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우 구봉서

by.박선영(고려대학교) 2018-04-02
구봉서는 1945년 악극단의 악사이자 배우로 연예계 생활을 시작했다. 이후 반세기가 넘는 긴 시간 동안 라디오, 영화, 텔레비전에서 활약하면서 코미디의 전성기를 이끌었던, 삶 자체가 한국 코미디의 역사였던 우리 시대 최고의 코미디언이다. 
 
구봉서 프로필 사진
   
구봉서는 1945년 태평양악극단에서 데뷔하는데, 임시 악사였던 구봉서는 김대봉의 대역으로 코미디 배우의 길에 들어선다. 훤칠한 외모와 능청스러운 말솜씨로 코미디와 쇼 무대에서 사랑을 받았던 구봉서는 악극단에서 눈에 띄는 스타로 성장하게 된다. 전쟁기 구봉서는 종군연예인으로 약 5년간 활동했으며 같은 시기 라디오 방송에도 진출하여 홀쭉이 양석천과 함께 <홀쭉이와 길쭉이> 등의 프로그램과 대북방송을 진행했다. 1956년 문화성 감독의 <애정파도>로 영화계에 데뷔할 때, 구봉서는 이미 포스터 한쪽에 코믹한 장면을 연기하는 모습이 들어갈 정도로 잘 알려진 스타였다.
 
<애정파도>(문화성, 1956) 포스터
(사진2) <애정파도>(문하성, 1956) 포스터. 오른쪽 아래 코믹한 포즈를 취하고 있는 구봉서와 박옥초
 
   구봉서를 명실상부한 코미디 스타 반열에 올려놓은 것은 권영순 감독의 <오부자>(1958)였다.  이 영화에서 그는 이종철과 복혜숙 부부의 아들 넷(양훈, 양석천, 김희갑, 구봉서) 중 막내로 출연, 연애담을 중심으로 하는 노래와 코미디를 선보였다.

<오부자>(권영순, 1960) 포스터
(사진3) <오부자>(권영순, 1958) 포스터. 왼쪽부터 구봉서, 양석천, 이종철, 양훈, 김희갑.
아버지 이종철과 네 형제 영웅호걸의 이야기 중 구봉서는 ‘막둥이’ ‘걸’ 역할을 맡았다.
포스터 상단에 '뮈직칼 코메듸' 라는 장르명칭이 부각되어 있다.

이 영화는 당시 개봉관인 국도극장의 입장수익만으로도 제작비를 다 충당할 정도로 큰 인기를 얻었으며, 이 영화의 성공은 코미디영화 제작의 활성화라는 산업적 반향을 일으키기도 했다. 그리고 구봉서는 이 영화를 통해 '막둥이'라는, 평생을 따라다닌 애칭을 얻게 되었다.
 
<오부자>(권영순, 1958)의 한장면-1
(사진 4) <오부자>(권영순, 1958)의 한 장면. 상사병으로 앓아누운 호(김희갑)를 진찰하러 온 의사와 그를 둘러싼 가족들.
왼쪽부터 어머니 역할의 복혜숙, 걸(구봉서), 웅(양석천), 아버지(이종철), 영(양훈)

<오부자>(권영순, 1958)의 한장면-1

(사진 5) <오부자>(권영순, 1958)의 한 장면. 구봉서와 상대역 최지희
 
이후, 1970년대까지 다수의 영화에서 주조연으로 출연하면서 대표적인 코미디 배우로 자리매김하게 되었다. 구봉서는 1970년대 초반까지 약 400여 편의 영화에 출연했으며, 특히 1950년대 후반부터 1960년대 후반까지 이어지는 코미디영화 열풍의 중심에 서 있었다. 그는 <백만장자가 되면>(정일택, 1959), <구봉서의 벼락부자>(김수용, 1961), <이거 됩니까 이거 안됩니다>(박종호, 1964), <단벌신사>(김기풍, 1968), <남자식모>(심우섭, 1968), <남자 미용사>(심우섭, 1968)와 같은 원톱 영화들에서 뿐 아니라
 
<단벌신사>(김기풍, 1968)의 포스터
<단벌신사>(김기풍, 1968)의 한 장면
(사진 6) (사진 7) <단벌신사>(김기풍, 1968) 포스터(위)와 <단벌신사>(김기풍, 1968)의 한 장면(아래).
복권이 든 양복을 찾아 좌충우돌하던 구봉서와 서영춘이 우연히 쇼단체의 무대 위에 서게 되었다.

