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형모] 한국 대중영화의 개척자 한형모 감독의 영화와 인생

by.조준형(한국영상자료원 연구부) 2008-08-28조회 1,483

한형모는 누구나 인정하는 1950년대 대표 감독이다. 그러나 정작 <자유부인>을 제외한 그의 영화들은 대중들은 물론, 연구자들에게조차도 거의 관심을 받아오지 못했던 것이 사실이다. 거장 중심, 특정 시기 중심(1960년대), 엄숙주의 등에 치우쳤던 한국영화사 연구의 편향은 그의 영화를 오랜 시간동안 영상자료원의 수장고 속에 가둬두었다. 아주 최근에 들어서야 겨우 그의 영화들은 빛을 보기 시작했지만, 여전히 많은 작품들이 아직도 새로운 발견을 기다리고 있다.  

한형모는 감독 데뷔작이자 최초의 반공영화인 <성벽을 뚫고>(1949)를 포함하여 19편의 영화를 연출했는데, 50년대의 대표적인 감독답게 그 중 11편의 영화가 50년대 만들어졌다. 그 중에는 지금까지 그를 기억하게 해 준 <자유부인>을 비롯하여, 새로운 형식의 반공영화 <운명의 손>(1955), 전후 최초의 로맨틱 코미디 영화 중의 하나인 <청춘쌍곡선>, 최초의 탐정 스릴러 <마인>(1957)이 포함된다.

그에게 유독 최초라는 수식어가 따라붙는 것은 그가 단순히 한국영화사의 초창기에 활동했던 감독이기 때문만은 아닐 것이다. 이는 새로운 시도에 대한 용기, 낯선 컨셉과 시나리오를 일정 수준 이상의 화면으로 담아낼 수 있는 기술적·미학적 능력, 대중의 기호에 대한 날카로운 감각이 뒷받침되어야 가능한 일이었다. 한형모는 이에 적합한 능력을 가진 감독이었으며, 이는 그를 한국 대중영화 혹은 장르영화의 창시자 중의 한 명으로 자리매김하게 했다.

40년대: 촬영감독으로 영화 인생을 시작하다

한형모는 1917년 4월 29일 평안북도 의주에서 공무원이었던 아버지 한기제와 어머니 오금천의 3남1녀 중 셋째 아들로 태어났다. 어렸을 때부터 미술에 재능을 보인 그는 만주 신경미술학교에서 수학하였고, 인근 백화점에서 미술 간판을 그리는 일을 하였다고 한다. 그를 영화계로 이끈 것은 최인규 감독이었다. 한형모는 당시 <수업료>(1940를 연출하던 친형의 친구인 최인규를 찾아 서울로 올라왔고, 최인규는 <집없는 천사>(1941)에서 그를 미술담당으로 영화계에 입문시킨다. 또한 그의 재능을 눈여겨 본 최인규의 주선으로 일본 도호영화사에서 영화를 배울 기회를 가지게 된다.

한형모는 1943년에 일본에서 실시한 촬영, 감독, 연기자 기능 시험의 촬영분야에 응시하여 합격한다. 3년 만에 고국으로 돌아온 그는 최인규와 다시 만나 영화를 만들게 된다. 그의 회고에 따르면, 당시에는 전쟁으로 필름 구하기가 어려웠는데, 일본의 기능시험에 합격한 촬영기사에게는 한 편의 영화를 촬영할 수 있는 필름을 무료로 제공하였다고 한다. 이 덕분에 필름을 가지고 귀국한 한형모는 <집 없는 천사>(1941) 이후 3년 9개월 동안 일제 어용영화를 만들지 않겠다고 버티던 최인규를 설득하여 친일영화 <태양의 아이들>을 연출시키고 자신은 촬영감독으로 데뷔하였다. 그리고 그는 최인규의 다음 친일영화인 <사랑과 맹세>에서 역시 카메라를 잡았다.

