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이스]센난 석면 피해 배상소송 하라 카즈오, 2017

by.문정현(다큐멘터리 감독) 2017-12-28조회 1,766
센난 석면 피해 배상소송 스틸이미지

하라 카즈오 감독이 말했다. “다큐멘터리는 인간의 ‘희,노,애,락’을 보여주는 것이라는 걸 선배 감독들로부터 배웠다”고. 2017년 부산국제영화제에서 그의 신작 <센난, 석면 피해 배상소송> 상영 후 감독과의 대화시간에 했던 말이다. <극사적 에로스>(1974), <천황의 군대는 진군한다>(1987) 등을 제작한 일본의 대표 다큐멘터리 감독과의 대담은 이렇게 시작했다. 올해 72살인 그는 여전히 에너지 넘치는 영화를 제작했고, 이 대담을 준비하며 다시 보게 된 그의 전 작품들과 최신작 <센난, 석면 피해 배상소송>에 대한 나의 단상을 기술하려한다. 

수년 전, 외국의 여러 감독들과 함께 한 자리에서 하라 카즈오 감독에 대한 이야기가 나왔었다. 그중 한 감독이 그의 영화 <천황의 군대는 진군한다>의 주인공 오쿠자키 겐조를 이야기하면서, “아마도 하라 감독은 여전히 오쿠자키 겐조 같은 사람을 수년째 찾고 있을 것이라고” 했고 자리에 있던 대부분의 사람들이 웃음으로 이 말에 반응했다. 추측컨대 당시 자리에 있었던 사람들은 인물 중심의 영화만을 제작하는 하라 카즈오 감독이 선정적이거나 자극적인 등장인물에 큰 비중을 두거나 혹은 이에 크게 의존한다는 생각들을 하고 있는 듯했다.

오키나와의 미군기지를 배경으로, 주체적 삶을 위해 고군분투하는 <극사적 에로스>(1974)의 주인공 미유키가 그랬다. 전쟁의 피해자로서 천황제 폐지를 요구하며 천황에게 파친코 알을 던지는가 하면, 전쟁의 굶주림 당시 인육을 확보하기 위해 자신의 부하를 처벌한 상관을 찾아가는 <천황의 군대는 진군한다>(1987)의 오쿠자키 겐조는 다큐멘터리영화 역사상 손에 꼽을만한 주인공일 것이다. 요즘은, 같은 인물을 보인다 하더라도 마치 제작자가 그 사람을 다 알고 있다는 전제, 혹은 그러한 태도를 견지한 채 시적인 혹은 에세이 방식으로 이야기를 직조하고 이를 통해 어떤 정서를 전달하려는 영화들이 다수를 이룬다. 특정 등장인물을 통한 이야기의 결과가 이미 정해져 있는 형태의 영화들이 다수이다. 그리고 이 폐쇄적인 혹은 경직됨을 보완하기 위해 등장인물의 배경이 되는 공간과 시간의 묘사가 그 인물과 분리된 채 영화적 장치로 사용되는 경우도 많다. 이런 흐름이라면 하라 카즈오 감독의 인물들은 선정적이고 자극적이며 과한 이야기가 되기 쉽다. 더불어 그가 인물을 그려내는 방식은 촌스럽거나 혹은 단선적이고 일방적인 서사구조로 읽히기 쉽다. 

그래서인지 주로 인물에 대한 이야기를 만들어온 나에게 하라 카즈오 감독의 영화들은 언제나 큰 질문이었다. 그의 영화들은 대상의 이야기를 위해서 대상을 대상화하는 방식이라 생각했다. 그리고 그의 이런 방식을 극복하기 위해 나는 어떤 식으로 영화의 대상들과 관계할 수 있을지를 고민했다. 물론 이야기의 소재나, 문제의식, 메시지를 만들어내는 재현방식에 따라 큰 차이가 있을 수 있지만 ‘나는 과연 내 이야기를 위해 대상들과 대등한 관계를 맺어야 하는 것일까? 그렇지 않다면 그들의 대변자 역할에 집중해야 할 것인가? 기록영화 감독은 결국 인물들의 이야기에 기생할 수밖에 없는 구조에 있는가?’ 등의 고민들은 끝나지 않을 뿐 아니라 도무지 해결의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사실 이 등장인물의 대상화 문제는 나는 물론이고 대부분의 제작자들이 어떤 방식으로든 극복하고 싶은 문제일 것이다. 

“일본이라는 사회는 지루하고 재미없다. 나는 그 지루함을 날려버릴 만한 인물을 찍고 싶다” 재미없는 일본에는 뭔가 충격이 필요하다, 는 이야기를 종종 하는 하라 카즈오 감독은 매우 다른 방식으로 등장인물들을 선택하고 그려낸다. 먼저 그의 영화에 등장하는 대부분의 인물들은 그의 카메라, 카메라 뒤의 그, 그리고 카메라가 가지는 권위를 원하는 사람들이다. 따라서 찍고 찍히는 사이의 대등한 관계, 혹은 찍고 찍힌다는 계약의 관계가 만들어진다. 그리고 동지적 관계가 아닌 계약관계에 있는 이들을 객관적 거리를 유지한 채 탐구할 수 있는 자격이 생긴다. 하라 카즈오 감독은 도무지 꿈쩍도 하지 않을 것 같은 일본 사회, 혹은 이를 지탱하고 있는 시스템이 만들어 내는 폭력적인 상황들과 부조리함을 영화의 모티브로 삼는다. 하지만 보여주고 들려주는 영화는 이 주적을 정면으로 향해있지 않다. 오히려 이 주적과 치열한 갈등 관계에 있는 등장인물들을 대면한 채 제작자와 계약관계에 있는 그들의 내부 모순에 카메라를 들이댄다. 누구나 당연하다 생각할 수 있는 절대적인 것들을 부정하고 불확실한 무엇으로 상정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 내부 모순의 실체를 추적해가는 과정에, 인물들과의 긴장감이 만들어내는 이야기를 따라가다 결국 감독의 질문을 마주하게 된다. 불확정적이고 심지어 모호하기까지 한 하라 카즈오의 주인공들을 통해 그들을 정의하는 공간과 시간의 현재화된 사회적 문제가 큰 질문으로 다가오게 된다. 

