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본 김수현] 외로움과의 긴 싸움

by.고윤희(시나리오 작가) 2009-03-10조회 946
고윤희

한국식 착한 여자로 평가받으려면 일단은 너무 솔직하거나 정직하면 안 된다. 그리고 순하고 순진하고 착한 척해야 하는데, 그녀는 그 ''여성다운착한 척''을 안 하는 것 같다. 적어도 한 남자와 7년 이상 살려면 ''여성다운 착한 척''을 체내에 20% 이상 가지고 있어야 한다. 또 내가 그녀가 좋은 사람이라는 생각을 하게 된 데에는 그녀의 캐릭터들에 있다. 많은 드라마의 캐릭터들이 악역은 원초적으로 나쁜 사람이고 착한 사람은 원초적으로 착하다.

나는 김수현 작가님의 드라마는 거의 다 보았다. 내가 1974년생이니 그 전에 방송했던 것은 놓쳤겠지만, 인지구조가 생기고 난 후에 방송된 것들은 거의 다 보았다. 일부러 챙겨 본 것은 아니다. 김수현 작가님에 대한 글을 쓰려고 생각해 보니 내가 지난날 그녀의 드라마들을 다 보았다는 것을 깨달은 것이다. 작가가되고 나서는 의식적으로 더 보았다. 김수현 작가님의 드라마는 여러 가지로 공부가 많이 되기 때문이다. 내 개인적인 판단으론 지금껏 우리나라 작가들 중 플롯과 캐릭터가 둘 다 완벽하게 탄탄한 작가는 김수현 작가님뿐이다. 드라마나 영화를 써본 사람은 알겠지만, 이 두 가지를 공존하게 갖추는 것은 상당히 어려운 일이다.

보통 플롯을 잘 쓰는 작가는 캐릭터가 약해진다. 캐릭터를 만드는 감각이 뛰어난 작가는 플롯이 약해진다. 그런데 김수현 작가님의 드라마들은 캐릭터나 플롯 둘 다 어느 서로에게 밀리거나 우세하거나 기울지 않고 반을 뚝 자른 듯이 둘의 평형 배분이 정확하다. 작가가 두 가지 요소를 둘 다 정확하게 다 갖추기는 정말 어려운 일이다. 바로 이 점 때문에 나는 김수현 작가의 작품을 공부해야겠다고 마음먹었다. 그래서 그녀의 홈페이지도 들어가보았다. 대본을 공부하려는 목적으로 들어갔는데 정작 대본은 안 읽고, 그녀의 에세이와 신변잡기에 관한 글만 다 읽었다. 실은 공부보단 ‘이렇게 재능을 가진 작가는 대체 어떤 사람일까’에 대한 궁금증과 호기심이었던 것 같다.

내가 본 그녀의 드라마들의 느낌으론 적어도 그녀는 나쁜 사람은 아니다. 이렇게 얘기하는 건 예술가나 창조적 작업을 하는 사람들 중엔 본인 스스로는 못 깨닫지만 꽤나 다른 사람에게 피해를 주는 나쁜 사람들이 있기 때문이다. 내가 판단하는 착하고 나쁜 기준의 첫 번째는 얼마나 자신과 다른 사람을 속이느냐 속이지 않느냐, 얼마나 다른 사람에게 피해를 주느냐 안 주느냐인데, 그녀는 내 느낌으론 자신에게 정직하고 남에게 피해 주는 걸 싫어하는 사람인 것 같다.

물론 한국식 착한 여자의 관점에서 많이 벗어나 있는 것 같긴 하다. 한국식 착한 여자로 평가받으려면 일단은 너무 솔직하거나 정직하면 안 된다. 그리고 순하고 순진하고 착한 척해야 하는데, 그녀는 그 ‘여성다운 착한 척’을 안 하는 것 같다. 적어도 한 남자와 7년 이상 살려면 ‘여성다운 착한 척’을 체내에 20% 이상 가지고 있어야 한다. 또 내가 그녀가 좋은 사람이라는 생각을 하게 된 데에는 그녀의 캐릭터들에 있다. 많은 드라마의 캐릭터들이 악역은 원초적으로 나쁜 사람이고 착한 사람은 원초적으로 착하다.

