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제강점기극장 10. 우미관

by.한상언 (한상언영화연구소 소장) 2019-09-02
우미관을 세운 하야시다 긴지로와 그가 경영하던 하야시다 상점의 모습
[사진] 우미관을 세운 하야시다 긴지로와 그가 경영하던 하야시다 상점의 모습(『경성부지권(京城府之卷)』, 京城府)

우미관은 1912년부터 1959년까지 서울 관철동에 존속했던 영화관으로 일제강점기 내내 조선인 관객들에게 가장 친숙한 장소였다. 

일본인 하야시다 긴지로(林田金次郞)와 시바타 미요지(紫田三代治)가 동업하여 1912년 12월 11일 관철동 89번지에 건립한 우미관은 수용 인원 1,000명 규모의 2층 벽돌 건물로, 조선인 상권의 중심지였던 종로2가 큰길에서 관철동으로 들어가는 골목에 위치했다. 

우미관의 설립자 하야시다 긴지로는 청일전쟁 당시 조선에 건너온 어용상인이었다. 잡화 판매를 비롯해 석탄 판매업, 고리대금업 등으로 부를 일군 대표적인 상업 자본가로 경인 지역을 중심으로 자신의 이름을 딴 하야시다상점(林田商店)을 경영했다. 한편 동업자 시바타 미요지는 청계천 모전교 부근 무교동에 처음으로 목욕탕을 세운 인물이었다. 

일찍부터 조선으로 건너와 조선인들을 상대로 사업을 영위해서였는지, 비슷한 시기 건립된 다른 영화관과 달리 조선인 관객을 대상으로 활동사진관으로 운영하는데 두 사람은 거부감이 없었다. 1912년 당시 조선인 관객은, 지만관(志滿館)이라는 이름으로 필름을 상영했던 원각사나 유광관(有光館)이라는 이름으로 영화를 상영했던 장안사와 같은 연극장에서 특별 프로그램 형태로 활동사진을 접했다. 물론 최초의 활동사진상설관으로 알려진 경성고등연예관을 통해서도 영화 관람했다. 그러나 경성고등연예관은 조선인 관객과 일본인 관객을 함께 받아 민족간 묘한 긴장감을 불러일으키곤 했다. 당시 경성고등연예관에서는 조선인 변사와 일본인 변사가 번갈아 등장하여 영화의 줄거리를 설명한 후 영화를 상영했는데, 이러한 방식은 짧은 길이의 영화에는 유용했지만 장편영화에는 통용되지 않았다. 영화 중간에 설명하는 중설(中說)이 불가능했기 때문에 장편영화의 경우 관객들은 영화의 내용을 정확히 알 수 없었고 자연스레 불만이 터져 나왔다. 따라서 1912년 설립된 대정관과 1913년 설립된 황금관은 애초 일본인 관객만을 대상으로 한 일본인 상설관으로서 운영되었으며, 1912년 설립된 우미관은 조선인 변사만을 두어 오로지 조선인 관객만을 대상으로 한 조선인 상설관으로서 운영되었다. 


[자료] 우미관 신축 낙성 개관 광고(《조선신문(朝鮮新聞)》, 1912.12.11.)

조선인 극장으로서 우미관이 전성기를 맞이한 시절은 1910년대 중반, 유니버설 영화를 독점적으로 상영하던 때였다. 당시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여 독일에서 들여오던 생필름의 수입이 중단되고 파테사를 비롯하여 프랑스에서 수입되던 영화의 수도 현저히 줄면서 필름 가격이 폭등했다. 반면 1915년 미국의 유니버설사가 할리우드에 세계 최대 규모의 스튜디오인 유니버설시티를 짓고 영화를 양산, 세계 시장을 향해 대규모 수출을 시작했다. 1916년 무렵 영국의 필름 마켓에서는 미국영화가 무려 90%를 차지할 정도로 큰 위력을 떨쳤는데, 특히 유니버설의 필름들은 영국의 필름 마켓을 거치지 않고 곧바로 태평양 건너 일본으로 수출되었다. 

이때 폭풍처럼 미국산 필름의 인기를 몰고 온 것이 바로 ‘시리얼’(serial)이라 불리는 연속영화였다. 연속영화는 주로 모험과 사랑을 소재로 한 액션 영화들을 일컫는데, 1910년대 중반부터 1920년대 중반까지 전 세계 영화 흥행의 중심을 차지했던 장르다. 일반적으로 2권 분량의 에피소드가 1편을 이루며 대략 15편으로 완료되는데, 하나의 에피소드가 완료될 때마다 다음 편 이야기를 암시하는 장면으로 끝내는 소위 ‘클리프행어 효과’가 관객들로 하여금 상설관을 지속적으로 찾게 만들었다. 

