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해적>, 그 사라진 뒷이야기를 찾아라! 꼭 찾아야 할 한국영화

by.오승욱(영화감독) 2009-05-08조회 2,092
일본해적

옛날, 영화를 홍보하는 수단이란 것이 길거리의 포스터와 신문광고가 거의 전부였던 때가 있었다. 1960년대 말과 70년대 초, 집과 학교를 오가면서 매일 보았던 동네 곳곳에 붙어 있던 영화 포스터들이 내가 접할 수 있는 영화 정보의 전부였다. 영화 포스터들은 동네의 길목마다 극장들의 자기 자리가 정해져 있었는데, 신영극장은 튀김집 출입구 옆의 시멘트 벽. 대흥 극장은 집 앞 점포의 유리 창문. 마포극장은 골목 어귀의 만홧가게 유리문이었다. 그러나 나의 눈에 가장 많이 띈 것은 동네의 아이들이 놀이터였던 제재소 앞 공터의 나무판자를 이어 만든 벽에 붙어 있던 포스터들이었다. 그 벽에는 동네 극장들의 포스터와 저 멀리 마포의 마포극장, 대성극장 포스터까지 붙어 있어서 영화 포스터의 집합 장소였고, 동네 꼬마들은 그 포스터를 바라보며 한마디씩 했던 것이다.

박노식 감독의 <집행유예> 포스터. 그 뜻을 모르면서도 제목이 주는 강건한 맛과 고개를 숙이고 뭔가 불만에 찬 듯한 박노식의 얼굴. 그리고 붉은 붓글씨로 휘갈겨 쓴 제목이 인상적이었다. 김기영 감독의 <파계> 포스터. 한문으로 큼직하게 쓴 그 고딕체의 글자가 멋있었고, 당시 어린 소녀였던 임예진의 모습이 아름다웠다(물론 이 기억은 왜곡된 것이다. 영상자료원에 입력된 포스터는 아마 전혀 다른 모양일 것이다). 그리고 나의 뇌리에 아직까지 박혀 있는 영화 포스터가 있다. 어머니를 따라 저 중림동 산동네에 집을 보러 가는 길에 보았던 중림동 산동네의, 콜타르가 칠해진 검은 나무판자를 이어붙인 벽에 붙어 있던 포스터였다. 손으로 긁으면 손톱에 새까맣게 진득진득한 기름이 묻어나는 그 나무판자 위에 <일본해적>이란 제목의 붉은 바탕의 포스터. 부동산 할아버지와 어머니는 산동네 꼭대기까지 집을 보러 가야 했고, 그동안 나는 복덕방 앞에서 시간을 죽이고 있어야 했다. 그때 내 눈을 사로잡은 것이 바로 이만희 감독, 박노식 주연의 영화 <일본해적>이었다. 콜타르칠을 한 나무판자벽 위에는 영화 포스터가 붙어 있고, 나무판자 사이로 흙먼지 자욱한 마포 거리가 내려다보였다. 그때 나는 어머니를 기다리며 30여 분 동안 박노식 주연의 <일본해적> 포스터를 주구장창 쳐다보았다. 지금도 내 기억 속에 남아 있는 영화 포스터의 대부분은 박노식이 나오는 영화다.

<쟉크를 채워라> <집행유예> <육군사관학교> <지프!> <왜?> <방범대원 용팔이> 같은 강렬하고 인상적인 제목에 박노식이 인상을 쓰는 얼굴 클로즈업. 그중에서도 가장 강렬했던 것은 <일본해적>으로, 봉두난발을 하고 손에는 쇠고랑을 차고 누군가를 향해 눈을 부릅뜨고 달려 나가려는 박노식의 모습과, 그의 발치에 때 묻은 한복을 입은 여자가 그의 바짓가랑이를 잡고 울부짖고, 그들 뒤로는 시뻘건 피 같은, 불타오르는 것 같은 붉은 바탕이 기억난다.

