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제강점기극장 13. 경성극장(경성연예관, 서울극장)

by.한상언(한상언영화연구소 소장) 2019-10-02
겅성극장 사진
[자료] 1921년 설립된 경성극장


경성극장은 일제강점기 본정 3정목 94번지에 위치했던 대표적인 일본인 극장으로 1921년 8월 개관하여 해방 직후까지 존속한 극장이다.  

경성극장은 지금의 충무로 남산스퀘어빌딩 북편, 과거 수좌(壽座)가 있던 자리에 들어섰다. 그 곳은 1907년 이전 설립된 판본좌(坂本座)가 있었던 곳으로 서울의 일본인 극장 역사에 빼놓을 수 없는 유서 깊은 곳이다. 경성극장의 전신이자 판본좌의 후신인 수좌는 1908년 건립되었고 1921년 그 자리에 경성극장(京城劇場)이 신축되었다.

경성극장의 설립은 제1차 세계대전 종전으로 인한 호황으로 주식회사의 형태의 대형 극장이 우후죽순 격으로 설립되던 상황에서 이루어 진 것이다. 경성의 일본인 자본가들은 본정 2정목에 위치한 수좌(壽座)를 신축하기로 하고 이를 위해 주식회사 경성극장을 설립한다. 1919년 10월 기존의 수좌는 헐려 원산으로 이전되었고, 1921년 8월 가부키나 연극, 무용과 같은 무대공연을 할 수 있는 경성극장이 만들어졌다.

경성극장의 주주와 경영진은 경성의 주요 실업인들이 주축이 되었다. 경성극장 제4기 대차대조표에 표기된 중역의 이름을 살펴보면, 취체역 회장 고조우 간도(古城菅堂), 전무취체역 무라카미 코지로(村上幸次郞), 취체역 구기모토 도지로(釘本藤次郞), 카지와라 수에타로(梶原末太郞), 야자와 긴지로(矢澤近次郞), 사노 히코조(佐野彦藏), 고가와 카츠헤이(小川勝平) 감사역에는 이케다 쵸베이(池田長兵衛), 미타 마사지로(三田政治郞), 시이키 우노스케(椎木宇之助), 세키 시게타로(關繁太郞), 야마자키 시카조(山崎鹿藏)이었다. 

이중 회장 고조우 간도는 일본인 의사이자 실업가로 조선상업은행의 대주주 중 한명이었으며 전무 무라카미 코지로는 무라카미 텐신(村上天眞)이라는 이름을 쓰던 무라카미 사진관의 주인이었다. 취체역 중 한명인 구기모토 도지로는 조선의 철물왕으로 불리던 인물이었고 야자와 지로는 동양생명보험회사의 경성지점장이었다. 이처럼 경성극장의 주요 인물들은 경성의 대표적인 일본인 실업가들이 망라되었다. 

경성극장에서 일본의 텐카츠(天勝)나 텐와(天華)와 같은 유명한 연예단이나 연극단, 가부키단이 경성에 와서 공연을 했다. 특히 시즈마 고지로(靜間小次郞)는 이기세(李基世)가 그 문하에 있었을 정도로 일본 연극계의 지도자 중 한명이었다. 이와 같은 일본 연극계의 유명 인물이 이끄는 단체들이 경성에서 공연 할 때에는 경성극장이 중요한 공연장으로 활용되었다. 

경성의 대표적 흥행 장소였던 경성극장은 1929년 2월 13일 발생한 화재로 소실되었다. 당일 화재는 오전 5시 40분경 경성극장에서 발화되었고 6시 30분경 진화되었는데 당시 바람이 심하여 극장 내 집기들을 꺼내지 못한 채 극장이 전소하고 말았다. 이로 인해 경성극장은 극장가격 12만5천원, 집기 2만 여원 도합 15만 여원의 피해를 입었다. 

화재 발생 직후 경성부에서는 불탄 그 자리에 극장을 재건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겠다고 하면서 주주의 일부가 주식회사의 해산을 주장했다. 이때 일본국수회 경성지부장이자 야쿠자 두목 와케지마 슈지로(分島周次郞)가 주주총회를 요구하며 1.극장신축, 2.다른 극장(중앙관)과의 합병, 3.해산 중 하나를 선택하여 결론을 내자고 주장했다. 1930년 2월 27일 열린 경성극장 주주총회에서 주주 18인이 불탄 옛 자리에 10만 2천 여원 예산으로 극장을 재건하기로 결정하면서 새로운 극장의 설립이 추진된다.

