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과 한국인을 사랑한 다큐멘터리스트 배석인

by.김승경(영화사연구자) 2020-01-30
영화 <팔도강산> 개봉 당시 관람을 위해 극장 앞에 모여든 사람들의 모습

1980년대 한국영화 제작 자유화 이전 다큐멘터리와 교육영화, 뉴스영화 등 논픽션 영화를 통칭하는 용어였던 ‘문화영화’는 그 자체로 약간의 거부감을 불러일으키는 단어였다. 그 이유의 첫 번째는 ‘문화인이 되도록 교육받는다는 느낌’ 때문에 영화감상보다는 교양교육의 일환으로 여겨졌던 까닭이고, 두 번째는 정부 주도로 제작된 영화들이 대부분인 탓에 감독과 제작자의 순수한 의도보다는 그 이면에 있는 ‘정치적 목적’이 더 들여다보이기 때문이다. 세 번째는 극영화 상영 전 ‘무조건’ 상영되는 형태 때문에 ‘강제적’으로 영화를 봐야했고, 이러한 관람형태는 영화관람 전 이미 부정적인 감정을 불러 일으키는 경우가 많았다. 때문에 문화영화에 대한 평가 역시 미학적 완성도보다는 정치적 목적성에 맞춰진 경우들이 많았다. 
하지만 수십 년에 걸쳐 수천 편 만들어진 문화영화에서 교육적, 정치적 의도만이 담겨있지는 않을 것이다. 현재 남아 있는 문화영화들 중에 전쟁의 폐허 속에서도 따뜻한 한국인의 심성을 그려내며 상처를 어루만지고 함께 발맞추어 살아가길 기대하는 영화들이 있다. 그리고 그 영화들을 만든 감독 중에 배석인 감독이 있다.


소년, 영어를 통해 세상에 눈을 뜨다

배석인 감독은 일제강점기가 한창인 1929년 경상남도 창원에서 태어났다. 부모님은 귀한 3대 독자인 아들의 교육을 위해 조금 더 큰 도시였던 김해로 이사를 갔다. 독실한 기독교 집안이었던 탓에 배석인 감독은 어린 시절부터 빠지지 않고 새벽기도에 참석하였다. 이를 눈여겨 본 젊은 목사님은 그에게 영어로 된 성경 한 권을 선물하고, 자신과 함께 영어로 성경공부를 할 것을 제안한다. 현재 80세가 넘는 고령임에도 불구하고, 복음서를 영어로 줄줄 외우고 있을  정도로 그 시절 영어공부는 그에게 강력한 영향력을 미쳤다. 조금씩 다른 의미로 해석될 수 있는 영어 단어와 문장은 단순히 번역을 넘어 언어를 해석하고, 사람들과 소통하는 방식에 대해 생각하게 하였다. 또한 성경을 통해 접하는 이야기는 인간이 추구해야 할 것이 무엇인가에 대해 지속적인 성찰을 하는 밑바탕이 되었다. 
중학교에 입학한 후 일본인 선생님의 어이없는 발음과 영어 실력에 실망한 그는 《리더스 다이제스트》를 구입해 혼자 영어를 공부하였다. 그리고 중학교 졸업과 함께 해방을 맞이하고, 1946년 부산 동아대학교에 입학한다. 이때는 미군정 시기로 많은 미군들이 부산에 상주해 있었고, 영어의 중요성을 더욱 실감한 그는 대학 재학 중 야간학교와 중학교에서 영어교사로 근무하기도 하였다.


