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길종, 시대와의 불화] 청년문화의 정점에서 피었다 지다 하길종과 영상시대

by.안재석(인제대학교 겸임교수) 2009-01-15조회 1,139
바보들의 행진

젊은이들의 열망과 좌절 : 청년문화의 등장

‘청년문화(youth culture)’라는 말은 1970년대 한국 대중문화의 새로운 현상을 설명하는 가장 보편화된 용어이다. 1970년대 초반은, 해방 이후 태어나 일본문화에 대한 직접적인 영향을 받지 않은 대신 미국문화의 강력한 영향 속에서 자란 세대가 청년기에 이른 시기였는데, ‘청년문화’는 바로 이들이 이전 세대와는 다른 생활감각과 가치체계, 미적 취향을 지니게 되면서 대중문화의 세대교체가 격렬한 문화적 갈등을 수반하며 나타난 현상이었다.

식민지 상황과 전쟁, 가난 등으로부터 직접적인 영향을 받지 않은 이들 새로운 세대는 이전 세대가 지고 있던 역사에 대한 콤플렉스로부터 벗어나, 스스로 자신의 운명과 국가의 장래를 책임진다는 확신으로 대담한 자기표현과 능동적인 선택을 해나갔다. 적어도 제도교육을 통해서 민주주의와 자유의 중요성과 당위성에 대해 배웠고, 4·19로 시작된 학생운동의 시대인 1960년대 속에서 성장해온 이들이 일제시대 세대의 권위주의에 대해 반감을 보인 것은 당연한 것이었다. 또한 AFKN과 심야방송을 통해서 팝송을 들으며 자라 어릴 적부터 자연스럽게 미국식 대중문화에 노출되어 있던 이들이 1960년대 미국을 휩쓸었던 모던 포크와 록 음악을 받아들인 것도 당연한 현상이었다.

그래서 미니스커트, 청바지, 장발 등의 유행으로 요약되는 이 시기 청년문화의 다양한 기표들은 산업화와 근대화의 초입에 들어선 한국의 청년들에게 도시문화의 자유를 대변하는 것인 동시에 유신체제에 대한 반문화적인 저항의 표현이기도 했다. 경찰은 가위와 자를 가지고 다니며 장발과 미니스커트를 단속했고, 걸리면 그 자리에서 머리가 잘리고 즉심에 넘겨졌다. 당연히 미니스커트를 입거나 장발을 고집하는 것은 청년들의 자발적이고 순수한 욕망의 표현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당시에는 권력에 맞서는 행위로 인식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이처럼 완전히 저항적이지도, 투항적이지도 않았던 이 시기 청년문화는 서구문화의 무분별한 대량 흡수라는 위험을 안고 있었고, 저항의 방식도 낭만적인 한풀이나 퇴폐적인 패배주의의 흔적을 담고 있는 등 시대적으로 분명한 한계를 지니고 있긴 했지만, ‘아버지의 문화’ 또는 주류 문화에 대한 하나의 대안으로서 맹아(萌芽)가 발견될 수 있었다는 점에서 중요한 지점이라 할 수 있다. 우리나라 대중문화의 지형에 생기와 긴장, 그리고 탄성의 기운이 그때처럼 약동하던 때가 없었으며, 그 분기점을 통해 한국 대중문화는 비로소 대중문화의 한국적 정체성을 구성할 수 있었던 것이다.

산업자본주의의 대량 문화를 경험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풍자와 상징, 암시와 은유를 통해 유신체제에 저항했던 이들 새로운 세대의 새로운 감수성은 좁은 캠퍼스를 뛰쳐나와 한 나라의 문화적 헤게모니를 장악하였고, 기존의 문화규범과 아주 다른 문화형태를 생산해내기에 충분할 만큼 폭발력이 있었다. 새로운 소재와 문체를 구사한 최인호, 조선작, 조해일의 소설, 이장희, 송창식, 김민기, 신중현 등 셀 수도 없이 많은 젊은 통기타 가수들의 포크송과 록 음악은 고도성장의 그늘과 억압으로부터 탈출구를 찾으며 부글거리는 욕망을 적극적으로 반영했다.

국내 영화계에서도 청년문화를 대표하는 감독들의 영화는 가공할 만한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었다. 이장호 감독의 데뷔작 <별들의 고향>(1974)을 필두로, <어제 내린 비>(1975, 이장호), <영자의 전성시대>(1975, 김호선), <바보들의 행진>(1975, 하길종)의 잇단 흥행 성공은 당시 청년문화의 흡인력을 보여주는 단적인 예이다. 30대 젊은 감독들의 젊은 풍속영화였던 이들 작품은 같은 또래의 작가들인 최인호, 조선작 등의 대중소설을 바탕으로 삼았으며, 이장희, 송창식 등의 포크송을 영화음악으로 삽입한, 당시 청년문화의 결정판이었다.

