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제강점기극장 9. 대정관

by.한상언 (한상언영화연구소 소장) 2019-08-20
대정관 전단
[자료] 대정관 개관 기념 광고(≪매일신보≫, 1912.11.08)

대정관은 1912년 11월 7일 앵정정(櫻井町)에 설립되어 1935년 12월 16일까지 존속한 대표적인 일본인 전용 영화관이었다. 

대정관의 설립자는, 고급 여관 천진루(天眞樓)의 주인 닛다 마타베(新田又兵衛)의 셋째 아들인 닛다 고이치(新田耕市)였다. 이토 히로부미가 조선통감으로 부임하자 시모노세키에 있던 천진루를 남산에 옮겨 지었을 정도로 이토와 막역한 관계였던 닛다 마타베는 슬하에 아들 넷을 두었는데, 이들은 모두 조선으로 이주하여 활동했다. 장남 닛다 신기치(新田新吉)는 천진루를 이어받았고, 차남 닛다 슈키치(新田秀吉)는 닛다 고이치와 함께 대정관을 운영했으며, 막내 닛다 마타헤이(新田又平)는 인천에서 표관(瓢館)이라는 영화관을 운영했다. 


[자료] 닛다 고이치의 가족 사진(《조선공론(朝鮮公論)》, 제4권 3호, 1916년 3월)

1882년 태어난 닛다 고이치는 1899년 상업학교를 졸업하고 미쓰이(三井)물산에 입사하여 사업 수완을 배운 후, 조선이 일제에 강점되던 1910년 일본 생활을 정리하고 조선으로 건너 왔다. 조선에 와서는 가족과 지인들을 통해 얻은 정보를 바탕으로 개발 예정지였던 앵정정 일대 5천평 정도의 땅을 매집했다. 자금은 동경건물회사(東京建物會社)에서 거액의 대출을 받아 변통했는데, 그 땅을 관통하여 지금의 을지로가 뚫리게 되면서 짧은 기간에 큰 시세 차익을 얻었다. 대출금을 모두 상환하고도 2만원의 현금을 손에 쥔 닛다는 1만 2천원의 예산으로 활동사진관 건립을 추진한다. 영화관 건축이 완성될 무렵, 메이지(明治)시대가 끝나고 다이쇼(大正)시대가 시작되자 닛다는 애초 생각해둔 유락관(遊樂館)이라는 이름 대신 대정관이라는 이름으로 1912년 11월 7일 극장 문을 연다. 

대정관은 경성의 영화 흥행을 주도하던 경성고등연예관과 차별화한다는 의미에서 극장 광고에 “아사쿠사식(淺草式)”이란 용어를 적극 활용했다. 태국에서 온 일본인들이 세운 경성고등연예관의 흥행 방식과는 다르다는 점을 강조한 것이었다. 구체적으로는 일주일 간격으로 프로그램을 교환하여, 월 2회 간격으로 프로그램을 교환하던 경성고등연예관보다 자주 새로운 프로그램을 선보였다. 또한 입장료를 특등 50전, 1등 30전, 2등 20전, 3등 10으로 책정하여 경성고등연예관보다 저렴한 가격으로 관객들을 유치했다. 나아가 위생 설비를 비롯한 각종 편의 시설의 설치, 난로와 선풍기의 구비, 양장(洋裝)의 여성 안내원 배치 등을 통해 편리함과 청결함을 강조함으로써 서울에 거주하던 일본인 관객들로부터 큰 호응을 얻을 수 있었다. 

대정관과 경성고등연예관은 관객 구성 면에서 가장 큰 차이를 보였다. 경성고등연예관은 대정관이 개관하기 전인 1912년까지 조선인 변사와 일본인 변사를 함께 두어 조선인과 일본인 관객들을 함께 받았다. 반면 대정관은 일본인 변사만 두었기 때문에 자연스레 일본인 관객들이 주로 찾는 곳이 되었다. 

