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권택] 임권택이 말하는 '임권택의 영화'

by.김영진(영화평론가) 2010-07-08조회 2,200

지금까지의 필모그래피 가운데 가장 폄하되거나 박한 평가를 받은 영화는 뭘까요.

뭣이냐, 생각을 해봐야 하는데… 나한테는 <축제>네. 복잡한 구조를 단순화하면서 주제를 전달하려고 무진 애를 쓴 작품인 데 반응이랄 것도 없이 그냥 넘어가버렸어요. 이북에서 이 영화를 틀었는데 그쪽에서는 좋게 본 모양이야. 유훈통치를 하는 나라라서 그런진 몰라도…(웃음) 영화가 효를 주제로 세우니 감동적이었나 보지. <하류인생>을 개봉한 즈음 뉴욕에서 회고전 할 때도 반응이 좋았다고. 그곳 현지 사람들과 교민들이 좋게 봐줬어요. 이청준 선생과 둘이 그런 얘기를 한 적 있는데 <서편제>보다 <축제>가 낫다고, 그이가 먼저 그런 말을 한 적이 있죠. <짝코>도 애착이 가는 영화이고. <씨받이>도 좀 불운했어요. 내가 다루고자 한 건 제쳐두고 얄팍하게 흥행이나 시키려고 만든 영화 취급을 당했다고. 제일 심하게 외면받은 영화는 <족보>인데 이건 반응이고 뭐고 아예 없었으니까. 개봉도 제대로 못했고.

<족보>는 텔레비전에서 방영한 걸 봤습니다.

아니, 그건 시네마스코프라고… 스크린으로 봐야 한다고….

젊을 적 우연히 영화계에 입문했는데 영화의 어떤 면이 적성에 맞았는지요.

영화 현장이 재미가 있었지요. 조감독 때는 내가 일 잘한다고 꽤 유명했어요.(웃음) 허구의 세계지만 꾸며가면서 그럴듯하게 만드는 게 영 재미있더라고. 제작부 들어가서 소품 조수했고 정창화 감독 홍콩 갔을 적에는 조명부에도 있었고, 이름도 기억할 수 없는 노인네 감독 밑에서 연출부도 했어요. 정창화 감독이 홍콩에서 돌아왔을 적에 나를 조감독으로 써줬죠. 아마 나를 잘 본 모양이야.

정성일 씨의 <임권택이 임권택을 말하다>를 보면 유명 여배우가 탄 차를 가로막고 드세게 구는 에피소드가 나오는데요, 결기가 센 조감독 인상이었습니다.

그게 그렇게 간단한 얘기가 아니라고. 김삼화라는 당시 인기 있던 여배우와 일하는데 정창화 감독과 뭔지 불편한 일이 있었나봐. 세트장에 나와야 하는데 안 나왔어요. 정창화 감독 사과 를 요구하면서. 내가 연출부 서드로 일할 땐데 그게 문제가 있다고 본 거요. 전부 기다리는데 있어서는 안 될 일이라고 생각한 모양이여. 그 여배우가 나름 인텔리예요. 자존심이 셌다고. 안양촬영소에서 찍고 있는데 이튿날 또 반복되는 거야 그 사태가. 연출부, 제작부 다 손들었는데 누가 시키지도 않은 상황에 서 내가 나선거여. 까짓 영화판 뜨면 그만이지, 라고 맘먹고 여배우에게 대든 거지. 촬영하러 가자고 아무리 설득해도 여배우가 안하무인이라 내가 뺨을 한 대 때렸는데 밖에서 제작부장이 보고 있다가 고소해서 웃었다고 그래. 영화에 출연한 어떤 연극배우는 욕을 했고. 일이 더 커져버린 것이지. 이번에는 여배우가 임권택이 사과 안 하면 영화 못 찍겠다고 한 거여. 그려, 영화판 이제 뜨지, 라고 생각하고 있는데 제작자가 나한테 사정을 한 거예요. 어떻게든 영화는 살려야 하지 않겠느냐고. 그래서 여배우 방에 들어갔더니 꿇어앉아라 해놓고 뺨 세 대를 때리더군. 덩달아서 내가 여배우를 때릴 때 웃었던 제작부장도 맞았고. 여배우를 욕한 연극배우는 개에 비유한 욕을 했으니 개처럼 기어라, 해서 그렇게 했다고. 분해서 복수하려고 별렀다고. 일주일이면 촬영이 끝나니까.

