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관영화제] 전설의 부활, 홍길동을 만나다 41년 만에 돌아온 한국 최초의 장편 애니메이션 <홍길동>

by.모은영(한국영상자료원 시네마테크부) 2008-05-04조회 1,043

시대와 신분의 벽에 막혀 아버지를 아버지라 부르지 못했던 소년, 하지만 용감하게 시대에 맞섰던 그가 바로 그 유명한 홍길동이다. 소설과 영화, 드라마까지 시대와 장르를 초월해 단골 주인공으로 활약해온 그지만 한국 애니메이션에서의 그는 아주 특별한 지위를 갖고 있다. 최초의 한국 장편 애니메이션 <홍길동>의 주인공이었지만 필름 자체의 행방이 묘연해 오랫동안 소문으로만 전해졌던 이름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간절히 원하면 통한다 했던가. 남겨진 약간의 자료와 증언, 무성한 소문과 추측 속에 신화가 되어갔던 <홍길동>이 마침내 41년, 그 오랜 시간의 간극을 넘어 현실로 귀환했다.

잃어버린 전설을 찾아서

조금은 갑작스럽게 찾아온 <홍길동>과의 만남은 한 애니메이션 연구가의 사심 없는 제보로부터 시작되었다. 실제로 오사카의 한 사설 아카이브에 16mm 필름이 보관되어 있는 것을 확인한 자료원은 조사과정에서 도쿄의 또 다른 아카이브도 <홍길동>을 소장하고 있음을 알게 됐다. 우리는 도쿄와 오사카를 방문해 필름상태를 확인했고 이중 상태가 더 나은 오사카의 <홍길동>을 수집하게 됐다. 당시 배급사였던 20세기폭스에 35mm 원본필름의 소재도 탐문해보았으나 갖고 있지 않다는 답변이 돌아왔다.

문제는 이렇게 수집된 16mm <홍길동> 필름은 일어더빙 버전이었다는 것. 다행히 자료원에 한국어로 된 35mm 사운드 네가필름이 남아 있었고 이후 복원작업은 일사천리로 진행돼 일본에서 수집된 16mm를 35mm로 확대현상하고, 자료원에서 보유하고 있던 사운드 네가와 맞추는 작업을 거쳐 2008년 4월 마침내 원본에 가장 가까운 <홍길동>의 복원이 이루어지게 되었다. 1967년 이후 41년, <홍길동>은 이러한 극적인 과정을 거쳐 구름 위에서 내려와 다시한번 사람들 앞에 그 모습을 드러내게 되었다.

1967년, 한국 애니메이션의 빅뱅

신동헌 감독의 <홍길동>이 개봉한 1967년은 한국애니메이션에서 특별한 해였다. <홍길동> 개봉은 물론 그 외전격인 <호피와 차돌바위>와 최초의 인형애니메이션 <흥부와 놀부> 그리고 세기상사의 <손오공> 등 무려 4편의 장편이 한 해 동안 일시에 쏟아져 나왔기 때문이다. 1963년부터 기획을 시작한 세기상사의 <우주괴인 왕마귀>와 극동흥업의 <대괴수 용가리> 같은 괴수영화들이 발표된 해 역시 1967년이었다. 물론 이전에도 <개미와 베짱이> 같은 단편이나 ‘진로 소주’로 대표되는 CF 애니메이션 등이 있었지만 본격적인 창작활동이 거의 전무했던 상황에서 1967년 한 해 동안 여러 편의 애니메이션이, 그것도 장편을 중심으로 일시에 쏟아져 나왔다는 것은 여간 흥미로운 일이 아닐 수 없다.

