뒤바리 부인(듀바리 부인)

영화 해제

현재통용제명: 뒤바리 부인
수입개봉명: 듀바리부인
원제: Madame Du Barry
제작년도: 1954
제작사: 프랑시넥스(Francinex), 리졸리 필름(Rizzoli Film)  / 프랑스-이탈리아 합작
감독: 크리스티안-자크(Christian-Jaque)
출연진: 마르틴 카롤(Martine Carol), 안드레 뤼구에(Andre Luguet), 다니엘 이베르넬(Daniel Ivernel), 쟌나 마리아 카날레(Gianna Maria Canale)
수입사: 한불영화사
개봉극장: 단성사
개봉일: 1956.04.12.


전단지 구성 및 특이사항 
전체 4면으로 되어 있으나 실제 인쇄는 3면에 걸쳐 있고 마지막 4면은 공백으로 처리되어 있다. 1면 우측 상단에는 “인간의 희로애락의 파노라마를 일 여성의 기구한 운명에 얹어 묘사한 거작!”이라는 홍보 문구와 함께, 타이틀 롤을 맡은 마르틴 카롤의 전면 사진이 흑백 채색사진으로 인쇄되어 있다. 그 아래로는 영화의 제목과 주연, 감독에 대한 크레딧이 기재되어 있고, 제일 하단부에는 “제작: 불(란서) – 이(태리) 합동, 한불영화사 제공, 배급”이라는 문구가 쓰여있다. 2면과 3면에는 영화에 대한 해설과 줄거리 요약이 쓰여있고, 프랑스어와 한국어로 된 크레딧이 같이 기재되어 있다. 영화 해설은 주로 루이 15세의 애첩이었던 실존 인물 뒤바리 백작부인과 프랑스 혁명으로 이어지는 프랑스 근세사에 대한 간략한 소개와 더불어, 영화의 제작진과 출연진에 대한 간략한 소개로 이어진다. 특히 해설의 끝 부분에는 “일본에 앞서 한국이 극동지역에서 제일 먼저 개봉하게 된 명작”임을 강조하여 이것이 한불영화사를 통해 프랑스에서 직배된 영화임을 선전하고 있다.

줄거리 
프랑스 왕 루이 15세의 애첩이었던 뒤바리 백작부인 쟌 베쿠(Jean Becu)의 일대기를 그린 영화. 영화는 프랑스 대혁명이 일어난 직후 감옥에 갇혀 단두대에서의 죽음을 기다리고 있는 뒤바리 백작부인이 과거를 회상하는 장면에서 시작한다. 가난한 재봉사의 딸인 쟌은 10대 시절 그녀의 아름다움에 반한 퇴폐한 귀족 쟝 뒤바리 백작의 관심을 끌게 된다. 백작은 그녀를 자신의 정부로 만든 후, 그녀를 파리의 상류 사회에서 가장 주목받는 여인으로 만들기 위한 계획에 착수한다.

얼마 지나지 않아 백작은 그녀를 늙어가는 루이 15세의 공식 정부(情婦) 가운데 하나로 만들어 이를 통해 귀족 사회의 제일 높은 자리에까지 올라갈 계획을 세운다. 그러나 왕의 정부가 되기 위해서는 오로지 결혼한 귀족 여성이어야만 가능했다. 이에 백작은 자신의 동생인 기욤을 쟌과 결혼시키고, 그리하여 쟌은 뒤바리 백작부인이 되어 위풍당당하게 베르사유에 입성, 금세 그 빼어난 미모로 왕의 총애를 받게 된다. 그러나 그녀의 총애는 얼마 지나지 않아 다른 애첩들의 질투심을 자극하게 되었고, 결국 그녀의 승승장구는 루이 15세가 승하하는 순간으로 끝이 나게 된다. 새 국왕 루이 16세의 왕비인 마리 앙트와네트는 뒤바리 부인을 극도로 경멸하고, 결국 뒤바리 부인은 베르사유에서 곧바로 추방된다. 이후 뒤바리 백작도 죽은 뒤, 홀로 무료하고 무의미한 삶을 영위하던 뒤바리 부인은 결국 20여년 뒤 다시 혁명을 일으킨 공화주의자들에 의해 구시대의 적폐로 낙인찍혀 단두대에서 처형되기에 이른 것이다. (출처: IMDb)


NOTE 
뒤바리 백작부인 쟌 베쿠의 일생을 다룬 영화는 무성영화 시대부터 프랑스뿐만 아니라 미국에서도 여러 차례 제작되었던 탓에, 이 영화는 프랑스를 제외한 지역에서는 거의 호응을 받지 못했던 것으로 보인다. 기록에 따르면 1954년과 55년 사이 오스트리아, 서독, 스웨덴, 덴마크, 핀란드에서 짧게 상영되었으며, 일본과 미국에서는 아예 개봉조차 하지 않았던 것으로 확인된다. 한국에서도 1956년 4월 12일부터 16일까지 단 5일 간 단성사에서 상영된 이후, 동도극장과 동화극장, 문영극장 등에서 역시 1주일 안팎으로 짤막하게 재상영되는데 그쳤으며 신문 광고 역시 단 1차례에 불과했던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일본이나 다른 국가를 거치지 않고 프랑스에서 직접 직배의 형태로 들어온 영화로, 이런 경우가 당시로서 무척 드물다는 점은 주목할 만하다.
석지훈(영화사연구자)

초기화면 설정

초기화면 설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