일본인 관객을 대상으로 영화관을 운영하다 보니 대정관의 프로그램은 일본의 구파, 신파 영화가 중심이었다. 일본영화 필름을 공급받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했던 대정관은 닛카쓰(日活)와 대리점 계약을 맺는데, 일본의 4대 메이저 영화회사인 요시자와상점(吉澤商店), 요코다상회(橫田商會), M파테, 후쿠호도(福寶堂)가 통합하여 1912년 설립된 닛카쓰는 당시 일본 영화 산업을 거의 독점하고 있었다. 


[사진] 대정관 개관 사진(오카 료스케(岡良助), 『경성번창기(京城繁昌記)』, 도쿄: 하쿠분샤(博文社), 1915년.)

닛다 고이치는 극장 운영과 흥행업을 체계적으로 영위하기 위해 닛다연예부(新田演藝部)를 세워 운영했다. 1914년 1월 닛다연예부의 영업주임은 아라키 다이스케(荒木大助), 지방부장은 스즈키 도라타로(鈴木虎太郞)였다. 

닛다연예부의 가장 중요한 사업은 대정관을 중심으로 전국의 영화관을 관리하는 것이었다. 이는 일종의 필름 유통망을 조직하는 것이었는데, 닛다연예부는 우선 계약을 통해 지방 영화관과 관계를 맺었다. 1913년에는 경쟁 영화관이던 경성고등연예관을 매입하여 제2대정관으로 삼았으며, 닛카쓰와의 계약 이래 ‘닛카쓰 만선지방부(滿鮮地方部)’로 운영되던 1916년에는 인천의 표관을 직영했다. 나아가 경성의 우미관(優美館), 평양의 앵좌(櫻座), 원산의 수관(壽館), 부산의 보래관(寶來館), 대구의 금좌(錦座)를 특약관으로 두고 영화배급망을 구축했다. ‘닛카쓰 조선총대리점’으로 운영되던 1917년 1월 당시 닛다연예부가 관리하던 극장으로는 경성의 대정관(감독원: 노무라 신(野村新)), 인천 표관(감독원: 스즈키 도라타로), 부산 상생관(相生館, 감독원: 미요시 마타로(三好又郞)), 용산 용광관(龍光館, 감독원: 다카하시 류타로(高橋立太郞)), 대구 칠성관(七星館, 감독원: 기리야 도쿠노스케(桐谷德之助)), 평양 가무기좌(歌舞伎座, 감독원: 요시즈미 신고(吉住新吾)), 원산 가무기좌(감독원: 히가시우라 도쿠마루(東浦得圓))이 있었다. 1920년 1월에는 경성의 대정관, 인천의 표관, 부산의 상생관, 대구의 칠성관, 원산의 수관, 평양의 가부키좌를 회원관으로 두고 있었다. 

1918년 닛다 고이치는 주식중매회사인 오사카의 다케하라 유자부로(竹原友三郞)상점과 조선총대리점 계약을 체결한 뒤 본격적으로 주식중매업에 뛰어든다. 이후 1920년 5월 경성주식현물취인소가 설립되자 영화흥행업 관련 사항들은 형제들에게 넘기고 주로 주식중매인으로 활동했다. 

닛카쓰 영화를 배급하며 조선의 흥행업을 주도하던 닛다연예부는 조선 내 다른 일본 영화회사들의 영향력이 커지면서 큰 타격을 입는다. 특히 1921년 닛카쓰 부사장 요코다 에이노스케(橫田永之助)가 희락관(喜樂館)의 대주주가 되면서 대정관의 닛카쓰 독점 시대는 막을 내린다. 이에 대정관은 1921년 12월 15일부터 쇼치쿠(松竹)영화를 상영하기 시작하는데, 쇼치쿠 역시 경성의 황금관(黃金館)을 직영하면서 독점이 어려워지자 또 다른 영화회사인 곳카쓰(國活) 영화를 상영하기로 한다. 그러나 중소영화회사인 곳카쓰 영화보다는 쇼치쿠 영화가 낫다는 판단을 내리고 다시 쇼치쿠 영화를 상영하는 것으로 방향을 돌린다.

