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전검열이 만들어낸 명작 <바보선언> <송환>의 김동원 감독

by.김동원(영화감독) 2008-09-02조회 571

이장호 감독 연출부로 영화계에 입문할 수 있었던 건 큰 행운이었다. 이 감독은 70년대부터 <별들의 고향>으로 한국영화에 새바람을 몰고 왔고 1980년엔 <바람 불어 좋은날>, <그들은 태양을 쏘았다>, <어둠의 자식들>등 사회성이 가미된 영화를 만들고 계셨고 많은 젊은이들이 그 밑에서 배우려고 줄을 서 있을 때였으니까. 그러나 더 큰 행운은 <바보선언>의 제작과정을 지켜볼 수 있었다는 사실일 것이다. (내가 참여한 작품을 사랑하는 건 팔불출 같은 짓이긴 하지만 어차피 난 연출부 막내였고  심부름밖엔 한일이 없으니 뭐 어때..)

이 영화는 원래 <어둠의 자식들> 속편으로 기획되었지만 당시 서슬 퍼렇던 전두환 정권의 사전 검열제도는 제목을 포함하여 ‘전면 개작’ 통고를 보내왔다. 또한 매년 2편 이상을 제작해야 외화수입쿼터를 주던 야릇한 영화법 때문에 1981년 초여름 이장호 감독은 제목도 시나리오도 없는 상태에서 6개월 안에 영화를 끝내야하는 상황에 놓이게 되었다. 이 영화는 이런 당시 폭압적 정치 상황 속에서 그리고 이 감독 표현대로  ‘자포자기한 상태’에서 탄생한 기형아였다.

영화는 머지않은 미래의 어느 꼬마의 ‘1980년 당시 사람들은 프로야구만 좋아하고 영화는 싫어했었다’는 내레이션과 이장호 감독 본인이 어느 건물 옥상에서 (바보 같은 폼으로)투신자살하는 장면으로 시작된다. 근처를 지나던 똥칠(김명곤분)은 감독의 손목에서 시계를 뺏어 자신의 손목에 찬다. 이로써 똥칠은 감독의 페르소나가 되어 영화를 이끌어간다.  절름발이이며 산동네출신 개털인생에 어수룩하기까지 한 똥칠은 여대생을 꼬시고자 이대 앞을 전전한다. 그는 혜영(이보희분)을 택시로 납치해 ‘어떻게’ 해보려다 오히려 그녀에게 ‘진압’ 당한다. 그녀는 청량리 588출신의 가짜 여대생이었고 그럴듯한 남자를 만난 팔자를 고치려는 얄궂은 욕망을 지니고 있었다. 똥칠과 납치과정에서 택시를 잃어버린 택시기사 육덕(이 희성분)은 혜영의 꼬붕이 되어 그녀에게 빌붙어 살게 된다. 혜영은 바닷가에서 ‘그럴듯한 남자’를 만나게 되고 둘을 배신하고 떠났지만 곧 ‘그럴듯한 남자들’에게 철저히 농락당하고 죽음을 맞는다. 

영화의 줄거리는 별볼 게 없다. 영화의 내적 논리도 엉성하기 그지없다. 혜영과의 이별장면에서 절름발이였던 똥칠이 갑자기 멀쩡하게 걷지만 그 후론 다시 절름발이로 등장한다. 아무 맛도 없는 대사들은 억지스런 줄거리를 이어가는데 급급하다. 대본이 없으니 촬영할 땐 반응 샷만 찍었다가 녹음 직전에 대사들을 써서 그 반응 샷들에 덧입힐 지경이었다.

그럼에도 내가 이 영화를 사랑할 수밖에 없는 이유는 이감독이 특유의 순발력과 블랙 코미디적 감각으로 살아있는 영화를 만드는데 성공했기 때문이다. 그는 이야기 속 이야기, 인상적인 콤마촬영기법등을 통해 이야기의 허술함을 충분히 벌충하고 있다. 또한 당시 모순적 사회 상황들을 풍자적으로 묘사하면서 그 안에 저항의 몸짓을 은유적으로 표현해냈다. 특히 혜영의 죽음 후 똥칠과 육덕이 국회의사당 앞에서 춤(이라기보다는 몸짓, 혹은 굿)을 추는 장면은 당시로서는 파격적인 영화적 정치언행이었고 관객들을 숙연하게 만들 만큼의 힘이 느껴진다.

때때로 열악한 제작환경은 명작들을 탄생시킨다. 영화산업이 붕괴된 전후 이탈리아에서 나온 <자전거 도둑>, 검열이 심한 이란이나 중국에서 나온 <내 친구 집은 어디인가>, <소무>같은 영화들은 모두 정치적, 경제적 장애들을 돌파하는 가운데 나온 작품들이다. <바보선언>도 80년대 한국의 독재정권 밑에서 어떻게든 영화를 만들려던 한 영화감독의 몸부림 끝에 탄생한 명작이라 하면 과언일까? 만약 원래 기획대로 이 영화가 <어둠의 자식들> 속편으로 제작되었다면 이렇게 독특한 영화가 나올 수 있었을까?

물론 이 말이 영화엔 검열이 있어야한다거나 자본이 별 상관없다는 말은 아니다. <바보선언>은 어디까지나 예외였고 당시 80년대 초 영화계는 <애마부인>이나 <매춘>같은 3류 에로물들이 판을 쳤으니까.
  
이 장호 감독은 이 영화를 만들며 심적으로 무척 고통스러워 하셨던 것 같다. 녹음을 마칠 무렵이던가, 이장호 감독은 이런 말씀을 하셨다. ‘이제 이런 독약 같은 영화는 다신 만들지 말자. 후배들이 보고 배울까 무섭다’

독약 같은 영화.. 난 아직도 이 말의 뜻을 잘 모르겠다. 허나 <바보선언>이 그런 영화라면 가끔 독약 같은 영화도 있어야 하는 모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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