해방 이후에도 그는 최인규가 연출한 1946년 작 <자유만세>와 1948년 작 <죄없는 죄인>에 촬영감독으로 참여하는 한편 안진상의 <여명>(1948), 윤용규의 <마음의 고향>(1949)의 촬영을 맡기도 하였다. 특히 <마음의 고향>은 당대의 기술 수준을 월등히 상회하는 화면의 아름다움으로 그의 촬영감독으로서의 입지를 공고히 해주었다.

1949년 드디어 한형모는 본인의 연출 데뷔작 <성벽을 뚫고>를 내놓는다. 여순사건을 배경으로 처남과 매부간의 이념 분쟁을 다룬 이 영화는 오늘날에는 반공영화의 효시로 인정받고 있지만, 당대에는 무엇보다 기술적인 성취라는 측면에서 주목받았다.

이 작품 이후 해군홍보영화를 제작하던 한형모는 촬영지에서 6.25를 맞는다. 그는 촬영중이던 영화의 스탭과 필름, 그리고 카메라를 들고 대전으로 올라가 종군하였다. 그리고 국방부 정훈국 촬영대와 함께 전황을 카메라에 담기 시작했다. 그 결과물이 바로 한국전쟁에 대한 가장 충실한 기록영화로 평가받는 <정의의 진격> 1,2부다. <정의의 진격>은 해외에서도 관심이 높아 일본에 영화 배급권이 팔리기도 했는데, 한형모는 판권료로 프린트 한 벌과 20만불 상당의 영화기재인 16밀리 현상기, 녹음기 1세트 그리고 프린트기 1대와 교환하였다고 한다. 이 일화를 통해 그가 당시 한국영화계의 기술과 장비 부족을 얼마나 안타까워했는지를 가늠할 수 있다.   

50년대: 최고의 흥행감독이 되다

영화는 전후 피폐해진 국민들의 마음을 달랠 수 있는 가장 손쉬운 오락거리였다. 여기에 1954년 국산영화면세조치가 단행되자 한국영화의 제작이 활기를 띠게 된다. 이 시기 한형모는 제작과 연출, 촬영을 겸한 반공영화 한 편을 제작한다. 바로 1954년 말에서 1955년 1월 사이에 개봉한 <운명의 손>이다. 빠를 중심으로 암약하는 북한의 스파이 마가렛과 사랑에 빠진 방첩대 대위를 주인공으로 한 이 영화는 이념과 사랑 사이에서 갈등하는 여성을 주인공으로 하는 한국영화사 특유의 갈등구조를 만들어냈다. 그러나 <운명의 손>은 전후 한국영화 부흥의 신호탄을 쏘아올린 이규환의 <춘향전>과 경작하는 불운을 맞이함으로써 작품으로서나 상업적인 면에서 크게 주목받지 못했다. 이 영화는 한국영화 최초의 키스씬으로 유명해지기도 하였다.

<운명의 손>의 흥행 실패 후 절치부심하던 한형모는 1956년 드디어 10여년의 영화 인생에서 최고의 성가를 올리게 된다. 정비석의 동명 원작을 영화화한 <자유부인>이 당대 한국사회에 엄청난 논란을 일으키며, 흥행적으로도 성공했던 것이다. 교수 부인의 춤바람과 당대의 성풍속도, 경제에 대한 세속적인 감각, 여성의 사회진출에 대한 경계가 드러나는 감독의 시선이 섞인 이 작품은 50년대 한국사회를 첨예하게 반향한다.

<자유부인>의 성공 이후 그는 코미디 영화 <청춘쌍곡선>을 내놓는다. 이 영화는 부유층과 빈곤층의 두 남자가 환경을 바꾸어 경험하면서 서로의 애환을 깨닫게 되고, 상대방의 여동생과 각각 짝을 이루게 되는 짝짓기 영화다. 1957년에는 박계주 원작의 동명소설 『순애보』를 영화화한다. <순애보>는 기본적으로 멜로드라마의 구조를 따르고 있지만, 구원과 희생의 정신을 다루고 있다는 점에서 작가적 의욕이 보다 앞선 작품이다. 그러나 이 영화는 어딘지 모르게 산만하고, 인물들의 행동에 개연성이 부족하여 감독 본인의 의욕에 부합하는 결과를 낳지는 못했다. 1957년에는 또 하나 주목할 만한 작품인 <마인>을 연출하였다. 이 영화는 최초의 탐정스릴러 영화로 알려져 있다.

