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와 하길종] 영원한 청년으로 남은 하길종 나와 하길종, 이장호(영화감독, <바보선언> 등)

by.이장호(영화감독) 2009-01-15조회 1,310
이장호감독

하길종 감독의 성품을 한 눈에 알아볼 수 있는 에피소드를 하나 소개한다. 1975년쯤이었을 게다. 한진 흥업에서 제작한 김호선 감독의 작품이 히트해서 열린 자축연이었다. 나는 물론, 하길종 감독도 초대를 받아 술들이 거나해질 무렵이었다. 호텔의 중국음식 레스토랑에서 있었던 그 자리엔 열사람 정도 앉을 수 있는 둥근 식탁이 십여 개 차려져 있어 여기저기 스텝들과 배우들이 자리 잡았고 그 앞좌석 중앙에 귀빈석처럼 한진흥업의 한갑진 사장의 사위라고 하는 다혈질의 매우 정치적인 사내가 기획실장이란 직함이었던 것으로 기억되는데 자주 영화인들과 어울려 술을 마신 전력이 있어 안하무인의 큰 목청으로 떠들며 주인행세를 단단히 하고 있었다. 당시 독재정권의 집권당이었던 공화당의 무슨 청년부장이라는 직함을 늘 앞세워 자랑처럼 떠들던 그 사내답게 그 날은 무슨 청와대 경호실인지 비서실인지 허우대가 특공대원처럼 탄탄하고 우람한 사내를 초대해 놓고 귀빈으로 접대를 하고 있었다. 시간이 지나면서 이 좌석 저 좌석 알만한 얼굴들을 찾아내어 그 경호원에게 소개하고 술잔을 건네고 호기를 부리며 미친년 널뛰듯 주량을 과시하는데 모두 그 꼴을 지켜보면서 말없이 그저 술과 음식을 들며 시간을 죽이고 있는 중이었다. 그 때 사장의 사위라는 친구가 다음 순서라도 되는 것처럼 큰 소리로 하길종 감독을 불렀다.

“어이 하감독! 이번엔 하감독이 이리로 좀 오시지. 내 좋은 분 소개할게요.”
그러나 하감독은  못들은 척 술을 마시고 있었다. 다시 한 번 하감독을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어이! 하감독.”
그러자 하감독이 버럭 소리를 질렀다.
“야 인마, 내가 기생이냐. 오라 마라 부르게. 그 자리에 내가 왜가?”
“뭐라고? 저 새끼 봐라. 너 죽을래?”
그날  축하연은 그렇게 싸움이 벌어지고 개판이 되고 말았다.
 
내가 하길종 감독을 처음 만난 것은 유신정권의 탄압이 한참 극성을 부리던 시절이었다. 1973년 가을 어느 날, 나는 고 하길종 감독으로부터 한통의 전화를 받았다. 최인호의 원작소설 <별들의 고향>의 영화 판권을 이장호가 갖고 있는 게 사실이냐는 문의였다. 사실이라고 대답했더니 만나서 의논하자고 했다. 자신의 사돈이 주식회사 화천공사라는 영화 제작사를 갖고 있는데 좋은 조건을 제공할 테니 이왕이면 그 회사에서 데뷔를 하는 것이 어떠냐고 제의를 해왔다.

나는 하길종 감독에 대해 이미 잘 알고 있던 터였다. 서울대학교에서 작가 김승옥형과 함께 불문학을 전공했고 시인 김지하형 하고도 이렇게 저렇게 잘 어울리다가 배운 게 죄라서 에어 프랑스에 입사하여 프랑스로 갔다가 훌쩍 미국으로 떠나 UCLA에서 영화를 공부했고 프란시스 드 코풀라 감독과 동문수학했다는 그의 이력을 익히 들어 알고 있었다. 나로선 정말 부러웠던 해외유학파 영화감독 중에 한 사람이었다. 그는 귀국 후에 <화분>이란 영화를 만들었는데 그때까지 나는  아직 그 영화를 보지 못했지만 평이 돌기를 매우 실험적이어서 그 시절엔 꿈도 꿀 수 없는 용기 있는 영화라고 했다.
나는 그와 무조건 만나기로 약속했다. 며칠 후, 화천공사에 찾아갔더니 사진에서만 보았던 하길종 감독이 눈앞에 나타나 반갑게 맞아주었다. 한마디로 너무 잘생겨서 비극적인 첫인상이었다. 서글서글한 큰 눈매와 날카로운 콧날의 균형이 섬뜩할 정도로 조화가 잘 된 빼어난 미남이었다.

화천공사는 하길종 감독의 동생 이며 영화배우였던 하명중씨의 손위의 처남이 경영하는 영화사였다. 그날 나는 하길종 감독의 소개로 그의 사돈인 박종찬 사장을 만나 즉석에서 영화 <별들의 고향>을 만들기로 약속을 했다.

그때까지 내가 만난 영화인들 중에 하길종 감독은 가장 선명하고 정직한 사람이라는 생각이 들었고 그를 신뢰하기로 했다. 나의 데뷔는 그렇게 하길종 감독에 의해 이루어 졌다. 하길종 감독은 그 당시 화천공사에서 <수절>이라는 영화를 만들고 있었다. 우리는 좋은 인연이 되어 그 후 서로 영화를 만들며 자주 어울려 술자리를 같이 했다. 후에 <영자의 전성시대>를 만든 김호선 감독과 <몸 전체로 사랑을> 만들었던 홍파 감독 그리고 영화평론을 하던 변인식씨와 함께 영상시대라는 동인회를 만들어 예술영화운동의 이상을 펼치기도 했지만 거의가 하길종 감독의 의지였고 그의 계획대로 이끌어나갔다. 무엇보다도 당시 독재정권에 대해 철저히 저항이 없었던 영화계에선 오직 유일한 한 명의 반독재 민주투사였다. 그래서 영화 <바보들의 행진>은 매우 풍자적이고 묵시적이었던 원작소설과 달리 분노와 저항이 노골적으로 들어나고 직설적으로  표현되어 검열에 무참히 잘리는 아픔을 겪어야하는, 그의 성품이 잘 나타나는 슬픈 영화가 되었다. 아직도 그는 청년이지만 그 보다 네 살 아래였던 내가 이제 노인이 되어 청년 하길종의 죽음을 안타까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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