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조망> 검열서류 해제

by.이순진(영화사연구자) 2018-05-21
<철조망> 포소터
영화 <철조망> 검열 사례의 역사적 의미

영화 <철조망>의 검열 서류는 두 가지 점에서 흥미롭다. 

첫째는 이 작품이 한국영화 역사상 처음으로 검열제도에 대한 근본적인 문제제기가 이루어졌던 4월혁명의 국면에 놓여 있었다는 점이다. <철조망>의 상영허가 신청서가 접수된 것은 1960년 3월 29일, 우여곡절 끝에 상영을 허가받은 것은 5월 19일의 일이다. 요컨대 이 영화의 검열과정은 4월혁명 발발 직전에 시작되었고 이승만정권이 붕괴한 후에 마무리되었던 것이다. 

4월혁명과 함께 영화계에서는 구악의 청산과 새로운 제도의 구축에 대한 논의가 시작되었다. 이승만정권의 영화계 장악에 앞장섰던 임화수 등을 징치하는 것과 더불어 관권에 의한 영화검열을 폐지하고 민간의 자율적인 영화심의를 위한 제도적 기반을 마련하는 문제가 공론화되었다. 하지만 영화계 내부의 이권 다툼 때문에 새로운 영화 심의제도를 마련하는 일은 계속 미루어졌고, 결국 1960년 9월이 되어서야 민간자율을 표방한 영화심의기구인 영화윤리전국위원회가 활동을 시작할 수 있었다. 4월혁명 발발에서 9월 이전까지 영화검열은 여전히 문교부에 의해 이루어졌으며 영화 <철조망>의 검열서류는 바로 이와 같은 과도기에 개별 영화의 검열이 어떻게 실행되었는지를 보여준다. 

기존의 관행이 엄존하는 가운데 새로이 도래할 (것으로 예상되는) 미래의 규범을 둘러싼 혼선이 계속되었던 이 과도적 시기에 개별 영화에 대한 규제는 더욱 복잡한 양상을 띠었다. 4월혁명 발발 직전에 상영허가 신청이 접수된 <철조망>에 대해서 검열의 주무부서인 문교부는 기존의 관행대로 내무부, 국방부, 법무부, 공보실, 대검찰청의 관계자들이 참여하는 합동검열을 실시했다.(4월 15일 검열시사)

국산영화 <철조망> 검열의견서
(그림 1) 국산영화 <철조망> 검열의견서 (4월 15일 검열시사)

검열위원 위촉의 건, 국산영화 <철조망> 상영불허가의 건-1
검열위원 위촉의 건, 국산영화 <철조망> 상영불허가의 건-2
검열위원 위촉의 건, 국산영화 <철조망> 상영불허가의 건-3
검열위원 위촉의 건, 국산영화 <철조망> 상영불허가의 건-4
검열위원 위촉의 건, 국산영화 <철조망> 상영불허가의 건-5
검열위원 위촉의 건, 국산영화 <철조망> 상영불허가의 건-6 
(그림 2) 검열위원 위촉의 건, 국산영화 <철조망> 상영불허가의 건 (5월 9일 상영불허 결정)

여기서 국방부는 제한허가, 법무부는 불허가, 외무부는 “우방의 우호관계를 해칠 우려가 있음”, 공보실은 제한허가, 내무부는 “상영의 시기가 상조”하다는 의견을 제시하였다. 이승만정권이 무너진 후인 5월 6일에 문교부는 관권 검열에 대한 비판여론을 의식한 탓인지 민간인들(김은우, 유호, 원경수, 성인기, 천관우, 권순영)을 중심으로 검열위원회를 다시 구성하고 <철조망>에 대한 재검열을 시행하였다. 하지만 4월혁명 이후의 완화된 사회 분위기에도 불구하고 민간 검열위원들은 1차 검열 당시 당국의 의견을 대부분 그대로 수용하였으며, 따라서 영화 <철조망>의 상영은 허가되지 않았다(5월 9일 상영불허 결정). 주로 언론인들(그들은 이후 영화윤리전국위원회의 핵심 구성원이 된다.)로 구성된 검열위원회의 견해가 과거 정부 부처가 표명했던 입장과 대동소이했다는 사실은, 이후 출범한 영화윤리전국위원회의 이른바 “민간 자율심의”가 근본적으로는 혁신적이지 못할 것임을 예고한 것이었다.
 