한형모는 1958년 <나 혼자만이>와 <사랑하는 까닭에>를, 1959년에는 <남성 대 여성>, <가난한 애인들>, <여사장>을 차례로 내놓아 비교적 좋은 평을 받았다. 특히 말레이시아와 합작을 통해 제작한 <사랑하는 까닭에>는 1959년 아시아영화제에서 향토문화상을 수상하기도 하였다. 1958년과 1959년의 다섯 작품은 사랑과 남녀문제라는 한형모 특유의 주제를 담고 있었고, 장르 역시 그가 개척했던 현대적(혹은 도회적) 멜로드라마와 로맨틱코미디 장르에 집중되었다. 필름이 남아있는 두 작품과 나머지 작품들에 대한 평을 참고해보건대, 이 영화들은 작품 자체를 통해 주제의식을 부각시키기보다는 등장인물들을 극단적인 상황 속에 몰아놓고 감독 자신의 주장을 명시적이고 거칠게 부각시키는, 그의 연출상의 고질적인 단점이 오히려 강화되고 있다. 당대의 젊은 감독들(홍성기, 신상옥, 유현목 등)이 그가 개척한 길을 따라잡는 동안 어느 면에서 그는 제자리걸음을 하고 있었다. 심하게 표현하자면 자기복제의 시기에 접어들었다고 할까? 한형모의 도전의식은 어쩐지 무디어져 가고 있었다.  

60년대: 서서히 사라지는 노병 
 
1956년 이후 매년 2-3편을 꾸준히 연출하던 그였지만, 1960년에는 1편, 1961년 2편, 1963년 1편 등으로 1960년을 지나면서 한형모의 영화연출 리스트는 눈에 띄게 짧아진다. 특히 이 시기가 한 해 제작편수가 100편을 상회하던 한국영화의 황금기임을 감안할 때 그 부진은 더욱 부각된다.

앞서 언급한 것처럼 1957년 <순애보> 이후 그는 연속적으로 로맨틱코미디 또는 멜로드라마 장르만을 연출하였는데, 이는 1960년에도 이어진다. 1960년 <질투>는 원안 시나리오만 남아 정확히 파악할 수 없지만 6.25때 남성에게 몸을 더럽힌 후유증으로 동성에 과도한 집착을 보이는 정신이상 여성의 이야기를 다루었다. 셰익스피어의 <말괄량이 길들이기>에 착안한 것이 분명한 <언니는 말괄량이>(1961)는 로맨틱 코미디 장르로 직접적으로 비교하기는 힘들지만, 정신이상에 가까울 정도로 남성을 혐오하는 여주인공을 등장시키고 있다는 점에서 <질투>의 연장선상에 있다.