한국영화 예술화 운동, ‘영상시대’

익히 알려졌다시피 1970년대 한국영화계는 TV의 보급과 다양한 레저 문화의 발달로 인한 급격한 관객 감소로 불황이라는 먹구름에 휩싸여 있었다. 그러던 차에 터진 30대 젊은 감독들의 잇단 흥행 성공은, “진실로 방화계에 예술적 정신이 소양(素養)되어 있는 일각이 도사리고 있다면 그 파워가 새로운 관객을 상대로 영화예술의 잃어버린 본령을 되찾을 때 그때 불황은 분명히 없어질 것이 아닌가 싶다” 하길종, “1972년의 한국영화”, <세대> 1973년 1월호 (하길종, <영상, 인간구원의 메시지>, 예조각, 1981, p. 305에서 재인용).는 하길종의 평소 믿음이 실현되는 것처럼 보였다. 비록 “<별들의 고향>, <영자의 전성시대>, <바보들의 행진> 류가 영화란 말인가. 결단코 아니다. 단지 영화에 접근하려는 노력에 불과하다” 하길종, “한국영화의 현실과 전망”, <공주사대학보> 1975년 10월호 (하길종, 같은 책, pp. 291~292에서 재인용).며 쓴소리를 내뱉긴 했지만, 그가 찾던 ‘예술적 정신이 소양되어 있는 일각’, 즉 새로운 관객의 파워는 충분히 감지할 수 있었던 것이다.

이에 “연달아 일어난 흥행적 성공들을 그냥 지나쳐버리기보다 한데 모여 의논하고 힘을 모으자” 홍파, “하길종전 - 1970년~1979년까지”, 격월간 <영화> 1979년 1~2월호, p. 69.는 하길종의 제안에 따라 이장호, 김호선은 물론, 당시 이들과 자주 어울리던 또래 감독들인 이원세와 홍파 그리고 영화평론가 변인식 등 여섯 젊은 영화인들은 1975년 7월 18일, ‘영상시대’라는 동인(同人) 그룹을 결성한다. “‘비키니 섬의 거북이’처럼 영화의 본질에서 벗어나 방향상실로 허덕여온 한국영화… 우리는 아직껏 이 땅에 영화는 있었어도 영화예술은 부재했음을 알고 있다… ‘새 세대가 만든 새 영화’, 이것은 구각을 깨는 신선한 바람, 즉 회칠한 무덤 같은 권위주의를 향한 예리한 투창이어야 한다. 과연 이 땅에서 단 한 번의 ‘누벨바그’나 ‘뉴 시네마’ 운동이 전개된 적이 있었던가?”라는 선언문은 이들의 동인 활동이 ‘영화예술의 잃어버린 본령’을 되찾기 위한 토대를 마련함과 동시에 1960년대 서구의 ‘새로운 영화(New Cinema)’ 운동을 염두에 둔 것이었음을 보여준다.

‘영상시대’ 동인들은 ‘한국영화 예술화 캠페인’을 캐치프레이즈로 내걸고 영화 제작은 물론 새로운 영화 인력의 발굴과 양성, 정기 영화 세미나 개최, 영화전문잡지 <영상시대> 발간(1977년 여름 창간호, 1978년 여름호) 등 다양한 활동을 펼쳤다. 특히 이들이 ‘영상시대’ 결성 후 가장 먼저 추진한 ‘새로운 영화 인력의 발굴과 양성’, 즉 ‘연출지망생 공개모집’과 ‘신인배우 선발대회’는 이른바 ‘청년문화의 기수’였던 ‘영상시대’ 감독들에 대한 당대 젊은이들의 신뢰와 동경에 힘입어 “모두 910명(연출지망 85명, 연기지망 825명)이 응모”할 정도로 엄청난 화제를 불러 모았다. 그리고 변인식의 표현대로, 이때부터 ‘영상시대’와 인연을 맺었던 한국판 ‘성난 젊은이(angry young man)’들은 훗날 영화감독, 영화제작자, 대학교수 등이 되어 사회 각계에서 맹활약을 펼쳤는데, 신승수(<수탉>), 이세민(<장미와 도박사>), 이황림(<깜보>), 장길수(<은마는 오지 않는다>), 정지영(<남부군>), 차현재(<방황하는 별들>) 등은 영화감독으로, 김창화는 대학교수로, 변정우는 아트디렉터로 1980, 90년대 한국영화 부흥의 주역이 되었다. 또한 김명수, 김인혜, 문지현, 서나미, 조영숙, 최민희, 한영봉(예명 한우리), 이길재, 김병곤, 임관배(예명 임성민), 이영하, 김기만(예명 김만) 등은 일정한 기간 동안 연기론과 실기훈련을 받은 뒤 ‘영상시대’ 감독들의 작품에 주, 조연으로 출연했는데, 특히 이들 중 임성민과 이영하는 이후 한국영화의 대표 배우로서 발돋움했다.