그러다 1925년 1월 닛다 형제들은 결국 대정관을 매각한다. 대정관의 운영은 앵정정에서 오복점을 경영하던 후쿠자키 하마노스케(福崎濱之助)가 넘겨받았다. 영화흥행업의 경험이 없던 후쿠자키는 요코야마 도미오(橫山富美雄)와 나카미즈 도모노스케(中水友之助) 등 영화흥행업의 경험이 많은 인물들을 중용하여 경영의 안정을 기하는 한편, 반도 쓰마사부로(阪東妻三郎)나 하야지 조지로(林長二郞) 등 유명 스타가 출연하는 쇼치쿠 영화를 상영하며 관객들의 인기를 끌어 올린다. 

하지만 시설이 열악했던 대정관은 토키영화 시대가 도래하자 다시금 삐걱거리기 시작한다. 1933년 쇼치쿠의 최고 화제작이었던 기누가사 데이노스케(衣笠貞之助)의 토키영화 <충신장(忠臣藏)>이 상영되는 도중, 소리가 중간 중간 끊어져 관객의 원성을 들었던 것이다. 이전부터 대정관의 열악한 시설에 불만을 가졌던 쇼치쿠는, 1934년 대정관과 경성 봉절관으로서의 관계를 끊고 황금관의 후신인 동아구락부(東亞俱樂部)를 경성의 새로운 봉절관을 삼기로 결정한다. 이에 쇼치쿠 영화의 2번관으로 전락한 대정관은 1934년 11월 15일 후발 영화사인 PCL과 계약을 체결하고 PCL 봉절관이 된다. 하지만 PCL 봉절관 시절도 오래가지 못한 채 1935년 12월 16일을 기해 폐관하기에 이른다. 대정관의 흥행권은 약초정 큰 길가에 신축 중이던 약초영화극장으로 넘어갔고, 약초극장은 1935년 12월 30일 낙성식을 거행한 후 다음날인 12월 31일부터 흥행을 시작했다.


참고문헌
한상언, 「대정관의 설립과 변천에 관한 연구」, 『영화연구』 제70호(2016년), 163~188쪽.
한상언, 『조선영화의 탄생』, (주)박이정, 2018, 125~140쪽.





[자료] 제2대정관 전단지


來 八月 十七日부터

    第二大正館 新消息

    特撰拔ᄒᆞᆫ 三大寫眞

------------------------------------

◎ 泰西奇談 三百年 全三卷 六千呎
三百年 以前秘密寶箱如何發見一見 戰慄 大寫眞

------------------------------------

時節柄 見逃치 못  逸品

◎ 軍事大活劇 千軍萬馬 全二卷 四千尺

他館寫眞同視勿

-------------------------------------

當館移入 封切 大寫眞

◎ 破天荒 冒險劇 秘密使命 全三卷 八千尺

王妃秘密! 飛行家使者! 戰慄大臣奸謀! 疑問首飾! 空中 飛行機燃燒! 惡漢追跡! 飛行機, 自動車, 滊車競爭 何勝利?

---------------------------------------------

順序

滑稽 담우君 決鬪

喜劇 好一對

奇談 三百年

大活劇 千軍萬馬

冒險劇 秘密使命

----------------------

登場辯士

辯士長 金德經

說明主任 李丙祚

次席 崔炳龍

辯士 韓圭成

女辯士 康鏡玉

辯士 姜信五

少年 李丙浩

------------------------------------

注意!! 寫眞 長尺午後 七時 三十分 開演

黃金町 第二大正館

電話 一四三四



[자료] 《매일신보》, 1915.04.24.