<서울의 지붕밑>(이형표, 1961), <성춘향>(신상옥, 1961), <맹진사댁 경사>(이용민, 1962), <또순이>(박상호, 1963), <돌아오지 않는 해병>(이만희, 1963)과 같은 영화에서도 비중 있는 조연으로 확실히 존재감을 드러내는 배우였다.

<성춘향>(신상옥, 1961)의 한 장면
(사진 8) <성춘향>(신상옥, 1961)의 한 장면. 춘향을 잡으러 가는 포졸 역할의 김희갑(좌)과 구봉서

<돌아오지 않는 해병>(이만희, 1963)의 한 장면
(사진 9) <돌아오지 않는 해병>(이만희, 1963)의 한 장면. 부대의 막걸리 회식 장면에서 좌중을 즐겁게 하는 구일병 역할의 구봉서

그런가하면, <수학여행>(유현목, 1969)처럼 코미디가 아닌 영화의 주연으로서도 훌륭한 연기를 선보였다. 
 
<수학여행>(유현목, 1969) 포스터
(사진 10) <수학여행>(유현목, 1969) 포스터. 구봉서와 문희. 구봉서는 낙도의 어린이들을 데리고 서울로 수학여행을 간 선생님의 역할을 맡았다.
이 영화는 제4회 테헤란국제아동영화제 그랑프리 및 심사위원특별상을 수상했다.

양석천과 양훈이 1950년대 후반 가장 먼저 영화계를 석권했던 코미디 배우였다면, 구봉서는 가장 긴 시간, 가장 많은 코미디영화에서 주연을 도맡았던 경우라 할 수 있다. 양석천과 양훈이 1950년대 이후 주연으로 출연한 영화가 거의 없다는 사실이나 김희갑이 더 많은 영화에 출연했으나 단독 주연을 맡았던 작품보다는 공동 주연이거나 비중 있는 주연급 조연을 맡은 경우가 더 많았다는 것과 비교해 볼 때, 구봉서는 비슷한 시기에 영화로 옮겨왔던 악극단 스타들 중에서도 10년 넘게 주연 배우로 활약한 드문 경우였다. 
1950년대 후반은 구봉서가 악극단에서 영화계로 활동 범위를 넓혀가던 시기로, 이 시기에 제작된 코미디 영화에서 구봉서는 단독 주연보다, 공동주연 혹은 비중 있는 조연의 역할을 맡으면서 내러티브의 중심인물을 보조하는 역할을 담당하는 경우가 많았기 때문에, 실제로 구봉서 코미디의 특성을 더 잘 보여주는 것은 1960년대 후반 코미디라고 볼 수 있다. 1950년대로 유효시기가 다한 양석천, 양훈의 코미디와 달리 1960년대까지, 그리고 영화를 넘어 텔레비전으로 영향력을 확대했던 1970년대와 80년대까지 구봉서의 코미디는 일정한 경향을 띠고 지속되었다. 이 글은 구봉서 코미디의 '일정한 경향'을 하나의 “'장르'로서의 구봉서 코미디”가 갖는 특성으로 규정하고자 한다. 이는 첫째, 내러티브적으로는 ‘취업’과 ‘결혼’이라는 지상과제를 해결하는 구성을 띤다는 점, 둘째, 내용적으로는 ‘명랑’하고 ‘건전’한 중산층의 윤리를 대변한다는 점으로 요약될 수 있을 것이다.   