주한미군 정보기관 요원에서 영화 <자유전선>의 주인공이 되다

배석인 감독이 대학을 졸업한 1951년 한국은 동족상잔의 전쟁 중이었다. 전투의 현장을 직접 대면하지는 않았지만 피난민과 가난 등 전쟁의 상처는 그가 살고 있는 부산 지역도 예외가 아니었다. 그는 주한미군정보기관에 지원하여 정보사령관의 한국담당 정보관으로 근무하기 시작하였다. 한국말을 모르는 정보사령관의 통역을 담당하면서 한국의 여러 상황을 알려주고 조언을 하는 것이 그의 역할이었다. 이 일을 하면서 그는 국제교류의 중요성을 깨닫고 외교관이 되기로 결심한다. 이후 미국 시라큐스 대학에 입학 허가를 받고, 출국을 기다리던 중 부산 광복동에서 한 사람을 만나게 되는데, 김홍 감독이었다. 훤칠한 외모에 미군복을 입고 있던 그에게 김홍 감독은 미군을 비롯한 UN군의 참전에 고마움을 표하는 영화 <자유전선>을 제작할 예정인데, 그 영화의 주인공이 되어 달라고 부탁한다. 영화배우라는 것을 한 번도 생각해 보지 않았던 배석인 감독은 거절하였지만, 김홍 감독은 한 달여 동안 그를 설득하고 결국 출연을 수락하게 된다.

 

[사진 1] 영화 <자유전선>의 북에서 내려온 창환(조항)과 논쟁하는 성호(배석인). 오른쪽부터 배석인, 조항, 주증녀
 
영화의 배경이 된 한국전쟁의 참혹함 못지않게 당시 한국의 영화촬영 현장은 맨주먹밥에 소금물로 끼니를 때우고 거적을 깔고 잠을 청해야 할 정도로 열악했다. 하지만 주증녀, 황해, 조항 등 선배들과 함께 1년여 간 이어진 촬영 속에서 영화에 대한 매력과 영화가 감독의 예술이라는 점을 느끼게 된다. 
 

[사진 2] 영화 <자유전선>에서 브라운 대위를 구하는 육군 중대장 성호(배석인)
 
이 영화는 전쟁이 끝난 1955년 서울 시공관에서 개봉하였는데, 러시아와 미국의 격전장이 된 한반도와 그 속에서 피어나는 UN군과 국군의 우정을 그린 영화로 전쟁의 참혹함보다는 우방과의 연대에 초점을 맞춘 것에 주목을 받았다. 이 영화의 주인공이었던 배석인 감독은 이후 여러 영화에서 섭외요청을 받았다.
 

[사진 3] 영화 <자유전선>의 홍보전단지

 
USIS를 거쳐 국립영화제작소에서 다큐멘터리 감독이 되다

유학과 영화 사이에서 고민하고 있던 배석인 감독에게 영어교사로 일할 때부터 친분이 있던 미국공보원(USIS, United States Information Service) 원장은 ‘교사는 자신의 생각을 칠판을 통해 전달하는 것이고, 감독은 영상에 담아 전달하는 것’이라면서 USIS 영화과에서 함께 일할 것을 제의한다. 평소 생각과 마음을 나누는 것에 관심이 많던 그는 부모님을 떠나 미국으로 가는 것보다는 부모님 옆에서 꿈을 이루어야겠다는 생각에 USIS에서의 근무를 택한다. 그곳의 라이브러리에서 수많은 영화들을 보았고, 동시녹음 카메라, 편집기 등을 통해 영화적 기술을 익혔다. 그리고 《마산일보》를 배경으로 지방 독립지가 제작되는 과정을 담은 <지방신문편집자>(1958)라는 문화영화를 처음으로 제작하였다. 
USIS에서 일한 지 3년째가 되던 1958년, 국립영화제작소로 자리를 옮긴다. 국립영화제작소는 1957년 중앙청 내에 건물을 새로 지어 세트장, 현상소, 녹음실 등을 갖추고, 본격적인 문화영화제작을 하고자 여러 인재들을 영입하던 중이었다. 배석인 감독은 미국의 시각보다는 대한민국의 입장에서 영화를 만들면 더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을 하였고, 상대적으로 국가의 지시나 통제에서 자유로운 ‘촉탁’으로 근무를 시작하였다. 촉탁은 과장, 계장 등의 직급이 없는 대신 경력을 인정받아 자신이 제작하고자 하는 작품의 기획안을 올려 통과가 되면 예산과 장비, 인력 등의 지원을 받아 영화를 제작하면 되는 자리였다. 의무적으로 뉴스영화나 홍보영화를 찍을 필요도 없었다. 
그렇게 옮겨간 국립영화제작소의 상황은 듣던 것과는 많이 달랐다. 영화 관련 장비를 갖추었다고 하였지만, USIS에 비하면 장비의 수준이 낮았고, 장비가 있다고 하더라도 제대로 다룰 수 있는 기술진이 없었다. 영화 관련 용어들도 일본어와 영어, 한국어가 혼재되어 있어 서로 소통하기 어려운 부분들이 많았다. 그래서 배석인 감독은 먼저 영화 인력에 대한 교육을 시작하였다. 영어로 된 영화사전을 번역하여 직원들에게 나누어주어 익히도록 하였고, 미국 시라큐스에서 파견된 영화교육단의 통역을 맡아 영화에 대한 지식과 기술들을 전달하였다. 시라큐스의 교육으로만은 부족하다고 느낄 때면 따로 직원들을 모아놓고 영화기술에 대해 교육을 하기도 하였다.

