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유한 미모의 전형 조미령(하)

by.김종원(영화사연구자) 2020-02-06
조미령 프로필 사진


불량소녀 역할로 변신 시도

이후 조미령은 <자유결혼>(이병일, 1958), <여사장>(한형모, 1959), <십대의 반항>(김기영, 1959), <장마루촌의 이발사>(최훈, 1959), <이름 없는 별들>(김강윤, 1959), <이별의 종착역>(박영환, 1960), <박서방>(강대진, 1960), <지상의 비극>(박종호, 1960), <마부>(강대진, 1961), <에밀레종>(홍성기, 1961), <골목안 풍경>(박종호, 1962), <견습부부>(이봉래, 1962), <원효대사>(장일호, 1962), <인목대비>(안현철, 1962), <아빠 안녕>(최훈, 1963), <로맨스가족>(최영철, 1963), <혈맥>(김수용, 1963), <신식할머니>(백호빈, 1964), <홀어머니>(홍은원, 1964) <비무장지대>(박상호, 1965), <주홍 스카트>(이봉래, 1965), <사랑보다 강한 것>(이규웅, 1966), <나운규의 일생>(최무룡, 1966), <역마>(김강윤, 1967), <안방마님>(고영남, 1967), <로맨스 마마>(최인현, 1968), <몽땅 드릴까요>(유현목,1968), <춘원 이광수>(최인현, 1969), <두 아들 2>(조문진, 1981) 등에 출연했다.  
 
[사진] <신식 할머니>(백호빈, 1964)에서 조미령

<아들의 심판>(1960, 안현철)에서는 기생(황정순)의 딸로, <원효대사>(62, 장일호)에서는 원효(최무룡)를 따르는 아사다로, <에밀레종>에서는 명종의 완성을 기원하며 백일기도를 드리는 참마루(김진규)의 아내로 출연했다. 

그러나 그녀는 <십대의 반항>(1959)을 전후하여 배역의 변화를 꾀한다. 숏커트의 헤어스타일로 건달과 사귀는 뒷골목의 불량소녀(필녀)에서 영문 주간지 『타임』을 읽고 가족들에게 성문제를 스스럼없이 말하는 <신식 할머니>(1963)의 노인으로, ‘여존남비’를 앞세워 전통적인 삶을 거부하는 여성잡지의 독신 <여사장>(1959) 요안나로 나타난다.


 

[사진] <여사장>(한형모, 1959)에 출연한 조미령, 왼쪽은 상대역인 배우 이수련

이울러 그녀는 이지적이기보다는 백치미를 추구한 작품에서 존재감을 드러내기도 했다. 졸지에 맹진사댁 규수를 대신하여 꽃가마를 타게 된 <시집가는 날>의 대리 신부는 물론, 남편에게 얻어맞고 친정으로 쫓겨 온 <마부>의 벙어리 맏딸(옥례), 재취를 미끼로 구두쇠 영감(김승호)의 전대를 훔치고 도망간 <혈맥>(김수용, 1963)의 벙어리 여인 등이 그 대표적인 예이다. 

 
[사진] <혈맥>(김수용, 1963)에서 조미령, 오른쪽은 배우 김승호

여기서 주목되는 것은 조미령은 현대적인 양장보다는 가냘픈 선의 맵시가 드러나는 전통적인 한복 차림이 더욱 돋보인다는 점이다.


학업마저 포기한 여덟 살 소녀의 도전

조제순(趙濟順)이 본명인 조미령은 1929년 2월 4일 경남 마산 출신이다. 일설에는 서울 효자동 태생인 것으로 알려졌다. 여덟 살 때 연극 팬인 언니의 권유로 동양극장의 전속 극단 ‘청춘좌’에 들어가 <임자 없는 자식들>(1937)로 첫 발을 디뎠다. 김승호의 연극 데뷔작이기도 하다. 『한국연예대감』(1962, 성영문화사) 등 일부 인쇄물에는 중학교를 중퇴한 것으로 되어 있으나 학교 문턱을 밟아본 적이 없다.(「비약을 꿈꾸는 여우 조미령, 그는 왜 은퇴를 결심하게 되었나」, 『한국일보』, 1958.11.02) 여덟 살 때 이미 극단(청춘좌)에 들어가 동양극장 후반기의 최대 히트작 <어머니의 힘>(1943, 이서구 원작)에 출연하는 등 해방이 될 때까지 11년 동안 무대생활을 한 사실이 이를 말해 준다. 조미령은 그 뒤 <해연(갈매기)>(1948)으로 영화계에 첫 발을 디뎠으나 6.25전쟁과 결혼으로 화면에 얼굴을 비치는 기회를 얻지 못했다. 그 대신 변기종이 주도한 상록극회(1951)와 자유극회(1953) 등 연극 단체에서 활약했다. 