취업과 결혼이라는 지상과제

먼저, 1950년대 후반 출연작들에서 구봉서가 맡은 역할은 크게 세 가지로 분류해볼 수 있다. 첫째, <오부자>(권영순, 1958)나 <오형제>(김화랑, 1960), <구혼결사대>(김수용, 1959) 등 다중주연 영화에서 공동주연을 맡아 좌충우돌하다가 제 각기 연애에 성공하는 '막둥이' 캐릭터. 이때, 연애서사는 공동주연을 맡은 인물들 각자에게 가장 중요한, 그리고 유일한 내러티브가 된다. 영화의 엔딩은 합동결혼식이나 그에 준하는 장면으로 마무리된다. 둘째, <삼인의 신부>(김수용, 1959), <청춘배달>(김수용, 1959), <부전자전>(강대진, 1959), <복도 많지 뭐유>(백호빈, 1959) 등도 다중주연 영화에 속하지만, 주인공들은 시골에서 상경하여(혹은 실직 상태에서) 사랑과 취업 두 가지를 모두 추구하는 인물로 그려진다. 여기서는 연애서사와 취업을 위한 노력 두 가지가 주요 내러티브 사건이 되며, 첫 번째 경우와 마찬가지로 합동결혼이나 그에 준하는 장면이 엔딩으로 제시된다. 마지막으로 <공처가>(김수용, 1958)에서의 곰탕집 사위이자 아내에게 꼼짝 못하는 캐릭터처럼, 평범한 일상을 살고 있는 생활인으로 등장하는 경우가 있다. 이 유형에서 구봉서는 주연보다 조연에 가까운 역할을 맡았으며, 1950년대 코미디보다는 타 장르의 영화나 1960년대 이후의 코미디에서 더 많이 찾아볼 수 있는 유형이라 하겠다.
 
<복도 많지 뭐유>(백호빈, 1959) 포스터
(사진 11) <복도 많지 뭐유>(백호빈, 1959) 포스터. 좌측부터 김희갑, 주선태, 구봉서

이상의 분류에서 첫 번째와 두 번째, 즉 구봉서가 주연배우로 등장하는 코미디영화로 대상을 한정해서 구봉서 코미디의 특징을 살펴보자. 양석천, 양훈 코미디가 뒤죽박죽 얽히고설킨 내러티브 속에서 그 혼돈과 해결 불가능성을 즐기는 것이라고 할 때, 구봉서가 등장하는 코미디들은 연애 혹은 연애와 취업이 주 해결과제로 주어지고, 여러 가지 어려움을 헤쳐 나가는 과정에서 그것(들)에 성공하는 내러티브 구성을 보여준다. 준수한 외모 덕에 구봉서가 주연으로 등장하는 영화는 로맨틱한 요소들을 띠는 연애서사가 전면에 배치되었고, "건전하고 명랑한 소시민"이라는 페르소나에 힘입어 그의 캐릭터들은 '취업'과 '결혼'을 통해 주류 사회로 진입하는 지상과제에 집중했던 것이다. 보다 강렬하고 스펙터클한 코미디를 보여주던 양석천과 양훈이 빠른 속도로 소비되어 가는 동안, 1950년대 출연작들에서 구봉서는 거의 3인~5인의 주인공 중 한 사람 몫을 담당하는 정도에 머무르면서 꾸준히 필모그래피를 늘렸다. 이 시기부터 비교적 일관성을 가지고 다루었던 연애와 취업이라는 두 가지 모티프와 그것을 이루어가는 내러티브 구성은 1960년대까지 이어지면서 구봉서 코미디 내러티브의 핵심적인 구성요소가 되었다.  
1960년대 초반, 양석천이 실연무대에 전력을 다하고 양훈이 사업 실패와 이혼 등의 개인적인 문제들로 영화출연이 뜸해진 동안, 구봉서와 김희갑은 최고의 주가를 올리는 코미디 배우로 입지를 굳혔다. 특히 구봉서는 라디오 방송을 통해서 더욱 친숙한 대중스타가 되었는데, 그가 매일 아침 8시 고정으로 진행하던 동아방송의 라디오 프로그램 <안녕하십니까>는 '건전한 소시민'의 시각에서 사회를 풍자하는 것이었다. 영화 외의 대중매체들- 라디오와 텔레비전, 신문 등-을 통해 굳혀지고 다시 영화와 피드백을 주고받으며 강화되었던 구봉서의 '건전하고 상식적인 생활인'으로서의 스타 페르소나는 구봉서의 인지도를 높이는 데 일조했으며, 1960년대 초반에는 "한국에서 가장 바쁜 사나이"(《동아일보》, 1963. 10. 15.)라는 타이틀을 얻기에 이르렀다. 그리고 <구봉서의 벼락부자>(김수용, 1961), <구봉서의 인생출발>, <이거 됩니까 이거 안 됩니다>(박종호, 1964)와 같이 아예 구봉서의 스타성을 전면에 내세운 영화들을 비롯하여, <사장 딸은 올드미쓰>(김응천, 1963), <남자는 안 팔려>(임권택, 1963), <죽자니 청춘 살자니 고생>(권철휘, 1964) 등 흥행작의 성공을 이끌면서 구봉서는 1960년대 전반기 동안 단독 주연이 가능한 코미디 배우로서 가능성을 입증하게 하게 되었다.
 