그러나 김수현 작가님의 드라마 속 인간은 모두 나쁘기도 하고 착하기도 하고, 나쁜 사람이 착한 짓도 했다가 착한 사람이 가끔 비겁한 짓도 한다. 친한 감독이 그런 말을 한 적이 있다. “착한 영화를 찍는 감독치고 진짜 착한 사람 없어. 나쁜 영화를 찍는 사람치고 나쁜 사람 없어……. 나쁘게 그릴 수 있는 건 그만큼 자신에게 정직하기 때문이야.” 나는 그녀를 실제로 안 만나봐서 함부로 얘기하긴 힘들지만 그녀의 드라마들로만 봐서는 그녀는 누구보다 인간을 잘 이해하고 애정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다. 내가 그녀의 삶을 궁금해한 이유는 그녀의 드라마 를 끝맺는 결말의 방식에 있다. 나만 느꼈 는지 어쨌는지 모르지만 그녀의 드라마 는 이상하게 몹시 쓸쓸한 구석이 있다. 불 륜도 쓸쓸하고 해피엔딩도 쓸쓸하다. 사 랑을 해도 항상 마지막엔 혼자 커피숍에 서 사색하고 혼자 여행을 하고 혼자 정리 한다. 대부분의 결말들이 ''인생이 다 그런 거지, 인생이 원래 쓸쓸해… 원래 인간은 혼자야… 인생 뭐 별거 있나… 암껏두 아 냐…….'' 하고 나직이 읊조리며 처연히 등 을 돌리고 혼자 떠나는 느낌이다. <사랑과 야망>에서 거대한 욕망덩어리이자 피곤 한 까칠녀인 미자가 보내는 마지막 대사 에 등골이 서늘해졌다.

보통 여자들이라면 "뭘 더 바래? 이게 행복이야. 이제 됐어. 이제 완벽해." 하고 여길 남편과 아들이 잠들어 있는 스 위트 홈에서 새벽에 자다 말고 나와 눈 오 는 창밖을 몹시 쓸쓸한 표정으로 바라보 며 "우리 아버지는 잘 계시나… 안 외로우 실까?" 하고 심란하게 읊조린다. 나는 가 슴이 먹먹해진다. 어떻게 저 여자는 저렇 게 외롭나……? 그 장면은 김수현 작가님 의 드라마 중 가장 가슴에 남는 장면이 다. 작년 우연히 김수현 작가님의 <보통 여자>라는 영화로 관객과의 대화를 한 적 이 있다. 그때 미리 집으로 보내온 비디오 테이프를 엄마와 밤에 봤었다. 영화는 제 목처럼 보통 여자가 되고 싶지만 보통 여 자가 되지 못하고, 한 남자의 세컨드로 집 안에만 갇혀 사는 여자의 외로움과 쓸쓸 한 일상을 담은 심리극이다. 김수현 작가 님의 초기작인데 지금 작품들의 심리묘 사와 날카로운 대사들이 그때도 아주 잘 살아 있어서 영화 내내 큰 사건 없이 거의 한 방에서만 벌어지는 씬들인데도 지루하지 않고 그녀의 재능이 아주 반짝거린다. 그런데 같이 영화를 본 엄마는 그 내용을 잘 공감 하지 못하는 눈치다.

엄마는 한 남자와 결혼해 아이를 넷씩이나 낳고 보통 가정의 보통 여자로 평생 을 살아온 분이다. 엄마는 김수현 작가님과 비슷한 연배이시다. 나는 언젠가부터 엄마와 김수현 작가님을 비교하는 버릇이 생겼다. ''우리 엄마가 김수현 같은 사람이면 내가 얼 마나 밖에 나가 기죽지 않고 당당하게 살 수 있을까?'' 하고 생각한 적도 있다. 엄마는 올 해로 결혼 40주년을 맞이하고 김수현 작가님은 데뷔 40주년이시라고 한다.

두 분은 정 반대의 삶을 사셨다. 나는 두 분의 여자로서의 인생을 생각하게 되었 다. 한 분은 정말 보통 여자로 사시고 한 분은 보통이 아닌 여자로 사셨다. 그런데 보통 여 자로 사신 분은 보통이 아닌 여자로 사신 분이 쓰신 <보통여자>라는 영화를 잘 이해를 못 하신다. "나는 다음에 태어나면 부잣집에 태어나서 하고 싶은 공부도 맘껏 하고 내 하고 싶은 것 좀 맘껏 펼치고 살았으면 좋겠어." 결혼 40주년을 맞이해 운전을 못하는 엄마를 위해 차로 드라이브를 시켜드리는데 멍하게 창밖을 바라보며 엄마는 그런 말을 내뱉으 신다.

김수현 작가님도 혹시 자신의 딸과 마주 앉아 계실 땐 "나도 다시 태어난다면 보통 여자로 살아보고 싶어." 하지 않으실까? 나는 두 여인을 보며 과연 어떤 선택을 하 며 사는 게 행복할지, 또 나는 어떤 선택을 하게 될지 아직 잘 모르겠다. 몇 편 안 써봤는데 도 나는 글을 쓴다는 게 얼마나 지독히 외롭고 괴로운 일인지 체험했다. 괴로움은 참겠 는데, 외로움은 참 참기 힘든 것이다. 김수현 작가님이 그 많은 작품을 쌓으실 동안 얼마 나 무서운 외로움 덩어리들이랑 싸워왔을까? 나는 그 작품들의 위대함에 대해 경탄을 보내기 이전에 40년이란 무거운 세월, 자식과 남편 때문에 자신을 잊어버린 한 여인과, 작품 때문에 자신을 잊어버린 또 한 여인에게 연민의 박수를 조용히 쳐주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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