제작자는 검열에서 지적받은 사항을 반영하여 총 27개 처를 수정, 재편집한 후에 5월 11일에 다시 상영허가를 신청했다. 이에 문교부는 원경수와 권순영을 검열위원으로 위촉하고 5월 18일에 재검열을 실시하여 “반공사상 및 우방 유엔군과의 우호관계에 유해한 장면을 대폭 삭제”할 것을 조건으로 상영을 허가하기로 한다. 서류 상에서 분명히 확인할 수는 없으나(관련 서류가 누락된 것으로 추정되는데) 제작자가 검열신청 취하 요청서를 접수(4월 8일)하고 자진 수정 후 재검열을 요청(4월 9일)한 것으로 보아 5월 11일 이전에도 이미 한 번의 자진 개작이 있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결국 영화 <철조망>은 총 세 차례에 걸친 검열과 개작을 거친 후에야 상영이 허가되었고 1960년 7월 21일에 개봉되었다. 현재 <철조망>의 필름은 유실되었고 녹음대본만이 남아 있는데, 이 마지막 검열에서 지적된 사항을 수정한 흔적이 녹음대본에 기록되어 있다.   

두 번째, 이 영화의 검열사례는 유엔군으로 표상되는 이른바 자유우방을 어떻게 재현해야 하느냐의 문제에 있어서 일종의 기준점을 제시했다. 일찍이 <피아골>을 둘러싼 논란이 한국영화에서 공산주의자와 관련한 재현의 한계를 획정지은 바 있었다. 냉전체제가 피아(彼我)의 적대적 관계로 구조화되어 있고 영화를 비롯한 시청각 미디어들이 이와 같은 적대적 관계를 구축하고 공고화하기 위한 심리전의 도구로 동원되어왔다는 사실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 이같은 냉전체제 하에서 상대편(공산주의자)과 우리 편(자유우방)의 재현은 동전의 양면과도 같은 관계를 맺고 있다고 말할 수 있다. <피아골>이나 <7인의 여포로> 등의 사례를 통해서, 한국의 영화검열이 공산주의(자)의 재현 문제를 어떻게 다뤄왔는지는 비교적 자주 거론되었던 반면에 그와 짝을 이룬다고 할 수 있을 ‘자유우방’의 재현에서 표현의 한계가 어떻게 구성되었는가 하는 문제는 크게 주목받은 적이 없었다. 영화 <철조망>의 검열사례는 한국영화 역사상 처음으로 자유우방의 재현 문제를 시험대에 올렸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
 
물론 <철조망>이 한국영화에서 자유우방을 재현한 최초의 영화는 아니다. 1950년대 중반에 제작된 한국전쟁 관련 영화들에서 미군을 중심으로 한 유엔군은 한국군의 이른바 ‘혈맹’으로서, 또는 구원자로서 재현되곤 했다. <자유부인>을 비롯한 1950년대 후반의 멜로드라마들에서는 미국의 문화적 영향력이 젠더의 문제와 결합되면서 부정적인 양상으로 재현되었다. 요컨대 1950년대에 미국을 비롯한 자유우방은 정치, 군사적 측면에서는 긍정적으로, 문화적으로는(또는 풍속의 차원에서는) 부정적으로 재현되는 것이 대체적인 경향이었다. 

1950년대에는 <지옥화>처럼 기지촌과 양공주를 전면에 내세운 영화조차도 검열에서 별다른 제재를 받았다는 기록은 발견되지 않는데, 양공주와 미군 장면을 대폭 삭제한 <오발탄>(1961)의 검열사례가 보여주는 것처럼 1960년대 들어와서 이와 같은 양상은 크게 변화한다. 영화 <철조망>은 <오발탄>보다 앞서 양공주와 유엔군(미군)의 장면이 문제가 되었던 영화로서 그와 같은 변화의 시작 지점에 위치한 셈이었다. 