안양 근처 폐광이 있는 데서 촬영하는데 며칠 동안 현장에 못 나가게 해. 끝나고 나면 그냥 보낼 수 없었다고. 그런데 제작자가 여배우를 빼돌린 지프가 경사길을 내려오고 있는 거요. 그래서 그 차 앞에 드러누웠지. 여배우는 하얗게 질리고.(웃음) 하지만 뭐 별수 있겠어요? 그냥 그대로 사태가 끝났어. 김삼화라는 그 여배우는 미국에 이민 가서 살고 있었던 모양인데 언젠가 인편으로 한번 기회가 되면 보자 연락이 왔어요. 나에 대해 배짱이 있고 강직하더라는 식으로 좋은 인상을 갖고 있더라고. 나도 지금 돌이켜보면 그 배우의 기개, 고집이 괜찮았다고 생각해(웃음).

젊은 나이에 감독으로 데뷔했는데 그 뒤로도 배우들과의 소통엔 문제가 없었습니까.

난 배우들과 다 친하게 지냈다고. 당대의 명배우라던 김승호 씨와도 친했고 여배우들과도 허물없었어요. 근데 내가 감독이 되고 나니 배우들이 말을 안 들어요. 야외촬영을 하면 구경꾼들이 보고 있는데 내가 나이도 젊었지만 동안이라 훨씬 어려 보이니 배우들이 자기 체면 때문에 일부러 말을 안 듣는 거요. 연출부한테 배우들 데려오라고 해도 안 와. 빨리빨리 해야 하는 데. 연기자한테 감독이 현장을 잡히면 안 되는 거요. 기선을 잡지 않으면 안 되지. 그럼 곧잘 NG를 내는 거야. 배우들이 자존심도 상했다 하고. 나중엔 알아가지고 잘들 했지만.(웃음)

감독 데뷔 이후 1960년대엔 작업속도가 그야말로 현기증 날 정도였습니다.

일 년에 다섯 편가량 했으니까. 나름 흥행감독이지요. 시나리오 제대로 된 게 없고 그런 때인데. 10년 동안 50여 편 했는데 무슨 힘으로 그리 했는지. 언젠가 모 대학교수가 그리 묻더라고. 생각 해보니까 그때 내가 우리나라에 나온 대중소설을 모조리 읽었는 데 그런 게 큰 도움이 된 거 같아요. 표절은 정말 없었으니까 그런 얘기의 축적이 급할 때 계속 써먹을 수 있게 소용이 된 모양이야.

1960년대의 영화를 보면 전체적인 완성도에 상관없이 특히 액션연출에서 비범함이 드러납니다.

실제로 하면서도 내가 뭘 잘하는지 보면 액션물과 시대물이야. 흥행이 잘됐으니까. 난 감독으로서 제대로 교육을 받은 적 없고 삶에 대해 애정을 가진 적 없었어요. 적당히 살다 죽으면 되지라는 막가는 생각이 있었어요. 좋은 영화를 만들어 남긴다는 꿈이 없었고. 그런 심정으로, 나는 힘이 없어 깡패는 안 되니까, 다른 삶을 생각할 겨를 없으니 막가는 인생을 그렸는지도 모르 지요. 액션물이 막가파 인생을 다루는 거니까.

그건 역시 정창화 감독 밑에서 조감독을 했던 경험과도 무관하지 않을 듯한데요.

정창화 감독은 치밀하고 꼼꼼한 분인데 한 커트 찍으면 꼭 나 한테 묻는 거야. 못 봐서 그런 게 아니라 혹시 놓친 게 있을까봐. 현장에선 배우들이 내 얼굴만 봤어요. 내가 NG라고 하면 NG 니까. 연기자들의 연기를 태만히 보면 안 되는 걸 정 감독한테 배웠다고. 오랜 연출부 생활에 그런 훈련을 하면서. 성우들도 나를 보면 양잿물 같다고 했어요. 웬만하면 오케이하고 넘어갈 것도 깐깐하게 구니까.

액션연출 쪽에서도 영향을 받았겠죠?

안 그럴 수가 없는 거요. 정창화 감독은 특히 액션을 잘 찍는 감독이요. 그래도 똑같이 해서는 살길이 없다는 걸 일찍이 알았어. 정 감독은 장쾌하고 활극다운 영화를 찍지만 난 뭘 해도 음산하고 끈적끈적해. 그래도 도저히 벗어날 길이 없는 거여. 그 양반이 액션을 가장 잘 찍었던 감독이니까.