<사장 딸은 올드미쓰>(김응천, 1963) 포스터
(사진12) <사장 딸은 올드미쓰>(김응천, 1963) 포스터.
구봉서와 상대역 방성자가 가장 크게 자리하고, 왼쪽은 곽규석과 남미리, 아래 좌측부터 양훈과 황정순, 주선태과 백금녀, 독고성과 주란지


<남자는 안 팔려>(임권택, 1963) 신문광고
(사진 13) <남자는 안 팔려>(임권택, 1963) 신문광고. 여장을 한 구봉서(우)와 이대엽(좌)

<호랑이 꼬리를 밟은 사나이>(이강원, 1963)처럼 스릴러코미디를 표방한 영화, <구봉서의 벼락부자>나 <이거 됩니까 이거 안 됩니다>처럼 사회풍자의 성격이 가미된 영화 등 1960년대 초반에는 코미디형식의 다양한 변화를 꾀한 작품들도 시도되었다.

<구봉서의 벼락부자>(김수용, 1961)의 한장면
(사진 14) <구봉서의 벼락부자>(김수용, 1961) 샐러리맨 구봉서와 직장 상사 양훈(우).
구봉서의 두 번째 주연작으로 구봉서는 이 영화에서 한국전쟁 때 목숨을 구해줬던 미국인의 유산을 받아 벼락부자가 된 샐러리맨으로 출연했다.

<이거 됩니까 이거 안됩니다>(박종호, 1964)의 신문광고
(사진 15) <이거 됩니까 이거 안됩니다>(박종호, 1964)의 신문광고.
구봉서가 진행했던 라디오프로그램의 유행어 ‘이거 됩니까 이거 안됩니다’를 제명으로 한 풍자 영화

그러나 무엇보다 구봉서가 코미디영화의 전성기를 이끌기 시작했던 것은 심우섭 감독과 만나 본격적인 '구봉서식 코미디'를 꽃피우기 시작한 1960년대 후반이었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남자 시리즈와 팔푼이 시리즈 등 인기 출연작들에서 구봉서는 1950년대 코미디에서 본인이 가지고 있던 캐릭터와 서사를 유지한다. 즉, 이 영화 속에서 구봉서는 여전히 시골에서 갓 상경하거나 실직을 함으로써 직업을 구해야 하는 처지에 놓여 있으며, 그 과정에서 진정한 사랑을 만나게 되는 내러티브 사건을 겪는다. 그리고 여러 가지 소동에 휘말리거나 스스로 소동을 벌이면서, 그 속에서 홀로 중심을 잡고 여타 등장인물들에게 훈계를 하는 역할을 담당했다. 예컨대, <남자와 기생>(심우섭, 1969)에서 그(태호)는 여성스러운 성격 탓에 직장에서 해고당하고 여동생을 뒷바라지하기 위해 기생 산월이로 변장하는데, 산월이는 요릿집에서 만난 기생 정미를 보호하며 자신에게 반한 옛 상사 허사장을 골탕 먹인다. 태호는 정미에게는 '희망을 가지고 살 것'과 허사장에게는 '가정에 충실할 것', 허사장의 부인에게는 '남편에게 서비스를 잘 해서 기생집에 가지 않도록 할 것'을 주문한다. 그리고 정미와 로맨스를 이루면서 자신의 남성성을 회복한다.