<철조망>과 <오발탄>의 검열과 더불어, 1960년대 한국전쟁 영화의 전환은 이후 한국영화에서 자유우방의 재현에 근본적 변화를 가져왔다. <5인의 해병>으로 시작되고 <돌아오지 않는 해병>으로 정점을 찍은 1960년대의 한국전쟁 영화에서 유엔군의 존재감은 현저히 약화되는 대신 민족주의적 남성 영웅으로서의 한국 군인이 전쟁 수행의 주체로서 위치지어졌다. 이는 일차적으로는 박정희 정권의 등장을 전후해서 강화된 사회 전반의 (군사주의와 결합한) 민족주의적 분위기와 관련된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한국전쟁 영화에서 유엔군의 존재가 사라지거나 약화되었기 때문에, 자유우방의 재현이 전면화될 수 있는 무대 또한 축소되었다. 박정희정권이 검열을 명문화한 영화법을 제정(1962)하고 검열시행세칙에서 “국제 간의 우의를 손상시킬 우려가 있는 영화”를 금한다는 것을 명시하기는 했지만, 1960년대 이후 미국을 비롯한 자유우방은 정치적, 군사적인 측면에서는 대체로 비가시적인 존재였다. 영화 <철조망>의 검열사례는, 그것이 긍정적이든 부정적이든 간에, 해방 이후 한반도에 미친 미국(과 서방진영)의 강력한 영향력이 가시화되는 것을 회피하고자 하는 1960년대 한국영화의 재현 방향을 지시하고 있다.

영화 <철조망> 검열의 쟁점과 자유우방의 형상화 문제

사실 <철조망>은 거제도 포로수용소의 상황을 전면적으로 다루고 있다는 점에서부터 이미 문제적이었다. 포로수용소를 공간적 배경으로 삼았을 때, 한국인은 모두(그들이 공산주의자건 반공주의자건 간에) 유엔군(미군)의 관리 아래 놓인 포로로서만 재현될 것이기 때문이다. 반공포로들의 능동성을 아무리 강조한다 하더라도, 한국전쟁 당시 한국인들이 처한 근본적인 존재조건을 부인하기는 어려웠다. 영화는 중립 포로인 신도람 깡(주선태 분)의 대사(“뚜렷이 내 나라 땅이면서도 외국사람이 감시하는 이 철조망 속에서 이렇게 또 같이 우리들이 싸우고 죽어야 하니”[S#3])를 통해서 바로 그와 같은 인식을 분명히 드러낸다.
 
또 한편으로 영화에서 치열한 반공투쟁으로 형상화되었던 포로수용소 내의 유혈폭력사태는, 사실상 유엔의 수용소 관리가 근본적으로 실패했음을 보여주는 것이기도 했다. 실제로 그와 같은 폭력사태를 두고 국제적인 비판여론이 비등했음을 감안했을 때 검열관들이 특히 이 문제에 예민하게 반응했던 것은 이해할 만한 일이다. 법무부는 “그와 같은 무질서한 관리는 국제신의를 손상시킬 우려가 있”다고, 외무부는 “우방 및 유엔군과의 우호관계에 자미롭지 못한 점이 있다”고 지적하고 있다. 

하지만 더욱 근본적인 문제는 전쟁 포로의 송환이 냉전체제의 이분법적 대립구도로 모두 수렴될 수 없는 매우 복잡한 쟁점이었다는 사실에 있다. 포로 송환에 있어서 본인의 의사를 존중한다는 제네바협정에 따라 공산주의에 대한 신념을 유지했던 ‘적색 포로’와 남한에 남기를 희망하는 ‘백색 포로’를 구분하는 일종의 사상검증이 이루어졌으며, 그 과정에서 가혹한 고문과 (전향의) 강요, 그리고 적색, 백색 포로 간의 유혈폭력사태가 벌어졌다. 반공영화를 표방했던 <철조망>은 백색 포로와 적색 포로를 각각 선과 악을 표상하는 것으로 그리고 양자 간의 폭력사태를 공산세력에 맞서는 반공포로들의 투쟁으로 위치짓고자 했지만, 한국전쟁에서 포로 송환이라는 쟁점은 그와 같은 이분법적 구도로 포섭되지 않는 미묘한 지점들을 갖고 있었다.
 