포스터를 한참 바라보고 있는데 지금은 환갑의 나이가 되었지만, 그 당시에는 파릇파릇하고 뽀송뽀송한 대학 1, 2학년이던 삼촌들이 집을 보러 다니는 누나를 돕기 위해 찾아와서는 <일본해적> 포스터를 보고는 대단한 영화라고 이야기한 것이 기억난다. 삼촌들은 <일본해적>에서 왜구들과 싸우는 박노식에 대해 이야기하고, 영화 속에서 일본 해적이 할복하는 장면에 대해 이야기했다. 당시 초등학교 1학년이던 나는 삼촌들에게 그 영화를 보여달라고 했고, 삼촌들은 “이 영화는 네가 보면 안 돼!” 하며 딱 잘라 거절했다. 그 이유는 너무 잔인하다는 것이었다. 삼촌들은 날 데리고 한국 최초의 입체 영화 <임꺽정>이나 <맹인협객> <아라비아의 로렌스> <패튼 대전차군단> <대야망> <바이킹> 같은 액션영화들을 곧잘 보여주곤 했는데, 이 영화는 그런 영화들처럼 널 데리고 구경 갈 수 없다는 것이었다. 당시 나는 너무나 궁금했다. 도대체 저 영화 속에 뭐가 있기에 내가 보면 안 된다는 것일까? 할복이란 뭘까? 그리고 잔인하다는 것은 뭘까? 뭔가 무서운 것이 있다는 이야기 정도로 알아들었던 나는 포스터의 구석에 자리 잡은 이상한 가면을 쓴 일본 해적들이 너무나 무서워서 내가 보면 안 된다는 그 이유 중 하나가 바로 저런 것 때문이 아닐까 하고 곰곰이 생각했다. 그리고 나는 밤마다 보지도 않은 <일본해적>이라는 영화를 상상하고는 무서운 악몽을 꿨다. 그리고 나이가 들어 1990년대, 비디오가 산더미처럼 쏟아져 나오던 그 시대에 나는 비디오가게를 가면 언제나 이만희 감독의 <일본해적>을 애타게 찾았다. 청계천 8가의 비디오 도매상과 한국에 출시된 웬만한 비디오는 다 있다는 비디오 가게를 찾아가도 내가 찾는 그 영화는 볼 수 없었다. 그리고 세월이 흘러 영상자료원에 <일본해적>의 프린트가 있다는 소식을 들었다. 아! 이제야 그 영화를 볼 수 있겠구나 하고 쾌재를 불렀지만 남아 있는 <일본해적>의 프린트는 참담했다. 35mm 프린트는 남아 있지 않고, 다만 85분의 상영시간 중 처음 40분 정도가 16mm 프린트로 남아있다는 거였다. 그리고 가장 중요하고 절망적인 사실. <일본해적>은 네거 필름이 사라져 없다는 것이었다. 그래도 남아 있는 그 부분이라도 보기 위해 나는 영상자료원으로 향했다. 40여 년 전 삼촌이 나는 보면 안 된다고 했던 그 비밀을 풀기 위해서. 하지만 그 비밀을 풀 수 없었다. 현재 영상자료원에 남아 있는 16mm 프린트는 누군가가 함부로 거칠게 손질한 것이 분명한, 훼손된 것이었다.

나와 비슷한 또래들 중 유년 시절 영화를 본 장소가 늦은 밤 학교 운동장이거나 마을회관 또는 학교 강당이었던 사람들이 있다. 물론 그들은 도시가 아니라 시골에 살았던 사람들이다. 1970년대까지도 극장이 없던 시골에서는 마을사람들을 전부 한자리에 모아놓고 16mm 프린트를 가지고 영화를 상영했다. 모두가 일이 끝난 저녁 무렵이 되어서야 영화를 상영했다. 사람들이 전부 한자리에 모였으니, 아기부터 그 마을의 최고 고령자까지 모든 연령층이 모였을 것이다. 모두가 보아야 하는 영화이니 상영 기사는 스스로의 판단에 따라 가위질을 했을 것이다. 만약 대단히 적극적인 상영 기사였다면 이웃마을 개똥이 할아버지가 집에 돌아가는 시간까지 고려해서 상영 시간을 늘였다 줄였다를 마음대로 했을 것이고, 영화의 줄거리까지 마음대로 바꾸는 편집 능력과 마음에 안 드는 장면을 잘라버리는 대단한 권력을 행사했을 것이다.