조선에 처음 소개된 유니버설의 연속영화는 1916년 6월 10일 황금관 신축 이전을 기념하여 상영된 <명금>(The Broken Coin, 1915)이었다. 프란시스 포드(Francos Ford)가 만든 이 작품은 1915년 일본에서 상영되어 이미 큰 인기를 얻은바, 일년 뒤 조선에 소개될 때는 일본인 극장인 황금관 말고도 조선인 극장인 우미관에서 상영되어 공전의 히트를 거뒀다. 

한편 <명금>을 배급하던 유니버설사는, 1916년 7월 이전에 제작하여 이미 수입업자들에게 판매한 필름들을 제외한 모든 신작 필름에 대하여 유니버설의 일본 법인이라 할 수 있는 하리마(播磨)-유니버설(훗날 유니버설 동경지점)을 통해 임대 계약을 체결한 후에라야 상영 가능하도록 하는 조치를 취한다. 유니버설의 정책이 필름을 판매에서 특약관 임대 형식으로 바뀐 것이다. 이 조치는 유니버설의 다양한 작품들을 배급할 수 있게 하여 유니버설 영화로 대표되는 할리우드 영화의 영향력을 크게 확대하는 결과를 낳았다.


[자료] 우미관이 유니버설사와 특약 계약을 맺었다는 내용의 광고(《매일신보》, 1916.12.17)

장편영화 1편을 상영하는 요즘과 달리, 당시의 상설관은 여러 편의 짧은 영화를 묶어 상영하는 방식이 주를 이뤘다. 오늘날의 TV 편성처럼 다양한 장르의 영화들을 묶어 3시간 정도 분량이 되는 프로그램 하나를 만들었는데, 대정관이나 황금관과 같은 일본인 상설관은 서양영화와 더불어 일본의 구파, 신파영화를 섞어 프로그램을 구성했다. 그러나 조선인 상설관인 우미관은 일본영화를 상영하지 않고 오로지 서양영화로만 프로그램을 짰기 때문에, 유니버설과 특약관 계약을 맺고 유니버설 영화를 본격 상영하는 편이 훨씬 유리했다. 이런 이유로 우미관은 1916년 12월 유니버설과 특약을 체결하고 조선에서 유니버설영화를 독점 상영하게 된다. 그 결과 유니버설의 연속영화들 외에도 ‘블루 버드’(The Blue Bird)니 ‘레드 페더’(Red Feather)니 하는 브랜드의 장편 영화들이 우미관을 통해 소개될 수 있었다.

우미관에서 유니버설의 연속영화를 상영하던 즈음 가장 큰 인기를 끈 변사가 서상호였다. 그는 굵다란 목소리로 웅변조의 설명을 했는데, 막간에는 무대에 나와 가랑이 사이에 자전거 클랙슨을 끼우고 ‘뿡뿡’ 소리를 내며 이른바 ‘뿡뿡이 춤’을 추었다. 그러다 한때는 혁신선미단(革新鮮美團)이라는 신파극단에 가입해 신파배우로도 활동했다. 

유니버설의 영화가 조선인 관객들의 인기를 끌면서 서상호를 위시한 우미관의 변사들이 스타가 되었다. 그리하여 단성사가 활동사진관으로 재탄생한 1918년 이후에는 변사들이 각 상설관의 흥행을 결정짓는 가장 큰 요인이 되었다. 서상호 같은 인기 변사는 각 상설관이 주목하는 최고의 스카우트 대상이었다. 

1910년대 전성기를 보낸 우미관은 1918년 설립된 단성사와 1923년 설립된 조선극장과 경쟁하며 삼파전을 벌이던 중, 1924년 5월 발생한 실화로 건물 전체가 전소된다. 같은 해 12월 신축되기는 하였으나 시설이나 프로그램 경쟁력이 다른 극장들보다 떨어져 조선인 관객을 독점하던 과거의 영광을 되찾지 못했다. 대신 파격적으로 전석 10전이라는 싼 관람료를 책정, 1930년대 중반에는 조선에서 가장 많은 관객을 수용하기도 했다. 하지만 많은 관객에 비해 화장실의 규모가 작고 위생 상태가 좋지 않아 서울에서 가장 지저분한 장소의 대명사가 된다. 

시설이 형편없다 보니, 1943년 조선흥행엽합회가 영화관의 시설을 기준으로 등급을 나누고 책정된 가격 이하로만 요금을 받기로 했을 때, 우미관은 전체 11개 등급 중에서 6~7급 정도를 받았다. 1~4급까지는 개봉관, 5~10급은 재개봉관, 11급은 문화영화관으로 크게 구분되던 당시의 기준에서, 명치좌와 동보영화극장, 성보영화극장이 1급을 받았으며 동보중앙극장, 희락관, 대륙극장이 5급을, 우미관, 낭화관, 신부관이 6~7급이었다. 서울의 영화관이 1류극장-2류극장-3류극장으로 구분됐 때 우미관은 3류극장에 위치하게 된 것이다. 