‘새 세대가 만든 새 영화’를 표방하며 내놓은 ‘영상시대’의 첫 작품은 <숲과 늪>(1975, 홍파)이었다. <한국문학> 1973년 12월호에 발표된 황석영의 단편소설 ‘섬섬옥수’를 원작으로 하고 있는 이 작품은 공식적인 첫 작품답게 ‘영상시대’ 동인들의 연대가 본격적으로 이루어진 작품이었다. ‘영상시대’의 신인배우 공모에서 선발된 신인들 중 맨 처음으로 최민희와 조영숙이 주연과 조연으로 출연할 기회를 얻었고, 여기에 각 감독들의 페르소나 같은 배우들이었던 <특별수사본부 외팔이 김종원>(1975, 이원세)의 박근형, <바보들의 행진>(하길종)의 하재영, 그리고 <영자의 전성시대>(김호선)의 송재호가 가세했으며, <별들의 고향>, <어제 내린 비>, <영자의 전성시대> 등에서 유려한 영상을 보여준 바 있던 장석준이 촬영을 맡았다. 이른바 ‘영상시대’의 대표주자들이 투입된 첫 번째 시험무대였던 셈이다.

하지만 ‘젊은이들의 애정 모럴에 관한 풍속도’를 모더니즘적인 ‘새로운 영화’ 양식으로 담아낸 이 작품은 26,037명의 관객 동원이라는 참담한 결과를 맞게 된다. 홍파 감독의 전작인 <묘녀>(7,095명 동원)보다는 많은 관객 동원이었지만, ‘영상시대’ 신인 공모 행사에서 느낄 수 있었던 젊은이들의 열광적인 호응과, 소위 ‘젊은 세대의 대변자들’이었던 ‘영상시대’ 동인들의 첫 번째 작품이라는 인지도에 비해서는 그야말로 여지없는 참패였던 것이다. 이러한 결과는 <꽃과 뱀>(1975, 이원세), <그래 그래 오늘은 안녕>(1976, 이장호), <여자를 찾습니다>(1976, 하길종), <여자들만 사는 거리>(1976, 김호선) 등 다른 동인들의 ‘영상시대’ 결성 후 첫 작품들 역시 마찬가지였다. 더욱이 <어디서 무엇이 되어 다시 만나리>(1977, 홍파)나 하길종 스스로 자신의 글에서 ‘수준작’이라고 평했던 <한네의 승천>(1977, 하길종)은 개봉조차 하지 못한 채 ‘1977년 상반기 우수영화’로 선정되어, 단지 제작사에 외화수입쿼터를 수혜케 해준 요식행위의 작품이라는 수치스런 신세로 전락해버리고 만다.

이상과 현실 사이의 괴리 : 청년문화의 퇴조

‘영상시대’ 작품들의 흥행 실패에 대해, 사실 완성도 면에서 전작들에 비해 떨어지는 태작(怠作)이었다는 평가가 지배적이지만, 그보다는 이들의 ‘한국영화 예술화 운동’이 그만큼 관객들과의 공감대를 형성하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보는 것이 더 타당할 듯 싶다. 다시 말해, 하길종이 ‘예술적 정신이 소양되어 있는 일각’이라고 믿었던 당시 젊은 관객들은 그가 생각했던 만큼 ‘새로운 영화’를 받아들일 만한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던 것이다. 그도 그럴 것이, “대부분 해외 정보에 눈이 어두운 우리의 관객들은 국내에 상영되는 외화를 통해 현대영화의 조류를 알게 되는데” 하길종, “1974년의 한국영화”, <서울평론> 1974년 12월호 (하길종, 같은 책, p. 307에서 재인용)., 당시 수입 상영된 외국영화들은 완전히 세계영화의 조류를 외면한 것들 일색이었고, 심지어 몇 년 전의 히트작들을 재개봉하는 사례가 많았기 때문에, ‘영상시대’ 작품들이 보여준 ‘새로운 영화’ 양식에 그들이 생소해할 수밖에 없었던 것은 당연했다.

그리고 무엇보다 이들의 활동이 젊은 세대 관객들과의 공감대를 형성할 수 없었던 것은 ‘영상시대’ 결성을 즈음하여 이미 한풀 꺾이기 시작한 청년문화의 급작스런 퇴조와도 연관이 있었다. 지배 권력은 미국식 자유주의의 흉내조차 허용하지 못할 정도로 경직되어 있었고 청년들의 행동에 검열의 칼을 들이댔다. 가장 먼저 ‘풍기문란’이라는 죄목으로 장발과 미니스커트를 단속했고, 1975년에는 예술문화윤리위원회를 내세워 ‘대중가요 재심 원칙과 방향’을 선포하고 440여 곡에 대해 음반 발매와 방송을 전격 금지했다. 급기야는 ‘대마초 사건’으로 당시 최고의 인기를 달리던 청년문화의 스타들이 구속되는 사태가 벌어졌다. 이장희, 윤형주, 김세환, 신중현 등이 구속되었고 이들은 오랜 기간 방송 출연은 물론 음반의 발표조차 할 수 없었다. 이 여파는 영화계로까지 확산되었고 많은 영화인들이 활동을 금지 당했다. ‘영상시대’ 동인이었던 이장호 역시 ‘대마초 사건’의 희생자였다.

초기화면 설정

초기화면 설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