1931년 9월, 과거 경성극장이 있던 자리에 신축된 극장의 이름을 경성연예관으로 정하고 와케지마 슈지로의 분도흥행부에서 극장운영을 맡았다. 얼마 지나지 않아 와케지마는 흥행 사업을 본격적으로 추진하기 위해 분도흥행부(分島興行部)를 대일본흥업회사(大日本興業會社)로 확대한다. 특히 와케지마는 영화제작을 추진하기 위해 원산프로덕션의 도야마 미츠루(遠山滿)를 끌어들였는데 당시 도야마는 경성운동장 근처에 원산프로덕션 경성촬영소를 설립하고 영화촬영을 시작했다. 원산프로덕션에는 조선의 유명 영화인인 나운규가 합류하여 영화 제작에 참여하고 있었다. 
 
 
[자료] 원산프로덕션 경성촬영소 개소식(《조선신문》, 1930.12.14.)


설립 초기 대일본흥업회사는 사장 와케지마 슈지로, 전무취체역 나루키요 다케마쓰(成淸竹松), 취체역에는 도야마 미츠루, 사토 카츠타(佐藤勝太)가 맡았다. 대일본흥업회사 원산프로덕션에서는 나운규가 출연한 <금강한>(1931)을 비롯해 <남편은 경비대로>(1931), <경성 온 퍼레이드>(1931)와 같은 영화가 제작되었다. 

하지만 대일본흥업회사의 영화제작 활동은 평탄치 않았다. 도야마 미츠루가 회사를 탈퇴하자 영화제작은 한동안 소강상태일 수밖에 없었다. 이때 쇼치쿠에서 활약하던 야마자키 유키히코(山崎行彦)가 합류하고 무용가 배구자(裵龜子)의 극장 설립을 돕고 있던 이필우가 합류하면서 대일본흥업회사는 경성극장 뒤편에 경성촬영소를 짓고 영화촬영을 재개하게 된다. 이로써 와케지마의 경성촬영소는 제2기를 시작한다. 1934년부터 1937년 사이에 경성촬영소에서는 3편의 무성영화와 6편의 토키영화가 제작되었다. 이중에는 조선 최초의 토키영화인 <춘향전>(1935)과 나운규의 마지막 작품인 <오몽녀>(1937)가 포함되어 있다. 

경성의 대표적인 연극장으로 운영되던 경성연예관은 1935년 9월 3일 개축되었다. 종래의 기석(寄席) 형태의 극장에서 좌석을 확대하여 정원을 늘리고 끽연실, 휴게실, 화장실 등을 정비하는 등 극장 안팎을 대대적으로 수리하고 이름도 종래의 경성극장으로 되돌아갔다. 

경성극장의 운영주 와케지마 슈지로는 1937년 명동 중국영사관 부지를 인수하여 극장을 세울 계획을 세우지만 실패한다. 와케지마는 경성촬영소를 고려영화협회에 매각하고 1939년 봄 강원도 철원의 철원극장을 인수하여 근거지를 철원으로 옮기게 된다. 이에 따라 1939년 3월 1일부터 경성극장의 운영권은 와케지마에서 도쿄 후지흥행부의 마쓰오 구니조(松尾國三)에게 넘어가게 된다. 
 
[자료] 상설영화관으로 바뀐 경성극장( 『キネマ旬報』(제57호), 1942.08.21)


새로운 운영자들은 경성극장을 영화관으로 개축하였다. 1939년 9월 개축공사가 완료되고 상설영화관으로 인가를 얻게 되자 경성극장은 10월부터 신코키네마의 조선봉절관으로 운영된다. 신코키네마 봉절관이던 경성극장은 영화법 제정과 함께 영화산업의 통폐합으로 1942년 신코키네마가 해산되어 다이에(大映)로 통합되자 다이에 직영관으로 운영되었다. 당시 영화순보의 기록을 토대로 살펴보면 1943년 현재 경성극장은 흥행주는 다이에, 지배인은 가와무라 타다시(川村正)였으며 총 750석의 객석을 가지고 있었다. 

경성극장은 해방 후 이름을 서울극장으로 바꾸었으며 적산관리인은 강상률이었다. 하지만 국제극장이 시공관으로 바뀌게 되자 1947년 12월 전 국제극장 관리인이던 김양성이 강상률을 대신하여 서울극장의 적산관리인이 된다. 김양성이 운영하던 서울극장은 6.25전쟁 중 파괴되어 재건되지 못했다. 


[참고문헌]
《경성일보》, 《동아일보》, 《매일신보》, 《조선신문》, 《조선중앙일보》
김태현, 『일본어 잡지로 보는 식민지 영화 1』, 도서출판 문, 2012.
김계자, 『일본어 잡지로 보는 식민지 영화 1』, 도서출판 문, 2012.
정병호·김보경, 『일본어 잡지로 보는 식민지 영화 3』, 도서출판 문, 2012.
한국영상자료원 한국영화사연구소 엮음, 『일본어 잡지로 본 조선영화(1~6)』, 한국영상자료원, 2010~2015.
한상언, 『조선영화의 탄생』, 박이정, 2018.