첫째, 이승만정권은 포로 송환 문제를, 공산세력과의 협상을 통해 해결하고자 하는 유엔(미국)의 방침에 불만을 품고 있었고 결국에는 일방적으로 백색 포로를 석방함으로써 국제사회의 비난을 초래했다. 이승만이 백색 포로의 석방을 지시하는 <철조망>의 마지막 부분이 대폭 삭제된 것은 이와 관련되어 있는데, 이는 당시 이승만의 독단적인 반공포로 석방이 국제사회에 던진 파문을 축소하고 그같은 이승만의 결정을 정당화하기 위한 것이다. 제작자는 영화의 마지막을 “석방되는 포로들의 화면에 장엄한 배달민족을 상징하는 태극기”를 겹쳐놓은 화면에 대통령이 “단신 책임을 지시고 애국 방공포로를 석방하는 용단”을 내렸다는 보이스오버 내레이션을 삽입하는 것으로 바꿨다. <철조망>이 다루는 포로송환 문제는 ‘혈맹’이어야 할 자유우방과 한국 사이에 심각한 균열이 있음을 드러내는 것이었고, 검열관들은 그와 같은 균열이 어떤 형태로든 가시화되는 것을 금하고자 했다.

또 한편으로 한때 공산주의에 부역했으나 이제는 자유 대한의 품으로 돌아오는 이들(반공포로) 위에 태극기를 겹쳐놓는 결말은, 일찌기 <피아골>이 취했던 해법을 가져온 것이었다. 보도연맹원의 대량학살이나 전쟁 기간 중의 부역전력자들에 대한 가혹한 처사에서 보듯이, 대한민국은 한때 공산주의를 위해 복무했던 이들(그것이 자의건 타의건 간에)을 쉽게 받아들이지 않았다. 끊임없는 의심과 사상검증, 부역 전력자들에 대한 물리적 폭력과 협박이 횡행하던 한국사회에서, “자유 대한의 품으로 돌아온 이들”의 진정성에 한 치의 의심도 깃들지 않도록 재현할 것이 요구되었다. 돌아오는 이들과 태극기 이미지의 중첩은 검열제도가 만들어낸 일종의 클리셰로서, 사상검증에 대한 한국사회의 히스테리컬한 반응을 반영한 것이었다. 

둘째는 본인의 의사에 따른 송환이라는 원칙이 북한 또는 공산주의를 가능한 ‘선택지’로 제시할 수 있다는 사실과 관련된다. 북한을 조국으로 선택한 적색 포로들은 거제도 포로수용소 내부에 인공기를 게양하고 일종의 해방구를 구축하는데, 영화의 서사적 장치들이 그것에 정당성을 부여하지 않는다 할지라도, 인공기가 펄럭이고 적색 포로들의 역사인식과 공산주의에 대한 신념이 대사로써 피력되는 것은 허용되기 어려웠다. 1960년 4월 19일자 국방부의 검열의견서는 이 점을 분명하게 지적하고 있으며, 제작자는 국방부의 의견에 따라 인공기가 나오는 화면을 전면 삭제하고 강삼수를 비롯한 적색 포로들의 대사를 대폭 삭제했다. 선택의 가능성이라는 문제는 또한 중립적인 위치를 고수하는 포로의 존재를 통해서 더욱 부각된다. 1950년대 중반부터 불기 시작한 제3세계 비동맹 운동의 바람이 한국에도 상륙했고 4월혁명의 분위기 아래서 동서 진영 어디에도 속하지 않는 중립 노선이 가능한 선택지로서 거론되기 시작했다. 요컨대 본인 의사에 따른 포로 송환이라는 문제는 동과 서, 또는 이도저도 아닌 제3지대가 선택 가능한 것이라는 생각을 형상화하는 계기가 될 수 있었다는 것이다. 4월혁명의 자장 안에 놓인 최인훈의 소설 <광장>(1961)에서 포로가 된 주인공 명준이 남과 북 어느 쪽도 아닌 중립국 인도를 선택하는 것은 이를 잘 보여준다. <철조망>은 적색, 백색 포로 외에 중립 포로의 존재를 상정함으로써 이와 같은 당시의 흐름을 반명하고 있지만 중립 포로로 설정된 “신도람 깡”(주선태 분)의 형상화가 제대로 이루어졌다고는 볼 수 없다. 영화 초반부에 그는 “이런 병신같은 새끼들. 인공기는 뭐구 태극기는 뭐냔 말야. 아 그렇게 말을 해도 모르겠니? 응? 여기 붓들려온 뜻을 아직도 모르느냔 말야. 패전해서 붓잡혀온 못난 쌔끼들이 무슨 국기 투쟁이냔 말야 응”(S#3)같은 대사를 통해 자신의 입지를 분명히 드러내지만 S#53 이후에 갑자기 영화에서 사라진다. 이것이 단순히 형상화의 실패인지, 아니면 다른 힘이 작용한 결과인지는 남아 있는 서류와 녹음대본만으로는 단언하기 어렵다. 
   