<남자 식모>(심우섭, 1968) 포스터
(사진 16) <남자 식모>(심우섭, 1968) 포스터. 구봉서의 ‘남자 시리즈’ 중 첫 번째 영화.
이 영화의 성공으로 남자 시리즈가 연달아 두 편 더 제작되었다.


<남자와 기생>(심우섭, 1969)포스터
(사진17) <남자와 기생>(심우섭, 1969)포스터. 원제는 <남자기생>이었으나 경박하다는 검열관의 지적에 의해 ‘남자와 기생’으로 제명이 변경되었다.
현재 남아 있는 필름에는 변경된 제명이 반영되어 있으나 포스터는 원제 그대로 남아있다.


<남자 미용사>(심우섭, 1968) 신문광고
(사진 18) <남자 미용사>(심우섭, 1968) 신문광고. ‘블란서’ 유학을 마친 유명 미용사 ‘앙드레’로 변장한 구봉서가 주연을 맡았다.
 
실직 이후 "장난"으로 시작했던 기생 일을 하며 허사장을 비롯한 남성들의 허위의식과 바람기를 꼬집고, 사랑하는 여인을 만나 자신의 남성성을 회복하게 된 태호는 로맨스의 완성과 취업 문제를 동시에 해결하게 된다. 엔딩 신에서 태호의 여동생 태숙은 허사장의 아들과 결혼을 하게 되고, 태호는 허사장의 회사에 과장으로 진급하여 재취업하게 되며 정미와의 사랑도 이루게 된 것이다. 
한편, <팔푼이 사위>(심우섭, 1968)에서 구봉서(구만복)는 시골에서 올라와 직장을 구하던 중, 부잣집 사위로 '취직'하게 된다. 연애결혼을 했으나 '잘난' 첫째 사위의 외도로 부부간 불화가 잦을 날 없던 첫째 딸 내외 때문에 다소 바보스럽더라도 진실한 사위를 구하겠다고 결심한 장인 덕에, 구만복은 부잣집 둘째 딸과 결혼하게 된다. 서울의 근대적이고 서구화된 생활방식에 적응하지 못한 그가 벌이는 소동을 코믹하게 그려내던 영화는, 오히려 그가 기지를 발휘하여 난봉꾼-악처인 큰 딸 내외를 '고치고', 마지막으로 허영심 많고 남편을 깔보던 둘째 딸의 '버릇을 고침'으로써, 화목한 가정을 만들어낸다는 이야기를 다루고 있다.

<팔푼이 사위>(심우섭, 1968)의 한 장면
(사진 19) <팔푼이 사위>(심우섭, 1968)의 한 장면. 우연히 부잣집 사위로 ‘취직’하게 된 구봉서의 ‘팔푼이’ 웃음

이렇게 볼 때, 1960년대 후반 구봉서의 코미디영화들은 1950년대 구봉서 주연 코미디 서사의 확대, 재생산이라는 관점에서 논의될 수 있다. 즉, 1950년대 후반에 30대 초중반의 나이였던 구봉서는 근대화의 물결과 이촌향도 현상으로 서울에 떠밀려 와 하숙집을 전전하며 직업을 구해야 하거나(<삼인의 형제>, <청춘배달>), 혹은 이미 직업이 있더라도 황당무계한 직장(<오형제>에서 잠자리 날개 기름과 달팽이 이빨 가루로 만든 미래 우주식품을 연구하는 무역상사)을 가진 주인공이었다. 이 영화들 속에서 구봉서(와 친구/형제들)는 꿈에도 그리던 여성을 만나거나(<구혼결사대>), 이미 있었던 애인과 결혼에 성공하거나(<오형제>), 새로운 애인을 만드는(<삼인의 신부>, <청춘배달>, <부전자전>) 등 '연애와 결혼'의 서사 중심에 놓인다. 연애와 결혼을 통해 그(들)은 부모님의 소원을 이뤄드리기도 하고(<삼인의 신부>, <오형제>), 진실한 사랑을 깨닫고 새 출발을 다짐(<청춘배달>, <부전자전>, <구혼결사대>)하기도 하면서, 합동결혼식 혹은 결혼약속을 통해 중산층-가부장제 사회로 진입하게 됨을 시사한다.