 
 
[사진 4] 국립영화제작소 로고


[사진 5] 중앙청 내에 위한 국립영화제작소 건물.
오른쪽에서 6번째에 서 있는 사람이 배석인 감독 (출처: 국가기록원)

 
그렇게 시간이 흘러 1960년 4.19 의거가 일어나고, 혼란스러웠던 당시 중앙청에서 몸을 피해 어느 화장실로 숨었다가 신문 한 장을 발견하게 되는데, 거기 쓰여 있던 것이 노산 이은상 선생의 기행문 『피어린 600리』 였다. 

끝없이 철썩거리는 동해의 물결! 
백사장(白沙場)가에 박아 놓은 철조망의 마지막 쇠말뚝을 붙드는 순간, 
나는 그만 주저앉아 버리고 말았다. 

그래, 이것이 피어린 휴전선의 마지막 철조망, 마지막 쇠말뚝이냐!
그래, 내가 이 마지막 쇠말뚝 하나 잡아 보려고 600리를 허위허위 달려왔더냐. 

길이 끝났네, 더 못 간다네. 병정은 총 들고 앞길을 막네. 
저리 비키오. 말뚝을 뽑고 이대로 북으로 더 가야겠소. 
바닷가 모래 위에 주저 앉아 파도도 울고 나도 울고. 
                                      - 노산 이은상의 기행문 『피어린 600리』 중에서

 
이은상 선생이 휴전선의 서쪽 끝부터 동쪽 끝까지 600리 길을 걸으며 보았던 분단의 비극, 만나지 못하는 아픔을 영화화하기로 결심했다. 기행문을 참고하여 직접 나레이션을 쓰고 DMZ 지역까지 들어가 촬영한 끝에 17분짜리 문화영화 <피어린 600리>(1962)를 완성할 수 있었다. 이 영화는 1963년 제2회 대종상 문화영화상을 수상하였으며, 제10회 아시아영화제 비극부문과 제13회 베를린영화제에 출품되어 호평을 받기도 하였다. 하지만 배석인 감독에게는 출품과 수상이라는 공적인 지표보다 현재 대한민국 국민들의 아픔을 공감하고 위로할 수 있는 영화를 만들었다는 것이 더 큰 기쁨이었다.
 