젊은 시절부터 사극영화를 많이 연출했는데. 아무래도 사극은 규모가 더 크고 군중신도 많아서 힘들지 않습니까?

내가 운이 좋은 게 정창화 감독 밑에서 조감독 할 때 사극을 찍었어요. 그걸 거치며 단련이 돼서 사극이 힘들다는 생각을 안 해봤어요.

데뷔작인 <두만강아 잘 있거라>는 전쟁영화였고 또 다른 초기작인 <망부석>은 사극이었는데 두 편 다 완성도가 수일합니다. <두만강아 잘 있거라>는 스키 전투 장면이 유명한데요.  

스키 전투 신… 그것 때문에 흥행이 된 거요. 일본군과 독립군이 스키 타고 싸우는 건데. 말도 안 되는 거지. 그게 늘 부끄러웠다고. 군인들이 싸우는데 박격포 쏘아붙이고. 그게 흥행요소지만 평생을 후회하지. 최선을 다해 찍지만 보고 나서는 후회하지.

언제나 1960년대에 만들었던 영화는 습작에 불과하다고 스스로 폄하하시는데 정성일 평론가를 비롯한 일부 영화광은 이 시기의 영화를 적극적으로 재평가하려고 합니다.

그게 참 난감한 거요. 난 그 영화들을 다시 보고 싶지 않다고. 그 저 내 영화적 이력을 갖추는데 필요했을 뿐이지.

결국 본격적인 임권택 영화의 시작점은 <잡초>라고 보는 생각이 여전한 겁니까.  

물론이요. 1973년인가 <잡초>가 개봉했을 텐데… 그때까지 액션물도 있고 하지만 우리 삶과는 무관한 영화를 찍고 있었어요. 삶이 주는 리얼한 것이 아주 없는 것은 아닐지라도 거의 없었으니까. 내가 나이가 들고 엄청나게 술을 먹어가지고 임권택 하면 감독보다는 술로 유명했어요.

어느 개울에, 눈밭에 들어가면서 이러다 내가 죽지 위기감을 느끼곤 했는데. 진짜 많이 성실한 삶에 대해, 내 인생을 그리 가지 못하고 끝나는가 하고. 나이가 드니까 뭘 살고 있는가라는 회의가들어요.작품의 패턴을 바꾸고 사람 사는 얘기를 찍어보자 했지요. 사실 그런 각성한다고 누가 내게 영화를 찍으라고 하겠어요? 결국 내가 제작하고 연출한 거요. 찍고 나서도 <증언> 이란 반공국책 영화 찍으러 돌아다니느라고 나 몰라라, 아는 형 한테 극장 잡아서 틀라고 부탁했는데 어느 극장에 ‘빵구 프로’로 들어가서 망했어요. <잡초>는 거개가 다 못 봤을 거요. 놓친 고기가 크다고, 지금도 눈에 선한 영화요. 아마 지금 봐도 괜찮은 게 있을 거라고.

당시 우수 영화 포상제도도 경력 관리에 도움이 된 측면이 있죠?

그게 역설적인데 대종상, 반공영화상, 그런 것 때문에 나는 쉬지 않고 찍을 수가 있었으니.

<잡초> 이후에 감독으로서의 각성이 작품세계에 어떤 영향을 미쳤다고 보십니까.

그게… 1960년대까지 삼류 미국영화는 따라잡지 않을까 했는 데 결국 미국영화 아류에 들어서 해먹다가는 내 인생 망가진다고 본 거지. 어떻게든 미국영화 영향에서 벗어나겠다 생각했지만 10년 걸리는 거여 그게. 저급한 그런 것들이 체질화돼서 빼 내는 것이….

외롭지는 않으셨나요?

<족보> <깃발 없는 기수> 그런 걸 만들었어도 누가 봐줘야지. 내가 현재 찍고 있는 영화가 한국인의 정서, 흥, 정직하게 찍어 가고 있는데 누가 봐줘야지 말이죠.(웃음)

그럼에도 지금 보면 그 영화들 퍽 흥미롭습니다.  