[자료] 매일신보 1929.02.14.



십삼일 조(朝) 본정(本町)에 대화(大火), 폭풍에 불길 날려, 경성극장 소실! 화재원인은 실화인모양, 전부 사호(四戶) 사동(四棟) 전소(全燒)
작13일 5시35분에 본정3정목 경성극장 2층에서 실화(목하 조사 중)로 불이 일어나 때마침 불어오는 맹렬한 폭풍에 불길은 기세를 얻어 동극장 360평 3층 1동을 전소하고 이웃집 4동 4호를 회신한 후 동6시40분경에 진화하였다.

손해 십여만, 사상(死傷)도 있다, 소방조원의 결사적 활동, 마치 활동사진 같이
이번 불은 금년 이래 제일 큰 화재로 그 피해금액은 십여만원의 거액에 달하며 더욱이 福田소방조원이 참사한 희생까지 있었고 이 외에도 동극장의 하인 崔順吉의 일개월 가량의 화상과 소방조원들의 부상도 다수하였다. 화재의 당소는 상점, 회사, 요리점 등의 宏大한 건물이 즐비하야 남부 일대의 시민의 소동은 그 극에 달하였고 소방조원의 연소를 방어하는 활동 등 실로 전란의 한 당면을 방불케 하였다. 

보험은 7만원
금번 재난을 당한 경성극장은 주식제로 古城사장, 村上전무의 손으로 경영하여 오든 터인데, 동극장은 일직 7만원의 화재보험이 있었고 동일 10시경부터 본정 3정목에서 중역회의를 개최하고 선후책을 토의하는 중이더라.


[자료] 동아일보 1927.05.09.



경극(京劇)에 불경사건(不敬事件), 천황폐하 어진으로 흥행타 임장한 경관에게 발각되어, 배우 6명 본서에 인치(引致)

동경에서도 이름 있는 현대극단 원산만(遠山滿) 일행 47명이 재작 칠일 밤부터 시내 수정(壽町) 경성극장(京城劇場)에서 연행을 하게 되었던바 동 아홉시 경에 둘째로 상연한 현대극 피묻은 군도(血染軍刀) 제3장에 이르러서 황실 존엄에 대한 불경한 거조가 있다고 하야 돌연히 임장하였든 소관 본정서 횡산(橫山) 경부보가 중지를 명령하는 동시에 극단장 원산만이라는 본명 소원록(小原綠)(35) 등 배우 영정복(永井福)(34) 무대감독 파가철조(破家哲助)와 및 동 극장 막짓는 사람 길미말태랑(吉尾末太郞)(49)과 원산극단측 막짓는 사람 인여정칠(人與淸七)(51)과 옥정자삼(玉井滋三)(34) 등 여섯명을 본정서로 데려다가 검속한 후 동극단의 경성흥행을 중지케 한 사실이 있어서 일시는 대 혼잡을 이루었다는데 그 내용은 전기 각본은 니항(泥港)에서 전사한 성야소좌(星野 少佐)에 대한 연극인대 제3장은 “성야가의 안방”이라고 한 장면인바 성야 소좌가 전사한지 일 년 제일을 당하야 그 미망인 추자(未亡人 秋子)가 성야 소좌의 사진을 불단에 놓고 제를 지내고자 할 즈음에 그와 비밀한 관계가 있는 등전광(藤田光)이라는 남자가 들어와서 그 사진을 깨처버리고자 하며 불의의 짓을 하는 마당인데 그 불단에 올려놓은 사진을 성야 소좌의 사진 대신 모 일문신문 3월 5일부 부록인 천황폐하(天皇陛下)의 어진을 모시어 놓고 그와 같이 연극을 행한 것이라더라.


[자료] 동아일보 1939.09.29.



신흥 봉절관(封切館)으로 / 경성극장 개관

개축공사가 완성된 경성극장은 그간 신청 중이던 상설영화관으로서 인가도 되겠음으로 1일부터 4일까지 동보단원(東寶劇團) 일행 100여명의 출연으로 개관. 5일부터 신흥키네마 조선 제일 봉절관으로 본격적 흥행에 들어설 모양이다. 이에 앞선 30일은 피로초대관극회(披露招待觀劇會)를 개최한다는 바 이로써 경성에도 송죽의 명치좌, 동보의 약초극장, 일활의 황금좌와 함께 신흥의 경성극장이 서로 꽃다운 홍업전을 연출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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