영화 <철조망> 검열서류의 구성

영화 <철조망>의 검열서류는 크게 세 묶음으로 나눌 수 있다.

첫째는 1960년 3월 29일자 상영허가 신청서에서부터 문교부의 주관으로 국방부, 법무부, 외무부, 공보실, 내무부의 관계자들이 참석한 1차 검열시사(4월 15일) 및 김은우(아시아영화제 심사위원 및 이화여대 교수), 유호(경향신문사 문화부장), 원경수(연합신문사 기획국장), 성인기(조선일보사 부사장), 천관우(한국일보사 논설위원), 권순영(서울지방법원 소년부 지원장) 등 민간인들을 중심으로 한 검열위원회의 2차 검열시사(5월 7일)를 거친 후에 최종 상영불허가 판정을 내리기(5월 9일)까지의 과정을 담은 서류이다.

제작사인 홍기영화사에서는 최초의 상영허가 신청서를 제출한 이후에 영화를 자진 개작하고 상영허가를 재신청했다. 그 과정에서의 서류는 일부만 남아 있는데, 3월 29일에서 4월 5일 사이에 검열의 주무부처인 문교부와 제작사 사이에서 모종의 조율이 있었을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이 때 자진 개작한 부분이 어떤 것이었는지는 남아 있는 서류를 통해서는 알 수 없다. 정부 각 부처의 관계자들에 의한 1차 검열시사와 민간 위원들에 의한 2차 검열시사가 이루어졌던 것은 이례적이다. 이는 4월혁명과 그 여파로 인한 사회적 분위기 때문인 듯한데, 민간의 검열위원들 또한 상영 불허가 의견을 견지했다. 4월혁명 이후 풍속 차원에서의 검열은 상당히 완화되었으나, 사상검열의 기준은 여전히 강고하게 존속하고 있었음을 이를 통해 알 수 있다.

둘째, 5월 9일자 공문서(문화 제1540호 “국산영화 <철조망> 상영 불허가의 건”)에서 지적된 사항을 토대로 홍기영화사 대표 이봉근은 영화를 대폭 수정하여 5월 11일에 재검열을 신청한다. 이에 문교부는 2차 검열시사에 참석했던 6인을 재차 검열위원에 위촉했다.(“검열위원 위촉의 건”, 1960년 5월 17일) 하지만 어찌된 일인지 5월 18일에 실시된 검열시사에 참여한 민간 검열위원은 원경수, 권순영 두 사람 뿐이며, 그 외 문교부 관료인 변시민(문화국장), 유성열(예술과장) 두 사람이 배석했다. 재검열 결과 총 7개 처의 화면 및 대사를 삭제할 것을 조건으로 상영이 허가되었다.(문화 제1540호, “국산영화 <철조망> 상영허가의 건”, 1960년 5월 19일) 7개 처 가운데 6개 처가 이승만 대통령의 반공포로 석방 지시를 다루는 영화의 결말 부분(S#126~137)에 해당하는 것으로, 제작자는 이 부분을 통째로 들어내는 대대적인 수정을 했다. 

셋째는, 개봉 이후에 이봉근으로부터 홍기영화사의 대표직을 물려받은 정병준이 16mm 판본으로 <철조망>의 흥행을 하기 위해 복사판의 상영허가를 신청했던 1962년의 서류들이다. (“국산영화복사판 상영허가 신청서”) 당시에는 35mm 판본으로 극장 개봉을 마친 후에 16mm로 복사판을 만들어 흥행하는 것이 일종의 관행이었으며, 이 시기 영화들의 검열서류들 상당수는 16mm 판본의 상영허가서 관련 서류를 포함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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