<부전자전>(강대진, 1959) 포스터
(사진 20) <부전자전>(강대진, 1959) 포스터. 아버지 역의 김희갑과 구봉서(위), 걸인 친구 역할의 양석천과 양훈(아래)

10년의 시차를 두고 제작된 1960년대 후반, 이제는 40대 초중반이 된 구봉서의 코미디영화들은 여전히 도시로 밀려왔거나 실직을 당함으로써, 다시 구직을 해야 하는 상황에 이른다. 이번에는 여동생의 뒷바라지(<남자기생>), 남동생의 실험비용 마련(<남자식모>), 고향 개간(<남자 미용사>) 등 가족을 위해서 취직을 해야 하는 좀 더 절체절명의 상황에 맞닥뜨리게 된 이들은 변장을 하거나(남자 시리즈) 결혼을 함(<팔푼이 사위>, <팔푼이 부부>)으로써 이 위기를 극복하고자 한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다시 진실한 사랑을 발견하게 되고, 자신의 능력과 남성성을 발전시켜 "번듯한" 직장을 구하게 됨으로써 중산층-가부장제 사회에 성공적으로 안착한다. 1950년대 코미디 속 구봉서가 시골에서 올라온 주인공(혹은 '덜' 근대화된 인물)을 맡아 구직과 연애 활동을 통해 근대 사회와 가부장제에 다가간다면, 1960년대 후반 코미디에서 구봉서는 이미 시작부터 가부장이었으며, 여러 가지 위기 속에서 가부장으로서의 면모를 더욱 굳건히 하게 되면서 위기에 놓인 이들을 통합하는 역할을 맡게 된다는 점에서 주제의식이 강화된 버전이라고 볼 수 있다.

<팔푼이 부부>(심우섭, 1969)의 한 장면
(사진21)  <팔푼이 부부>(심우섭, 1969)의 한 장면. 방성자와 구봉서.
<팔푼이 사위>의 성공에 힘입어 제작되었던 ‘팔푼이 시리즈’ 중 한 편인 ‘팔푼이 부부’

 
따라서 구봉서 코미디의 가장 큰 특징은 취업과 결혼이라는 지상과제를 수행하고, 성공하는 주인공을 보여줌으로써 '질서'를 잡고 '통합'하는 내러티브를 제시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구봉서의 페르소나와 외형적 특징(준수한 외모, 정확한 표준어를 구사하는 저급하지 않은 화법, 그와 어울리지 않는 가느다란 목소리 등)은 이러한 내러티브에 적합한 캐릭터를 구현하였으며, 이는 영화 외의 매체를 통해 구성된 구봉서의 스타성과 상호작용한 결과였다고 볼 수 있다. 

건전한 중산층의 "명랑한 윤리"

1962년 10월 9일 《경향신문》에 '공처가 클럽'이 '홈 서비스 데이'를 맞이하여 야유회에 나섰다는 기사가 실렸다. "우리 집은 걱정 없어요"라고 말하는 영화인 가정의 대표로, 공처가 클럽의 회원인 황해, 구봉서, 곽규석, 신영균이 부인, 자녀와 함께 동반 나들이한 것을 기사화한 것이다. "가정에서는 아이들에게 자신이 출연한 코메디를 못 보게 하는 엄한 아버지"이자 "아내에게는 자상한" 구봉서의 면면은 "건전하고 명랑한 가정생활"을 하는 평범한 가장의 이미지로 신문지상에 종종 소개되곤 했다. 당시 인기 배우들의 스캔들이 신문에 적나라하게 소개되고 이에 대한 각 사회 인사들과 신문독자, 관객들의 논평이 이어지는 가운데, 구봉서를 '명랑가정'을 이루고 있는 대표적인 스타로 거론한 이 기사는 "명랑하고 건전한 소시민"이라는 그의 스타 페르소나에 잘 들어맞는 기획이었다.
이런 페르소나에 알맞게 취업과 결혼이라는 지상과제를 성공적으로 완수해 내는 결말로 수렴되어 가는 구봉서 코미디는 '질서'와 '통합'을 이뤄낸다. 구봉서의 캐릭터들은 전도된 남녀관계를 회복하고, 파탄에 이른 가족관계를 복구하며, 허영심에 들뜬 여성들에게 일침을 가한다. 1950년대 코미디에서 이러한 경향이 암시적으로 드러나거나 내재해 있었다면, 1960년대 코미디에서는 훨씬 노골적인 대사들로 전달된다는 점에서 차이가 있지만, 구봉서 코미디가 추구하는 건전한 중산층의 "명랑한 윤리"라는 주제를 설파한다는 점에서는 일관성이 있다고 볼 수 있다.

