 싸웠다면, 1980년대 영화산업 역시 컬러텔레비전의 등장으로 큰 타격을 입으며 불황과 싸웠다. 극장 역시 예외는 아니었는데, 이러한 불황을 타개하기 위한 모색 중 하나로 1982년 심야 상영을 시도했다. 이것은 같은 해 1월에 야간통행금지가 해제된 덕분이었다. 스카라극장에서 시작한 심야 상영은 점차 다른 극장으로 확대되었다. <애마부인>으로 출발한 서울극장의 심야 상영은 젊은 연인들로 대만원을 이루면서 새로운 영화 문화를 탄생시켰다.7)

1980년대 새롭게 등장한 영화관의 변화는 소극장과 복합관의 등장이다. 1981년 개정된 공연법에 의해서 300석 이하의 공연장은 공연장 설치 허가대상에서 제외되었고, 복잡하고 다양한 규제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8) 1982년 강남을 중심으로 영화전용 소극장이 전국적으로 11곳이 개관했다. 최초로 개관한 소극장은 영동극장이었는데, 단관 개봉관으로 1,000석 이상의 규모를 자랑했던 이전의 개봉관과 달리 소규모 극장이 없던 강남지역을 공략한 전략이 성공했다. 영동극장의 성공으로 이후 시설을 보수한 재개봉관이 소극장으로 변모하거나 신축 소극장이 계속 생겨났다.

이 소극장들은 기존의 개봉관보다 관람료가 저렴했고 극장이 없는 주거지역에 세워졌기 때문에 혼잡한 교통 상황에서 시내로 나가는 불편을 해소시켰다. 또한 소극장은 개봉관의 역할을 하면서 기존의 개봉관/비개봉관의 구도를 와해시켰다. 그러나 1990년대 중반에 이르면 소극장의 수가 급감한다. 10년이 지나면서 소극장의 설비가 낙후되기 시작했고, 강남을 중심으로 첨단 설비를 갖춘 새로운 상영관이나 복합관이 등장하면서 소극장이 가진 이점이 퇴색했기 때문이다.

복합관 역시 극장가의 지도를 변화시켰는데, 1986년 12월 세 개의 스크린으로 개관한 다모아극장과 1987년 씨네하우스 2관이 개관했다. 계속 증가하는 복합관은 1994년 외국영화 프린트벌 수 제한이 폐지되고 ‘와이드 릴리즈’ 관행이 정착되면서 더욱 가속화되었다. 몇몇 복합관의 경우 소극장과 복합관이 결합해, 당시 일정한 소구력을 형성하고 있던 예술영화 관객들을 겨냥한 프로그램을 기획하기도 했다. 코아아트홀이나 뤼미에르극장 등은 당시 특색 있는 예술영화 전용관의 성격을 지니게 되었고, 그동안 흥행의 불확실성으로 개봉하지 못했던 유럽영화와 고전영화들을 상영해 인기를 끌었다.

현재와 같은 멀티플렉스 극장이 개관하기 시작한 것은 1990년대 후반이다. 멀티플렉스는 다수의 스크린, 최신의 영사설비와 더불어 한 공간에서 모든 서비스와 오락을 제공하는 ‘원스톱-엔터테인먼트’를 즐길 수 있도록, 쇼핑센터나 대규모 오락시설을 동반했다.9) 등장 이후부터 멀티플렉스는 놀라운 속도로 성장했는데, 1998년 강변역 CGV를 시작으로 메가박스, 롯데시네마 등 다양한 멀티플렉스 영화관들이 도처에 들어섰으며, 이제 단관극장이나 개봉관이라는 말은 과거의 용어가 되었다. 전통적으로 극장이 즐비하던 종로나 중구의 극장 비중은 현격히 줄어들었다. 시내 중심가 외에는 개봉관이 없기 때문에 예전에는 극장에 간다는 것이 단순한 영화 관람이 아닌 일종의 이벤트적인 성격을 가졌다면, 이제는 관객들이 주거지와 가까운 멀티플렉스에 가거나 3D나 4D 영화 관람을 위해 선호하는 설비가 있는 상영관으로 간다는 것을 의미하는 시대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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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이순진, <개항기; 영화>, 서울특별시사편찬위원회 편. ≪서울공연예술사≫, 2011. 426쪽.
2 이화진, <식민지 조선의 극장과 소리의 문화 정치>연세대 국문과 박사논문, 2010. 23~27쪽. 34~36쪽 참조.
3 이화진, 위의 글, 79쪽.
4 졸고, 「1960~70년대 상영관의 변화와 관객문화」, 한국영상자료원 편, 『한국영화사 공부 1960~ 1979』, 이채, 2004. 190쪽.
5 물론 흥행에 크게 성공한 영화의 경우 당연히 이 규칙은 지켜지지 않았다. 그러나 세기극장처럼 소극장이며 대한극장과 소유주가 같은 특이한 경우, 간혹 동시에 개봉하는 일도 있었지만 1960년대에는 흔치 않은 사례였다.
6 김무현, 「흥행·영화관」, 『1978년 영화연감』, 영화진흥공사, 1979. 71쪽.
7 정종화, <1981~1990: 영화>, 서울특별시사편찬위원회 편. ≪서울공연예술사≫, 2011.1061쪽.
8 이충직·김동호·박지연, ≪한국영화 상영관의 변천과 발전방안≫, 문화관광부, 92쪽.
9 이충직·김동호·박지연 외, 위의 책, 11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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