 

朝鮮人 觀客獨占優美館衆口 / 셰상 맛난 우미관 / 샤진에  물론


죵로 경셩에 잇활동샤진관(活動寫眞館)으로 죠션 사을 쥬장되손님 삼아 흥곳은 황금뎡 이뎡목에 데이대졍관과 죵로통 이뎡목에 우미관(優美館)의 두 곳이 잇셔 뎨이대졍관은 그 큰집 되뎨일대졍관에셔 샤진을 공통야 쓰것이 만앗고 우미관에셔대졍관의 뎍되황금관(黃金館)과 샤진을 공통야 두 곳식 두 곳식 엄연히 한 뎍국의 도로 셔로 야 경 고로 그 경의 결과 연 셔로 됴흔 샤진도 빗최여 셔로 손님을 만이 를 쓰더니 기간

우미관의 흥와 대졍관의 흥쥬와 계약이 되야 죠션인을 주장되손님으로 영업던 뎨이대졍관은 디인 젼문으로 곳칠 죠건으로 뎨이대졍관에 가손님을 밧을 우미관 흥그 보슈로 대졍관 흥쥬의게 삭 이원식 주고 뎨이대졍관에셔 빗쵸이활동샤진을 우미관과 공통야 쓰고 우미관에셔그 셰금으로 삭 오원식 이기로 작뎡되야 뎨이대졍관은 지난 십오일브터 셰계관(世界館)이라 일흠을 곳치고 디인 손님 젼문으로 영업 졔도곳쳐 죠션인 변 젼부 이폐지얏고 우미관은 황금관과 관계를 코 세계관의 샤진을 공통야 쓰이외에 모양좃케 경셩에 죠션인 전문 활동사진관으로

독졈 디위엇엇 원릐 대졍관에서 뎨이대졍관을 일본인 젼문으로 곳치기황금관의 샤진이 평판이 됴흔 고로 그와 경기 위야 진고셔편의 손님은 셰계관에셔 밧고 동편의 손님은 황금관 가목쟝이 되대졍관에셔 밧아 아못조록 손을 만히 고져 이오 우미관은 경셩에 독졈으로 조선인 젼문의 영업을 야 죠션인 손님은 혼맛흘 마암으로 계약한 달에 샤진셰 오원이라 은 일본 디에셔 활동샤진 회샤와 샤진관 흥쥬 간의 달 셰음으로소위 갑죵(甲種)이라 야 그즁 낫다지만은 이젹은 디방 활동샤진관에셔 이러케 회샤와 계약고 샤진을 갓다가 쓰것이오

경셩치 큰 도회에셔 더구나 독졈으로 이십만에 갓가운 죠션인 젼부손님으로 흥 큰 활동샤진관에셔 치 안이 일이라 륙칠만의 디인을 손님으로 흥 대졍관, 황금관에셔도 한 달에 샤진셰수쳔원식 허비을 보면 우미관에셔 디인 활동샤진관과 입장료를 치 밧것이 빗다고 안이수 업스며 우미관에셔 세계관과 대졍관의 샤진을 갓다가 쓴다 되 일본 람 젼문의 활동샤진관에셔 여러 시간 빗초이고 미잇일본 연극의 활동샤진을 주장 삼고로 우미관에셔그 일본샤진은 죠션인 미에 맛지 못닛가 이고 남아지 셔양 것만 갓다가 흥하닛가 우미관에셔쥬장 삼샤진이라도 대졍관에셔나 셰계관에셔주장  샤진이 안인즉 연 샤진이 갑 젹은 것 될 것은 분명며 갑 젹으면 샤진도 그러케

좃타고 슈 업슨적 자연 구경가의 입에셔 여러 가지 비평이 나와 사진이 쟈미 업나니 몃 가지 안되사진을 가지고 시간을 우노라 길게 느리나니 말마다 젼거로 활동샤진을 몃 차례식 가져오데 시간이 걸리나니 이젼에 보던 것을 다시 빗초이것이 잇나니 구경갓던 사이 리약이가 ᄌᆞᄌᆞᄒᆞᆫ오락긔관이 업ᄂᆞ 경셩에서 일본말를 모르ᄂᆞᆫ 샤ᄅᆞᆷ이 활동샤진 구경을 랴면 엇지얏던지 긔밧게 업스닛가 구경을 가기가겟지만은 경 뎍이 업다고 죠흔 샤진을 구경식이지 안이아모리 독졈이라도 손님의 그림로 령셩모양이라고 엇던 활동변 더라.

초기화면 설정

초기화면 설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