[사진 6] 영화 <피어린 600리> 한반도에 그어진 38선의 이미지


[사진 7] 영화 <피어린 600리> 철로가 끊어진 채 더 이상 올라 갈 수 없는 금화지구


[사진 8] 영화 <피어린 600리> 금화지구 내 폐허 속에 방치된 부서진 열차


[사진 9] 영화 <피어린 600리> 600리의 마지막 동쪽 끝 해안에 위치한 철조망
 
이후에도 배석인 감독은 대중들의 감성에 말을 거는 영화를 많이 만드는데, 그 중에서 <새길>(1962)이라는 영화가 있다. 이 영화는 전쟁 고아들의 비행과 일탈이 사회문제가 되고 있던 시대에 그들이 일탈할 수밖에 없었던 구조적적 문제와 어른들의 책임을 묻고, 비록 죄를 지었지만 자신을 반성하고 새로운 삶을 살기 위해 노력하는 이야기를 다룬 세미다큐멘터리였다. 실제 구두닦이 소년을 캐스팅하여 실감나게 연출한 덕분인지, 이 영화가 전국적으로 상영되었을 때, 영화를 본 마을 사람들은 주인공 소년을 실제 범죄자라 착각하여 범죄자가 된 소년을 받아들일 수 없다며 소년을 마을에서 쫓아낸 웃지 못할 일화도 있었다고 한다. 그러나 <새길>은 궁극적으로 당시 문제아 혹은 범죄자로 터부시되던 전쟁고아에 대한 사회적 관심과 포용을 이끌어 내는 역할을 했다는 점과 극영화의 연출 기법을 차용하여 30분이라는 러닝타임 동안 지루하지 않게 한 소년의 이야기를 풀어나갔는 점에서 주목할 만한 작품이었다.
 

[사진 10] 영화 <새길> 판사 역할로 출연한 배석인 감독


[사진 11] 영화 <새길> 실형을 선고 받는 광민


[사진 12] 영화 <새길> 감옥에 들어온 광민을 쇠창살 너머에서 보여주는 장면


[사진 13] 영화 <새길> 즐거운 위문공연 장면을 통해 소년원 수감자들도
행복한 일상을 살아갈 수 있는 동등한 존재라는 것을 보여주는 장면


 
한국을 알리고 싶은 노력의 결과물 <팔도강산>(1967)

배석인 감독은 1964년 미 국무성의 초청으로 배우 김희갑과 함께 미국의 영화촬영 현장을 견학할 기회를 얻는다. 이때 미국 남가주 대학에서 특강을 하게 되는데, ‘6.25전쟁’은 알지만 ‘대한민국’은 모르는 미국 학생들과, 텍사스 도서관 내 한국관에 자료가 없어 텅텅 비어있는 모습을 보고 충격을 받는다. 이 충격은 배석인 감독을 다큐멘터리스트로 새롭게 자각하게 만들었다. 아직은 열악한 한국영화산업 환경에서 극영화로 세계무대에 진출하자고만 목소리를 높일 것이 아니라 한국을 알릴 수 있는 다큐멘터리를 통해 그 기반을 튼튼히 닦아 놓는 것이 먼저이고 자신의 사명이라는 생각을 하였다. 
독일과 스페인을 거쳐 한국에 돌아온 그는 사비를 털어 책을 구입하여 텍사스 도서관에 한국관련 서적들을 비치하였고, 스페인에서 영화 시작 전 국가를 트는 것을 본 떠 우리나라의 아름다운 자연경관을 촬영한 영상과 함께 국도극장에서 처음 영화상영 전 애국가를 틀었다. 난데없는 애국가에 관객들이 당황하는 것도 잠시, 한두 명씩 자리에서 일어나 함께 애국가를 제창하던 그날의 기억을 그는 잊을 수 없다고 한다.
이어 가장 중요한 두 번째 작업에 착수한다. 그것은 극영화 <팔도강산>(1967)을 만드는 일이었다. 당시는 경제 개발과 새마을운동이 한창이던 때로 대부분의 사람들이 여행은 커녕 자신의 거주지 주변을 벗어나보지도 못한 경우가 많았다. 이에 직접 가서 보지는 못하더라도 우리나라의 구석구석 아름다운 모습을 영화로라도 보여주고 싶다는 생각을 하였고, 한 달여 간의 밤샘 작업을 통해 <팔도강산>의 초고 시나리오를 완성하였다. 그리고 극작가 신봉승에게 각색을 부탁하여 몇 개의 씬을 추가하고, 김희갑, 황정순을 비롯하여 최은희, 김진규, 김승호 등 당대 최고의 배우들을 캐스팅하였다. 결과는 대성공이었다. 서울에서만 30만 명의 관객을 동원하였고, 다른 감독들에 의해 속편도 제작되었다. <팔도 기생>(김효천, 1968), <팔도 사나이>(김효천, 1969) 등의 아류작도 쏟아져 나왔다. 