굉장히 위험하기 짝이 없는 커트들이 있어요. 여배우 때렸던 기질이 살아 있었던 거 같아. 소신이 서면 찍는 거요. 우리는 어렸을 적 고향에서 본 정서적인 것들이 있는데 다른 사람들은 미국영화 같은 것을 찍어야 하니까. 내가 운이 좋았던 거지. 그런 것 해내려는 선각자라고 하긴 어려워도 해내지 않으면 안 된다는 마음이 있었던 거 같아.

<만다라>는 처음으로 먼저 영화사에 기획을 제의한 작품으로 아는데요.

화천공사에서 <만다라> 얘기 나왔는데 원작을 읽으면서 죽어도 내가 해야 한다고 생각했어요. 처음이요 그게. 승려사회를 찍고는 있지만 계율 밖에서 살고 있고 계율 안에서 몸부림치는, 나 자신도 대충 사는 것에서 벗어나면서 이렇게 치열하게 살아가는 게 아름다울 수 있구나, 승려의 얘기가 아니라고 하더라도 자기 삶의 완성을 향해 가는 게 참 아름답구나, 그런 마음으로 영화를 찍었죠.

<만다라>에서 풍경이 체계적인 형식의 일부가 됩니다.

<족보>에서부터 시작하고 있었던 건데 <만다라>에서 좋은 소재와 만난 거요. 그전의 작품들에도 편재해 있어요. <만다라>에선 수행을 통해 각을 얻으려는, 어디를 가든 그 사람의 삶의 현장을 잡으려고 한 거요. 보기 좋은, 잡스러운 그런데 현혹되지 않고.

1990년대엔 한국영화사상 가장 흥행한 작품을 연달아 내놓셨습니다.

<장군의 아들>은… 그때는 이미 내가 1960년대에 액션영화 감독이었다는 걸 모를 때죠. 다시 액션을 찍는다는 게 싫어서 얼마나 고사를 했는데. 싫어는 했어도 액션물 찍는 데 타고난 소질이 있긴 있는가 봐요. 찍으면서 보니까 내 안의 어떤 것이 나오더라고. <서편제>는 그렇게 흥행될지 몰랐다고. 나는 운이 좋았던 거요. 놀라기도 했지만 분위기 휩쓸려 들어 가서 정신 놓고 산 적도 없고. 망해서 없는 걸 무서워할 줄 몰랐지요. 그래도 지금은 굉장히 무서워한다고. 가난을, 노년을 걱 정해야 하는데 가끔 걱정하고 대개는 잊어먹고 살아요.(웃음)

<태백산맥>은 어땠습니까?

우익, 좌익 양쪽으로부터 직사하게 욕만 먹은 거밖에 없다고… 그래도 나는 그 소신을 찍었다는 것으로 만족해요… 우익과 좌익이 서로 치고받고 싸웠지만 얻는 게 아무것도 없다는 거 아니요.

2000년에 칸영화제 경쟁에 가셨는데 <춘향뎐>으로 갔다는 게 정말 좋았습니다.

텔룰라이드영화제라고, 콜로라도 탄광촌에서 열리는 영화제가 있어요. 유명매체 사람들 다 부르는 곳이요. ID카드가 1500 달러, 2500달러 하는데 거기서 떴다 하면 뉴욕에 금방 소문이 나지요. 실험영화계의 대부인 스페인 감독과 콜로라도 주립대학의 유명 교수가 <춘향뎐> 보고 나를 만나고 싶다고 하는데 얼마 안 되는 거리라 바로 오면 되는데 어렵게 연락해서 만났어요. 둘이 찾아와서 무슨 얘기를 하냐 하면 “<춘향뎐>을 봤다. 세계에 유명 고전이 많은데 <춘향뎐>도 그런 명작의 하나다. 깜짝 놀랐 다. 판소리 생경하고 그랬는데 뒤에 가서 정말 좋더라. <춘향뎐> 은 한국인끼리 봤지만 이젠 세계인이 교류하게 됐다” 하더군요. 과분한 칭찬에 등골이 서늘해졌지요. 얼마나 많은 해를 밖으로 알리고자 노력했는데 이런 대가들이 칭찬을 할 적에 이런 노력이 이런 데서 성과가 드러나고 있구나 싶어 기분이 좋기도 하고 기왕의 그런 노력이 장하기도 했었는데. 앞으로도 계속 정신 놓지 말고 영화 하려고 그래요. 두고 봐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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