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영화걸작선]건축학개론 이용주, 2011

by.강유정(영화평론가) 2013-01-10조회 5,915
건축학개론

어떤 영화들은 코드가 된다. 1960년대 <맨발의 청춘>이 그랬다면 1980년대 <고래사냥>도 그랬다. 20대 주인공들이 등장하는 이 영화에서 젊음은 그 시대의 상징을 경유하는 일종의 코드어가 된다. 어떤 20대가 어떤 사랑을 나누며 어떤 고민을 하는 지가 당대의 사사로운 삶의 표정부터 시대적 문제까지 보여주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건축학개론>은 1990년대를 통해 2000년대를 해석하는 독특한 코드라고 할 수 있다. 과거와 현재를 서사적으로 교직함으로써 향수와 복고, 아날로그적 정서, 추억과 현실과 같은 여러 용어들을 한 데 모아놓았기 때문이다. 

<건축학개론>은 주인공이 20대를 누렸던 1990년대 대학 캠퍼스와 12년이 지나 35살이 된 인물들의 현재를 교차적으로 제시한다. 대학생이라는 집단적 정체성으로 묶여 있던 승민과 서연은 서른 다섯 살이 되어 건축 디자이너와 이혼녀로 나뉘게 된다. 출발점은 같았지만 12년이 지나고 난 후 두 사람의 삶은 어쩐지 너무나 멀리 떨어져 있다. 그러나 한 마음으로 손을 맞잡고 철로를 걸었던 그 시간은 다시 허락되지 않는다. 시간은 흘러갈 뿐 되돌이킬 수 없다. 추억은 가역성이지만 시간은 불가역성이니 말이다. 

회귀 불가능성이라는 낭만적 노스탤지어는 1990년대를 쓰다듬는 세세한 미장센들에 의해 1990년대를 지나 온 세대들의 감수성을 관통한다. 그것은 다름 아닌 풍요로운 소비 문화 속에 급속히 감염되었던 상대적 격차의 징표들이기도 하다. 게스티셔츠, 삐삐, 압구정과 같은 기호들은 80년대 학번 선배들이 읽었던 마르크스나 엥겔스의 공백을 빠르게 메꿨다. 세련됨과 낭비, 취향과 소비 사이에서 자기 정체성의 지점을 찾아야했던 세대, 90년대 학번들에게 있어 20대는 자기 스스로를 어떻게 연출하느냐에 대한 고민의 시작이기도 했다. 90년대에 20대를 보냈던 세대들, 그들의 기억 핵심에 바로 이 영화 <건축학개론>이 있다.

<건축학개론>은 첫사랑이라는 보편적 소재에 대한 화법의 전환이라고 할 수 있다. 투르게네프가 첫사랑을 환멸과 동의어에 두고 토마스 만이 첫사랑을 타협의 요구로 보았다면 <건축학개론>의 첫사랑은 순진의 오류로 기록된다. 순진의 오류란 이런 것이다. 사랑한다 한 마디면 될 것을 에둘러 상처를 주고, 좋아한다 말하면 그만인 것을 상대방의 언저리에서 머뭇거리다 결국 상처만 입고 돌아선 사랑 말이다. 

순진의 오류는 30대 중반이 된 두 인물의 대조적 태도를 통해 아쉬움으로 변주된다. 뒤늦게 확인한 오해는 돌이키기엔 너무 먼 과거의 일이다. <건축학개론>이 말하는 과거는 현재에 대한 영향력의 부재라고 말할 수 있다. 서연과의 첫사랑, 그녀가 선물로 주었던 씨디 플레이어가 소중하기는 하지만 그렇다고 그 흔적들이 현재의 삶을 바꾸진 못한다. 지금껏 많은 첫사랑 영화들이 그 징표가 화석화된 감정을 되살리는 열쇠였던 것과 달리 <건축학개론>에서 추억은 추억이라는 이름 안에 봉인된다. 

첫사랑을 다루는 <건축학개론>의 태도는 사실 무척 새로운 것이라 할 수 있다. 이는 영화 속 미쟝센을 통해서도 변주되는데, <건축학개론>의 미쟝센의 역할은 단순한 배경이나 이미지를 너머서 일종의 은유적 의미를 함축하고 있다. 가령, 서연과 승민이 애틋한 첫 사랑을 키워가던 공간은 바로 빈 집이다. 이는 그들의 사랑이 아름답지만 사람의 온기로 채울 수 없었던 추억임을 보여준다. 서연의 제주도 집이 개축되지 못하고 증축되는 것도 그렇다. 35살 쯤 되면 지금껏 살아온 집, 그러니까 인생을 통째로 뒤바꾸기란 쉽지 않다. 서른 다섯 살에겐 이제 더 이상 개축이 허락되지 않는다. 개축 불가, 증축 가능이라는 메시지는 서연의 집을 통해 아프지만 아름답게 전달된다. 

영화는 30대 중반이 된 두 남녀와 스무 살 무렵의 두 남녀를 각기 다른 배우를 통해 보여준다. 어떤 점에서 이십 대와 삼십 대는 다른 배우가 필요할 만큼 커다란 시간의 격차일 지도 모른다. 외모야 크게 달라지지 않겠지만 적어도 이성을 대하는 태도가 달라질 것이니 말이다. <건축학개론>의 더블 캐스팅은 세월의 힘에 대한 적절한 비유가 되어 준다.
누구에게나 이십 대는 있지만 아무도 이십 대에 머물 수는 없다. 젊음을 자각하지도 못한 채, 향유하지도 못한 채 손바닥에서 흘러내리는 모래처럼 놓쳤다는 것, 대개의 첫사랑 서사가 기대고 있는 아쉬움이다. 우리가 첫사랑이라는 말과 함께 떠올리는 것은 바로 덧없이 흘려보낸 젊음에 대한 그리움이기도 하다. 

첫사랑은 그렇게 기억 속에서 더욱 굳건해진다. 집을 지어주고 현재의 아내의 곁으로 가는 남자의 마음은 어쩐지 첫사랑이라는 부채를 빈집처럼 안고 사는 남성 심리 드라마의 한 장면 같기도 하다. 첫사랑에 대한 시점의 전환, 바로 <건축학개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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