그 해 나온 <돼지꿈>은 재건촌에 정착한 소시민 일가의 욕망과 파산을 다루었다. 이 영화는 한형모의 필모에서 상당히 독특한 위치를 점하고 있는데, 그에게서 좀처럼 발견하기 힘든 리얼리즘 계열의 영화였기 때문이다. 이는 4.19 이후의 영화 흐름을 추수한 결과로 보여지나, 상류층만을 주로 다루던 한형모 답지 않게 소시민의 리얼한 문제를 비교적 정치하게 담아냈다는 점에서 한형모 후기작 중 가장 성공한 작품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1962년에는 <왕자 호동>이라는 사극을, 1963년에는 <천국과 지옥>이라는 스릴러물을 제작하였다. <왕자 호동>은 익히 잘 알려진 낙랑공주와 호동왕자의 이야기를 각색한 것이다. 한형모의 처음이자 마지막 사극이었지만, 조국과 사랑의 갈림길에서 사랑을 선택하는 낙랑공주의 캐릭터는 여성은 공적영역에 적합지 않다는 한형모의 여성관과 맞닿아 있다.
1963년 <천국과 지옥> 이후 한형모의 창작활동은 휴지기를 맞이한다. 쉰에 가까워지는 나이와 경력은 급변하는 당대 영화산업에 적응하는 것을 어렵게 만들었을 것이다. 당대 한국영화계를 주름잡은 감독과 제작자는 대부분 20년대 중반 이후 태어난 이들로 17년 생인 한형모와는 5년-10년 가까운 터울을 가지고 있었다. 그는 말하자면 끼인 세대였다. 한형모는 1956년 <자유부인>을 통하여 일제강점기에 영화를 시작한 이규환, 윤봉춘, 전창근, 안종화 등이 주도한 시대극과 사극의 풍토를 종식하고 새로운 시대의 영화문화를 이끌었지만, 4.19라는 정치격변과 영화산업의 변화무쌍한 흐름이 이어지는 1960년경에는 이미 매너리즘에 빠진 감독 중의 한 명이 되어 있었다.

1963년 이후 감독협회 일과 필름 개발 등의 기술적인 일에도 관여하는 등 연출 외적인 활동으로 시간을 보내던 그는 1966년, 3년의 침묵을 깨고 돌연 음악극인 <워커힐에서 만납시다>(이하 워커힐)로 돌아온다. 시골에서 딸과 옛 애인을 찾아 서울로 올라온 두 노청의 코믹한 좌충우돌기인 이 영화는 서울의 발전상과 온갖 방식의 공연을 보여주는데 집중한 반면, 영화적 만듦새는 허술한 범작이었다. 이듬해 <워커힐>의 연장선상에서, 이미자의 자전적 이야기를 본격적으로 영화로 만든 <엘리지의 여왕>은 그나마 <워커힐>이 보여주었던 공연 미술의 볼거리조차도 없는 성의 없는 졸작에 그치고 말았다.

한형모가 영화를 만들었던 50년대는 한국사에서도 매우 특수한 시기였다. 일제강점기를 벗어나 새로운 국가를 만들었어야 하는 시기에 전화를 겪었고, 미국식 자유주의가 물밀듯이 들어왔다. 정치, 경제, 사회, 문화 모든 영역에서 체계와 질서가 잡히지 않은 혼돈과 무질서의 시기였다. 그러나 한편으로 보자면 처음으로 근대적 의미의 개인이 출현한 시기, 무정형 속에서 어떤 에너지가 넘쳐나던 시기이기도 했다. 도시에는 사람들이 몰리기 시작했고, 전후 남성을 대체하여 사회로 나온 여성들이 거리를 활보했다. 전란의 참화가 곳곳에 흔적을 남기고 있었지만, 한편에서는 전후 복구의 신호가 나타나기 시작했다.

한형모는 이러한 50년대의 시대상을 자신만의 시각으로 담아냈다. 그의 영화들은 물론 당대의 혼란스럽고 비참한 한국사회의 현실을 예리하게 포착해낸 문제작들은 아니었고, 한형모가 심원한 철학적 비전을 가진 예술가는 더더욱 아니었다. 그는 영화를 오락으로 보았고, 그 한계 내에서 자신의 영화 문법을 발전시키는 동시에 사회에 대한 발언권을 강화해나갔다. 그는 끊임없이 새로운 기법을 연구했고, 보다 나은 기술적 완성을 위해 노력했다. 무엇보다 한형모는 그것이 어떤 관점이든 간에 영화가 사회와 소통해야 함을 잊지 않은 감독 중 하나였다. 그는 언제나 사회에 대해 발언하고자 했고, 그의 영화는 논쟁의 대상이 되었다. 비록 전체적인 맥락에서 ‘꼰대’와 같은 반동적 입장을 가졌다 하더라도, 그 관점을 무턱대고 주장하지 않았으며 세밀한 묘사와 충분한 토론을 거치도록 연출하였다. 그런 면에서 그는 성실한 예술가의 자세를 가진 감독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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