 
[사진 14] <팔도강산>(1967)의 개봉극장인 국도극장 앞에 모인 사람들(출처: 국가기록원)


[사진 15] <팔도강산>(1967)의 포스터


[사진 16] <팔도강산>(1967) 사돈(김승호)의 안내에 따라 속리산 법주사를 구경하는 김희갑과 황정순의 모습.
우리나라의 아름다운 역사와 문화를 보여주는 장면 중에 하나이다. 


[사진 17] <팔도강산>(1967) 사위(김진규)의 안내에 따라 삼천리 시멘트 공장을 구경하는 김희갑과 황정순.
우리나라의 큰 공장과 발전된 산업을 보고 놀라는 황정순의 표정이 재미있다.


[사진 18] <팔도강산>(1967) 비행기에서 담뱃불을 붙이는 김희갑에게
“이륙 시에는 답배를 피울 수 없다”고 안내하는 모습이 흥미롭다.


 
TV 다큐멘터리 제작과 63빌딩의 아이맥스 영화관 설립

국립영화제작소에서 꼭 10년을 보낸 1968년, 배석인 감독은 국립영화제작소를 나와 홀로서기에 나선다. 1971년 영화제작자이자 평론가인 호현찬과 함께 한국문화프로덕션을 설립하고, <한국의 美> 등 TV용 다큐멘터리를 만들어 KBS에 납품한다. 하지만 다큐멘터리의 수익성은 매우 낮았고, 회사는 1년만에 문을 닫게 된다. 이후 배석인 감독은 독자적으로 배프로덕션을 설립하고 프랑스에서 『직지심경』이 발견된 것을 계기로 우리의 출판문화를 알리는 영화 <한국의 출판문화>(1972)를 제작하여 세계도서 엑스포에서 상영하였다. 또한 <게릴라전>, <화생방교육> 등 신병들을 대상으로 한 군교육 영화도 제작하였는데, 당시 시도되기 시작했던 셀 애니메이션 기법을 도입하여 실사영화보다 더 많은 제작비를 들여 영화를 제작하였다.
이렇게 수익성이 없음에도 사재를 털어서까지 문화영화에 매진했던 것은 일종의 책임감이었다. 우리 문화를 우리나라 사람들에게 제대로 알리고 싶은 마음, 국경을 넘어 해외에 한국을 알려야 한다는 책임감이 늘 경제적인 이득보다 앞에 있었다. 또한, 언제 실전에 투입될지도 모르는 군인들에게 시뮬레이션을 통해서라도 전술을 완벽하게 체험하게 해주어야 한다는 책임감도 그의 다큐멘터리 작업을 이끌었다. 

1984년 국내 굴지의 기업이었던 대한생명은 우리나라 최고층 건물인 63빌딩을 건설하면서 이 건물 내부에 우리나라의 첫 아이맥스 영화관을 설립하기로 하고, 총책임자로 배석인 감독에게 스카웃 제의를 한다. 늘 새로운 분야의 도전에 주저함이 없었던 그는 곧 문화영화사를 정리하고 아이맥스의 본고장인 캐나다로 떠나 공부를 시작한다. 그리고 돌아와 만든 영화가 <아름다운 대한민국 Dance of the East>(1986)이었다. 20여 년전 <팔도강산>을 촬영할 때 그러하였듯이 대한민국 곳곳을 다니며 장소를 물색하고, 영화를 기획하였다.

 

[사진 19] <아름다운 대한민국>(1986) 촬영 중인 배석인 감독


[사진 20] <아름다운 대한민국>(1986) 촬영 중인 배석인 감독과 촬영기사 박한춘
 
이 영화는 남북적십자 회담장에서도 상영되었고, 세계 곳곳의 아이맥스극장에서도 상영되었다.
 