서양영화만 상영하던 우미관이지만 '활동사진영화취체규칙'이 제정된 1934년 이후로는 일본영화를 주로 상영하게 된다. '활동사진영화취체규칙'으로 상설관에 일본영화 의무 상영이 강제되자, 재정이 어렵던 우미관으로서는 상대적으로 저렴한 일본영화로 프로그램을 채울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이 시기 우미관은 경성촬영소 및 경성극장을 운영하던 와케지마 슈지로가 맡아 경영했다. 경성촬영소를 설립하여 조선영화 제작에 참여하기도 했던 와케지마는 조선인 상설관 운영도 고려하여 우미관을 임대했는데, 경성촬영소에서 제작한 <아리랑 고개>(홍개명, 1935) 같은 작품이 우미관에서 개봉되었다. 

우미관은 오랫동안 종로의 조선인 흥행가를 상징하는 공간이었다. 우미관이 건립되자 조선인 관객들은 관철동 골목으로 모여 들었고 미로 같은 관철동 골목은 환락가가 되었다. 1920년대 3류 영화관으로 전락하면서 우미관은 저가의 입장료로 관객을 유인하며 명맥을 유지했다. 이때도 역시 우미관 주변은 사람들로 넘쳤으며 밤낮없이 흥청거렸다. 다양한 인간 군상들이 몰려 있던 그곳은 변사 서상호뿐만 아니라 김두한으로 대표되는 조선인 깡패들 혹은 그들을 소재로 한 활극영화의 주요 무대로도 기억된다. 

해방 후, 전쟁 후까지도 관철동 골목을 지키던 우미관은 아쉽게도 1959년 화재로 사라졌다. 이후 화신백화점 옆에 우미관이란 이름의 영화관이 신축되지만, 새로운 우미관은 1982년까지 운영되다가 경영난으로 역시 폐관되었다. 


참고문헌
한상언, 「구보씨, 우미관 영화 보러 갈래요?」, 『구보학보』 17호, 2017, 9~40쪽.
한상언, 『조선영화의 탄생』, (주)박이정, 2018, 159~171쪽.


 

[자료] 《매일신보》, 1916.12.17[사진2 참고]
 

十二月 十四日브터 / 特別大寫眞 / 泰西大々活劇 야구이 全五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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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료] 《매일신보》, 1943.07.03.

1級 (封切館) 八十錢으로 / 今日부터 映畵常設館 入場料引上

영화상설관의 입장 요금이 일부터 올낫다.

조선흥행연합회(朝鮮興行聯合會)에서는 오래전부터 영화상설관의 입장 요금을 올릴려고 당국에 신청 중이든 바 일부 관보로써 개정 요금이 고시되엿다.

그 내용을 보면 조선 안에 잇는 영화관을 최고 급으로부터 최저 十一지 구별하야 그 입장 요금도 최고 八十전으로부터 대걔 전씩 차이를 두고 최저 十一二十五지 현재보다 부가량 빗싸게 결정하엿다.

八十/ 七十五/ 七十/ 六十五/ 六十/ 五十五/ 五十/ 四十五/ 三十五/ 三十/ 十一二十五

그런데 지는 봉절관(封切館)으로 하고 급부터 지는 재상영(再上映) 상설관으로하엿스며 十一급은 문화영화 -영화 등의 상설관으로 하엿다.

을 결정하는 것은 각 도의 사정에 의하야 결정되는 것인데 경성의 예를 들면 명치좌(明治座) 동보(東寶)영화극장, 성보(城寶)영화극장 등은 (八十)에 속하고 동보중앙극장(中央劇場) 히락관(喜樂館) 성남극장(城南劇場) 대륙극장(大陸) 등은 (六十) 우미관(優美館) 낭화관(浪花館) 신부좌(新富座) 등은 급 내지 급에 속한다. 이번 결정된 요금은 영화를 흥행할 의 요금으로서 최고 요금이므로 영화에 한하여서는 이상은 더 못 밧기로 되엿다. 입장료에는 세금과 관남료지 전부 포함되여 잇는데 세금은 전액의 부를 차지하고 잇다. 八十전은 그 중 전이 세금이고 七十五전은 六十五전은 전이 세금인데 -나 문화영화관의 입장료(二十五)에는 세금이 붓지 안는 현역 군인(하사관 이하)세 이상 十四세 미만의 소인은 그 입장료의 반액을 밧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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