<남자미용사>(심우섭, 1968)의 한 장면
(사진 22) <남자미용사>(심우섭, 1968)의 한 장면. 유학파 미용사 ‘앙드레’로 변장한 구봉서와 사장 최지희

<남자미용사>(심우섭, 1968)의 한 장면
 (사진23) <남자미용사>(심우섭, 1968)의 한 장면. ‘블란서’식 계란 마사지를 시술하는 구봉서

<남자미용사>(심우섭, 1968)의 한 장면
  (사진 24) <남자미용사>(심우섭, 1968)의 한 장면. ‘최신 유행하는 머리 스타일’을 만들고 있는 구봉서
 
이러한 내러티브와 주제 위에서 구봉서의 캐릭터는 무능력한 사회부적응자의 모습에서 과장된 남성의 능력과 우월함을 전시하는 방향으로 나아가며, 이 과정에서 자신의 우스꽝스러움을 극복하고 지배력을 회복하여 용기 있는 자아상을 구성하게 된다(Henry Jenkins,  구봉서 코미디의 장점은 무능력함을 드러내는 코믹한 장면들과 '취업'과 '연애'에서의 성공을 이끌어내는 이상적 자아 사이에서 균형을 맞추는 탁월함에 있다. 예를 들어 <남자와 기생>에서 구봉서(태호)는 지나친 여성성이 문제가 되어 직장에서 쫓겨나게 된다. 근무 시간에 용돈 벌이로 바느질이나 빨래를 대신 해 주다가 허사장에게 발각되어 실직을 하게 된 그는 우연히 여장을 하게 되고 기생으로 오해를 받게 된다. 그런데 오히려 기생 산월 노릇을 하면서 태호는 뭇 남성들을 훈계하고 남성으로서 자신의 정체성을 회복하게 되는 과정을 겪는다. 

#73 그 일실(밤)
많은 손님들이 교자상 앞에 길에 앉아 저마다 기생들을 끌어 안은 채 술을 마신다. (중략) 태호 가야금을 엉터리로 켜며 목청을 돋군다.

태호: 에헤야 에헤야 디야 어허랑 어허랑.. 모두들 내 노래가락 귀담아 들어라. 이 노래가락은 요즘 새로 유행되는 금주의 인기 베스트 원이다. 어허랑 어허랑 네놈들 돈 많다고 자랑하러 여기 왔다. 집에 가면 쌀도 없고 연탄도 없는 것들이 이런 곳에 와서는 돈을 물쓰듯 쓰는구나. 어허랑 어허랑 이 녀석들아. 냉수먹고 속 차려라. 여기서 쓸 돈이 있으면 자식 새끼들 운동화나 사 주고 고생하는 만누라의 속옷이나 사 입혀라. 어허랑 어허랑

급기야 춤을 춘다

태호: 한심하다 한심해. 네 놈들 때문에 우리들이 밥을 먹고 살지만 그러나 너희들은 정신을 차려 국가를 위해 무언가 일을 할 생각이나 해라. 어허랑 어허랑. 


이처럼 '건전하고 상식적'이면서 '명랑한' 페르소나를 갖는 구봉서라는 스타 코미디언은 코믹한 무능력함을 전시하는 영화 초반부에서 이상적 자아로 향하는 후반부로 가면서 항상 성공적으로 그 경계를 넘어섬으로써, 관객들의 응원 속에서 근대적 중산층 가부장제 사회의 주류로 편입하게 된다. 구봉서가 그려낸 세계는, '상식'과 '능력', 그리고 '건전한 정신'으로 신분의 사다리를 '수직상승'할 수 있는 이상화된 세계였던 셈이다. 
   