[사진 21] <아름다운 대한민국>(1986) 부채춤 장면


[사진 22] <아름다운 대한민국>(1986) 농악놀이 장면

      
[사진 23, 24] <아름다운 대한민국>(1986) 해외 상영을 위한 시놉시스 문서

 

하지만 기술과 인력이 부족한 상황에서 지속적으로 아이맥스 영화를 만들기는 어려웠고, 이후에는 주로 해외 아이맥스 영화를 수입하여 상영하는 것으로 만족하여야 했다. 13년 동안 63빌딩 아이맥스영화관을 이끌었던 배석인 감독은 1997년 은퇴하였다.  


다큐멘터리스트 배석인 구술의 의의

본 연구자가 배석인 감독의 구술 인터뷰를 진행한 것은 2009년의 일이다. 당시까지만 하더라도(물론 현재도 그렇지만) 문화영화는 대부분 소재가 불분명하여 볼 수 있는 작품이 많지 않았고, 감독이나 스태프를 찾기도 쉽지 않았다. 또한 당대의 검열서류가 공개되지 않은 탓에 정확한 작품명을 찾기도 쉽지 않았다. 한국영상자료원에 보관된 극영화 <자유전선>(김홍, 1955), <팔도강산>(1968)과 <지상최고의 여정>(1968), 그리고 국립영화제작소에서 함께 일했다는 양종해 감독의 증언, 63빌딩 아이맥스영화관의 개관 책임자였다는 몇 가지 단편적인 정보만을 가지고 첫 만남을 진행하였다.
극영화 영화인들과의 만남은 많은 자료를 가지고 토론하듯 인터뷰가 진행될 수 있는 반면, 자료가 없는 다큐멘터리 감독들과의 만남은 1차적으로 구술자의 증언에 기댄 채 어둠 속을 더듬어 나가는 듯 한걸음 한걸음 진행되지만 잊혀졌던 작품 하나, 정보 하나를 찾을 때마다 마치 고고학자가 된 양 희열을 느끼게 하는 작업이 될 수 있다. 이런 작업을 통해 발견된 영화들을 볼 때면 기존에 가지고 있던 문화영화에 대한 편견을 버리고, 조금은 더 애정 어린 시선으로 감독들이 추구하려고 했던 영화의 핵심에 다가서게 한다. 이 구술을 통해 찾을 수 있었던 두 편의 문화영화 <피어린 600리>와 <새길>이 그러하였다. 분단이나 교화 등의 키워드로만 알려졌던 영화들을 실제로 관람하면서 이러한 이데올로기적인 용어로만은 담을 수 없는 당대 대중들의 감성과 소통의 노력을 엿볼 수 있었다.
구술자와의 만남 이후에 다시 보게 된 영화 <팔도강산>은 ‘한국의 경제 발전상을 알리는 국책영화의 효시’로서만이 아니라 최고의 스타들을 한 영화 안에서 볼 수 있고, 실제 가보기 힘든 전국 방방곡곡을 구경하는 대리만족을 얻으며, 거기에 적절한 위트와 감동까지 선사하여 대중의 마음을 사로잡은 당대 최고의 오락물이라는 의미가 더욱 크게 다가왔다. 이후 수많은 속편과 아류작이 제작된 것뿐만 아니라 KBS 일일연속극 <팔도강산>(윤현민 작, 김수동 연출)이 무려 3년 동안 방송되면서 전국을 넘어 해외까지 로케이션을 다니며 인기를 구가한 것은 대중들의 호응이 아니고서는 불가능한 일이었다.
이 구술을 통해 국립영화제작소와 독립프로덕션의 초기 제작형태에 대한 기본적인 지형도가 그려졌다. 이후 국립영화제작소와 문화영화, 그리고 관에서 혹은 독립프로덕션에서 문화영화제작에 대한 연구를 위해 영상자료원에서 2012년 문화영화에 대한 주제사 구술을 진행하였다. 이러한 기본적 연구를 바탕으로 한국 문화영화의 역사와 위치에 대한 연구가 지속되기를 바란다.





1) 이 영화는 KTV국민방송 e영상역사관(http://www.ehistory.go.kr)에서 볼 수 있다.
2) 이 영화는 KTV국민방송 e영상역사관(http://www.ehistory.go.kr)에서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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