서울 신당동에 신접살림을 마련하고 두 남매를 키우는 일에만 매달리던 조미령이 <춘향전>으로 다시 카메라 앞에 선 것은 <해연> 이후 5년 만이었다. 남편이 전주(錢主)를 끌어들여 만든 이 영화는 적지 않은 일화를 남겼다. 그 가운데 하나가 조미령의 실신소동이다. 여배우 숙소에 밥을 지어 나르던 중년의 아낙네에 의해 처음 알려진 이 소동은 의처증이 있는 이철혁이  아내가 남주인공인 이민과 심상치 않는 관계로 의심한 데서 비롯되었다. 화가 난 그가 집어 던진 목침이 조미령의 뒷머리에 맞아 하마터면 죽을 뻔했던 것이다. 다행히 숙소에 있던 석금성(월매 역) 등 배우의 간호로 한참 뒤에야 깨어날 수 있었다.
(이규환 「[남기고 싶은 이야기들, 영화 60년(49)] 난산」, 『중앙일보』, 1980.02.20.)
 
[사진] <춘향전>(이규환, 1955)의 한 장면, 왼쪽은 이도령을 맡은 상대 배우 이민


그런 남편이 그로부터 3년이 채 안된 1958년 3월 16일 밤 갑자기 심장마비로 숨졌다. 당시 46세였다. (「문화소식, 이철혁씨 급서」, 『서울신문』, 1958.03.19) 장례는 20일 아침 열시부터 ‘영화인동지장’(장의위원장 안종화)으로 고인의 자택인 신당동 앞마당에서 거행되었다. (「내외문화단신, 영화인 동지장으로」, 『한국일보』, 1958.03.20) 남편을 잃은 충격으로 영화출연을 삼가던 조미령이 다시 활동을 재개한 것은 김화랑 감독의 코미디 <사람팔자 알 수 없다>(1958)를 전후한 시기였다. 잇따라 중매결혼을 반대하고 자유결혼을 구가하는 <자유결혼>(1958, 이병일)의 셋째 딸 역을 맡아 종전과 다른 활달한 모습을 보이기 시작했다. 
 
[사진] <자유결혼>(이병일, 1958)의 한 장면, 오른쪽은 배우 박암

사생활이나 대인관계에서 맺고 끊는 것이 분명하다는 말을 들어온 조미령은 남편이 죽은 지 4년이 채 안 돼 하와이 이민 2세 최동원과 결혼(1962년)하고 69년 미국으로 떠났다. 그녀 역시 김소영, 김신재 등 선배배우와 마찬가지로 말년을 타국에서 보내야 했다. 처음에는 샌프란시스코에서 살다가 브로드웨이의 연극을 볼 수 있는 뉴욕으로 옮겨 10여년을 지내고 1988년 아들딸이 사는 하와이로 건너가 토산품점을 경영했다. 하와이 민속박물관으로 가는 길목에 있는 대지 2천 4백여 평, 건평 1백 12평 규모의 큰 가게였다. 그 사이 ‘영화의 날’(1991년 10월) 행사와 1958년 첫 개봉이후 11년 만에 다시 리바이벌하는 하한수 감독의 <눈 나리는 밤>(1969), 조문진 감독의 <두 아들 2>(1981)에 출연하기 위해 잠시 귀국하기도 했다. 

조미령은 무성영화시대에 처음 나온 일본인 하야카와 고슈 감독의 <춘향전>(1923)과 발성영화시대를 연 문예봉 주연의 <춘향전>(1935)에 이어 한국 독립 후 최초로 만든 <춘향전>(1955)의 히로인으로 주목을 받았으나 필름이 보존되지 않아 후대의 최은희(성춘향, 1961)만큼 제대로 평가받지 못했다. 하지만 조미령은 분명 해방 후 60년대 초까지 선배인 최은희, 후배 김지미와 더불어 삼각구도를 이루며 한국영화의 중흥에 이바지한 소중한 존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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