남아 있는 40여 분 분량의 16mm 프린트는 여기저기 가위질을 해서 마음대로 이어붙인 흔적이 남아 있었다. 남아 있는 40여 분 분량의 영화를 보았다. 무슨 내용의 영화인지 도저히 알 수 없었다. 당시 이 영화의 프린트를 가지고 시골마을을 찾아다녔던 상영 기사는 대단히 적극적인 사람이었나 보다. 영화의 줄거리를 알 수 없게 신과 신을 자신의 구미에 맞게 재편집해서 이렇게저렇게 잘라 붙이고, 제멋대로 마음에 안 드는 장면을 단축하고 없애버렸다. 몇 해 전, 프린트가 하나도 안 남아 있는 이두용 감독의 태권영화들 중 다행스럽게 하나가 있다고 해서 보니, <분노의 왼발>이 16mm 프린트였다. 기대하고 보았더니 영화는 찍다가 말았는지 도저히 말이 안 되는 것이었다. 그 16mm 프린트 역시 <일본해적>과 비슷한 경우가 아닐까 하는 생각을 이제야 와서 한다. 하여튼 40여 분 분량으로 남아 있는 <일본해적>은 이만희는 역시 영화를 가장 영화답게 만들 줄 아는 감독이라는 신뢰를 저버리지 않게 했다. 일본 해적들이 나와서 양민을 잔인하게 학살하고 관객에게 그런 자극적인 볼거리만을 제공하는 그런 영화일 거라는 헛된 상상은 영화를 보면서 사라졌다. 일본 해적들의 잔인한 침략에 맞서 우리의 주인공 박노식이 사람들을 모아 통쾌하게 쳐부순다는 그런 내용의 영화도 아니었다. 정말이지 이만희 감독을 존경할 수밖에는 없는 것이 영화는 일본 해적과 맞서 싸우려는 박노식과 마을 사람들. 그리고 일본 해적과 싸우는 마을 사람들을 돕기는커녕 항상 그들을 수탈하고, 일본 해적이 나타나면 제일 먼저 내빼고, 일본 해적이 도망치면 제일 먼저 나타나서 생색을 내는 군사들과 양반들에 대한 영화였다. 군사들과 양반들은 일본 해적들과 싸우면서 우두머리로 나선 박노식을 두려워하여 그의 공을 치하하기는커녕 그를 잡아가두고 고문한다. 역시 이만회 감독. 그는 1972년 당시 뭔가에 분노하고 있었다. 영사기사가 함부로 훼손하고 이리저리 재편집했지만 이만희의 분노를 숨길 수는 없었다.

영화는 감옥에 갇혀 있는 박노식의 회상으로부터 시작된다. 군관이었던 그는 어떤 이유로 자신의 상관을 죽이고, 왜구의 약탈에 신음하고 있는 바닷가 마을로 숨어들어온다. 마을 사람들을 도와 왜구들과 싸우던 그는 양반의 아들에게 강간당하고 버림받은 기구한 운명의 여인을 돕고, 그것을 빌미로 간악한 양반들의 분노를 사서 억울한 누명을 쓰고 감옥에 갇힌다. 그는 탈옥해 왜구들과 싸우지만, 군졸들은 왜구들과 싸우지 않고 박노식의 과거를 캐서 그를 제거하려고만 한다. 현재 남아 있는 프린트로는 여기까지의 이야기밖에는 알 수 없다. 박노식은 걸걸한 호걸인 낭 역을 역시 멋지게 하고 있고, 몇 년 후 고교 얄개로 청춘 영화의 주인공이 된 이승현의 천연덕스러운 아역 연기도 볼 수 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멋있었던 역할은 일본 해적의 부두목으로 나오는 문오장이다. 그는 나중에 목사가 되어 영화계를 떠났지만 문오장은 1970년대의 악역 중의 악역이었다. 그는 이 영화에서 비록 해적이지만, 여주인공을 집단 강간하는 동료들을 혐오하여 그들을 막으려 하고, 정신이상자 같은 두목의 폭주를 막으려 애쓰는 그런 인물로 나온다. 그는 두목과 대립해 그와 결투를 벌여 승부에 이기지만, 자신이 선택한 두목이고, 잘못된 판단으로 인해 잘못된 길로 나섰으니 그 대가를 치르겠다며, 하극상을 일으켰으니 그 벌을 받겠다며 할복하는데, 당시 영화들의 악역으로서는 대단히 복잡한 캐릭터를 가진 인물이어서 흥미로웠다. 하지만 여기까지다. 영화는 40분밖에는 볼 수 없고, 나머지 이야기는 사라져버려 이 세상 어디에도 없다. 나는 가끔 이런 꿈을 꾼다. 지방의 어느 도시. 어느 지하 창고, 또는 어느 방 안에 이렇게 사라져버린 영화의 프린트들이 조용히 세상 밖으로 나올 그날을 기다리며 숨을 쉬고 있는 장면을. 창고 가득히 쌓여 있는 프린트들 중에는 <만추>도 있고, <일본해적>도 있고 <배신자>도 있다. 결본이 없는 완벽한 상태의 프린트들. 그것이 발견되어 이 영화의 마지막 결말을 볼 수 있는 그런 날을 꿈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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