하지만 이러한 작품들이 어느 한 순간 갑자기 탄생했던 것은 아니다. 50년대 시작된 다양한 CF 애니메이션을 통해 애니메이션을 익힌 신동헌, 신능파, 최영수 같은 인력들이 인적, 기술적 토대를 마련해 주었다면 해방 후 증가한 아동잡지와 대중만화의 등장은 ‘만화영화’라는 새로운 장르를 즐길 ‘어린이’라는 새로운 관객을 등장시키는 계기가 되었던 것이다. 여기에 1963년 국도 극장에서 개봉한 디즈니의 <피터팬>(1953년)이 보여준 사실적인 움직임과 표현, 음악은 우리 애니메이션계에 자극을 주었다. 

홍길동, 그림을 움직이다.

만화가로 출발했던 신동헌 감독은 1960년대 초반, 당시 온 국민이 따라 불렀다는 ‘진로소주’ CF로 명성을 누리던 CF계의 스타였다. 선원들이 술병을 들고 신나는 선율에 맞춰 경쾌하게 움직이는 이 CF는 음악과 영상의 절묘한 조화가 돋보였다. 1950년대부터 외국 애니메이션을 수입해 흥행시켜왔던 세기상사는 자체 제작을 위해 신동헌 감독을 영입했다. 그는 동생인 신동우 화백이 소년 조선일보에 연재하던 만화 ‘풍운아 홍길동’을 원안으로 새로운 이야기를 만들고 사람들을 모아 동화파트를 구성, 직접 가르치면서 제작에 들어갔다. 재미있게도 이때 사용한 카메라가 한국영화계의 전설, 나운규가 사용했던 카메라였다 한다. 애니메이션 전용 카메라를 구할 수 없어서 이창근 감독에게 이 카메라를 기증받아 선반에 거꾸로 매달아 놓고 일일이 한 프레임씩 손으로 돌려가며 촬영했다고 한다.

이렇게 장비나, 셀, 물감 같은 기본적인 자재 부족 같은 어려움 속에서 수십 명의 스탭들이 밤을 낮 삼아, 낮을 밤 삼아 제작에 매달려 완성한 영화는 1967년 1월 대한극장에 개봉했고 개봉 4일 만에 10만 관객을 동원했다. <홍길동>은 광고 시절부터 신동헌 감독이 추구해온 1초에 24프레임, 풀 프레임 애니메이션이자 음악을 먼저 녹음하고 그림을 그리는 ‘선녹음 후작화’ 방식을 활용한 작품이었다. 홍길동에 쫓겨 도망가던 포졸이 빨래줄에 코가 걸려 퉁퉁 튕겨지는 모습을 가야금 산조를 활용한 음악을 배경으로 코믹하게 보여주는 장면이나, 해골들이 아리랑에 맞춰 한 바탕 신나게 춤을 추는 장면 등은 41년이 지난 지금 봐도 신선하다. 여기에 천체 망원경의 원리를 활용해 이중노출과 합성을 활용해 만든 그림자 효과 등 <홍길동>은 당시로선 획기적인 기술적 완성도를 보여주고 있다.

한국 애니메이션을 위하여

오랫동안 기다려왔던 <홍길동>의 귀환은 예상하지 못한 곳에서 조금은 갑작스럽게 찾아왔다. 하지만 생각해보면 이는 지난 몇 년간 꾸준히 그 행방을 추적해왔던 애니메이션계의 움직임과 한국영화사에 있어 잃어버린 과거의 복원을 추구해왔던 자료원의 노력이 작은 결실을 맺은 것이라 볼 수 있을 것이다. 지금 봐도 짜임새 있는 구성과 뛰어난 완성도에 감탄이 절로 나오지만 다시금 상기할 점은 한국 애니메이션의 역사는 ‘창작’으로부터 시작되었다는 점이다. 오랫동안 ‘만년하청국’의 오명에 시달려왔던 한국 애니메이션계에서 이 오래된 애니메이션의 부활이 갖는 의미는 비어있던 한국애니메이션의 역사를 다시 쓰고, 현재화하는데 있을 것이다. 화려한 컴퓨터그래픽과 자극적인 이야기에 익숙한 요즘 관객들에게 41년 전의 이 작품은 어떻게 다가올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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