1962년 영화법 개정과 코미디영화에 대한 검열 및 제반 장르영화의 정착, 1960년대 초반에 유행했던 홈드라마의 영향, 그리고 '아버지의 법'을 등에 업은 채 진행되었던 사회적 억압의 기제는 대중영화의 주제에도 직간접적인 영향을 미쳐, 1960년대 후반으로 갈수록 반대급부로서의 '이상화된 세계'에 대한 열망은 커져갔다. 변장이나 가장을 통해 '비정상적'인 방식으로 생존해 내고자 했던 구봉서의 캐릭터들은, 그들의 '가부장'성과 그에 대한 열망으로 인해 '정상적'인 방식인 취업과 결혼을 통해 신분상승의 기회를 얻게 된다. 묘령의 여인이나 회사의 직원, 하숙집 딸과 같은 중산층 서민과 연애를 했던 1950년대의 구봉서는 1960년대에는 회사 사장의 딸과 연애를 하거나 사장의 사돈이 됨으로써, 명실상부한 '중산층'의 윤리를 획득하게 된다.
'정상성'과 '비정상성'이 구분되고 연애하는 상대의 사회적 계층을 인식하게 되며 '통합'이라는 주제가 강화되는 1960년대 코미디 속 구봉서는 1950년대 코미디 속 구봉서와 같은 내러티브 목표를 추구하지만, 좀 더 속악해지고, 좀 더 ‘질서 잡힌’, 억압적 세계 속의 '구봉서'가 된 것이다.

1960년대 후반, 구봉서코미디를 비롯한 코미디영화가 다수 제작되었던 시기는 어쩌면 스크린코미디 전성기를 마감하는 시기이기도 했다. 한국영화 검열이 한층 강화되던 흐름과 맞물려, 1969년에는 MBC TV 방송국이 개국했고, 텔레비전 수상기 보급이 활성화되면서 텔레비전은 급격히 영화의 자리를 대체하기 시작했다.

<당나귀무법자>(안일남, 1970) 포스터
(사진 25) <당나귀무법자>(안일남, 1970) 포스터. <셰인>을 비롯한 서부영화를 패러디한 영화

<삼인의 검은 표범>(김응천, 1971) 포스터
(사진 26) <삼인의 검은 표범>(김응천, 1971) 포스터. 세 시기의 영웅들을 다룬 옴니버스 영화. 서영춘, 허장강, 구봉서가 각각 주연을 맡았다.
 
<타잔 한국에 오다>(김화랑, 1971) 포스터
(사진 27) <타잔 한국에 오다>(김화랑, 1971) 포스터.
악극단 레퍼토리 중 하나였던 ‘타잔’ 패러디극을 악극단 작가이자 연출자였던 김화랑 감독이 영화화했다.

 
MBC 방송국의 개국 프로그램이었던 <웃으면 복이 와요>를 시작으로, 스크린의 코미디 스타들은 방송국으로 주요 활동무대를 옮겼다. 구봉서는 서영춘, 배삼룡, 곽규석 등 걸출한 코미디언들과 함께 각 방송사들의 개국 프로그램을 섭렵하면서 코미디 연기를 이어 나갔다. 그리고 이들은 스크린 코미디의 전성기를 이끌었던 것처럼 TV코미디의 황금기를 이끌었다. 1970년대 초까지 구봉서는 다양한 하위 장르의 코미디영화에 출연하며, 스크린과 브라운관의 코미디를 연결시켰다.
구봉서는 영화뿐 아니라 대중문화계전반에 걸쳐 코미디 장르의 형성과 전성에 지대한 역할을 담당하며 우리 시대의 웃음을 주조했다.

<막동이 신혼 10개월>(심우섭, 1969)의 한 장면
(사진 28) <막동이 신혼 10개월>(심우섭, 1969)의 한 장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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