영화를 제작하다 보면 여러 질문들과 메시지를 효과적으로 전달하기 위해 메시지를 잘(?) 숨겨야 한다는 강박증이 생긴다. 나에게 창작이란 바로 이 구조를 만들어 내는 과정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를 위해 등장인물이나 사건/상황을 정면 돌파해야 하는 순간이 생기기도 하지만, 대부분은 매우 수줍거나 수동적인 방식으로 존재하는 것 같다. 하지만 영화 <센난, 석면 피해 배상소송>은 전혀 머뭇거리지 않는다. 러닝타임인 3시간 30분 내내 시종일관 과감하게 정면 돌파다. 

영화는 고도의 국가 경제발전이라는 명목 아래 석면의 유해함을 숨기고 무책임함으로 일관했던 일본 정부와, 이에 저항하는 오사카 센난 지역 석면 피해자들에 대한 11년의 투쟁기록이다. 보통이라면 피해자들의 아픔과 현실을 그리고 이 싸움의 절심함을 극대화하면서 동시에 국가권력의 폭력을 논리적으로 추적/고발했을 것이다. 그러나 하라 카즈오의 카메라는 최전선에서 투쟁하고 있는 각각의 인물들에 집요하게 집중한다. 처음으로는 이 싸움을 대하는 각 개인의 생애사가 들려진다. 이어서 이 싸움을 대하는 피해자들의 다양한 의견들이 충돌을 한다. 일본 정부를 대상으로 하는 소송의 필요성을 부정하는가 하면, 석면 피해 당사자가 또 다른 피해자를 만들었던 가해자이기도 하며, 다소 수동적인 모습을 보이는 투쟁지도부의 모습, 과격시위를 반대하며 법과 원칙을 지키자는 변호사들, 형식적인 정부의 사과를 눈물로 받아들이는 인물들까지,,, 생동하며 충돌하는 내부의 이야기가 긴 투쟁의 역사와 함께 드라마틱하게 펼쳐진다. 이는 11년의 투쟁과정을 성실하게 기록하면서도 등장인물들을 자극하고 운동의 방향에 대해 논쟁을 불사하는가 하면 정책결정에 적극적으로 의견을 개진하는 논쟁유발자로서의 감독이 있었기에 가능했을 것이다. 관객들은 이런 영화적 장치를 통해 고통 속에 살아가는 피해자들이 왜 이러한 내, 외부의 갈등 속에 놓일 수밖에 없는지, 도대체 어디서부터가 문제인지 등, 그 근원의 질문을 갖게 되고 실마리를 찾기 위해 노력하게 된다. 많은 피해자들을 만들었던 일본의 석면 기계들이 한국에 들어와 같은 방식으로 많은 피해자들을 만들었고 현재 인도네시아로 넘어가 또 다른 피해자들을 만들어내고 있는 현실을 알게 된다. 그리고 마침내 무책임하고 폭력적인 자본과 국가 시스템의 역겨움에 분노하게 된다. 

인물 중심의 영화가 지엽적이고 뻔할 것이라 느껴진다면 그 이유는 그 영화가 인물 중심의 영화이기 때문이 아니라 그 인물의 깊이에 다가갈 용기, 다시 말해 세상을 논쟁하고 대면할 용기가 없기 때문일 것이다. 스스로를 부정하고 주류질서를 부정하며 절대 진리라 여겨지는 세상의 많은 현상과 사유방식을 부정했을 때 만들어지는 존재의 모호함, 이는 새로운 질문들의 시작이 된다. 인간의 본성이라는 것과 그 다양함, 그리고 그 심연의 ‘희,노.애.락’으로부터 우리의 삶을 그려낸 하라 카즈오 감독의 영화가 이를 증명해줬다.

부산국제영화제 대담을 준비하면서 큰 기대를 가지고 20여 가지 이상의 질문들을 만들었다. 하지만 한 가지도 제대로 물어보지 못한 채 1시간가량 감독님의 이야기를 들어야만 했다. 청년의 에너지를 넘어서는 기운이자 자신감이었다. 자신의 영화제작 스타일을 신뢰하고 강하게 애정하는 하라 카즈오 감독과의 만남은, 현실 제작환경의 어려움과 삶의 비루함 앞에서 언제나 모종의 타협을 생각하는 나를 되돌아보게 한다. 그래서인지 12년째 기록하고 있다는 감독님의 ‘미나마타’병 피해자들에 대한 다음 이야기가 더더욱 기다려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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