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난파
Hong Nan-pa / 洪蘭坡 / 1898  ~  1941
본명
홍영후 (Hong Young-woo)
대표분야
음악
활동년대
19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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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악 :
애련송(환무곡) (김유영, 1939)
춘향전 (이명우, 1935)

주요경력

1899년 온가족이 고향을 떠나 서울로 이사한 뒤 교회를 다니며 서양 음악을 접함
1910년 중앙 기독교 청년회 중학부에 입학
1911년 새문안 교회를 다니며 세례를 받고 집사로서 성가대 활동
1912년 조선정악전습소 서양악부 성악과에 입학
1913년 조선정악전습소 성악과 졸업, 기악과 입학
1914년 중앙 기독교 청년회 중학과 졸업 및 기악과 졸업. 졸업 후 조선 정악 전습소 보조교사로 잠시 활동
1915년 조선정악전습소 서양악부 교사로 부임. <악전대요>, <통속창가집> 출간, <간이무답행진곡집> 편찬
1916년 김상운과 결혼
1918년 도쿄 상야(上野)음악학교 예과(預科) 입학, 2년 수학
1919년 도쿄에서 예술 잡지 <삼광> 창간(경영난으로 4호에서 폐간)
1919년 3월 3.1운동 참여를 위해 일시 귀국. 이후 다시 일본으로 돌아가 복학 신청을 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자 귀국하여 경성악우회 조직
1920년 매일신문사 기자로 입사
1920년 첫 공식 독주회
1921년 첫 창작 소설집 <처녀혼> 발간
1922년 연악회 설립, 음악잡지 <음악세계> 창간
1925년 잡지 <음악계> 창간
1926년 일본 도쿄 고등음악학원 야간반 편입학. 재학 중 1926년 도쿄교향악단 제1바이올린 연주자 활동
1929년 고등음악학원 수료 후 교향악단을 사직하고 귀국
1931년 조선 음악가 협회 창립 총회에서 상무 이사로 선임
1931년 7월 성가대 사임 후 미국 셔우드 음악학교에서 2년 간 수학
1931년 일본 빅터레코드사 고문으로 위촉
1932년 12월 8일 이전부터 관계를 맺고 있던 흥사단에 단우 번호 266번으로 가입
1933년 이화여자전문학교 음악학 강사로 출강
1933년 바이올린 3중주 실내악단 '난파 트리오' 결성(1936년 8월 조카 홍성유의 사망으로 해체)
1934년 일본 빅터레코드사 경성지점 음악 주임으로 근무
1936년 코리아음악연구소 창설
1937년 수양 동우회 사건 관련자로 검거, 옥고를 치른 후 전향서를 씀
1940년 국민총력조선연맹 문화위원으로 임명
1941년 8월 30일 옥고 이후 재발한 늑막염을 돌보던 중 결핵균이 머리로 들어가 경성요양원에서 사망

기타정보

기타이름
난파, 나소운, 羅素雲
저술내역
1929년 <조선동요100곡집>
1933년 <조선가요 작곡집>
1938년 <음악만필(音樂漫筆)>

영화인 정보조사

출처 : 한국영화인 정보조사

조선에서 처음으로 바이올린을 정식으로 배우고 활약한 연주자이자 작사ㆍ작곡가인 홍난파는 영화 음악에도 관여하였다. 1935년 <춘향전>의 주제가가 그 출발점이었다. 홍난파의 곡에 김팔련이 작사를 하고, 빅터레코드 전속 가수인 김복희가 불렀다(동아일보a). 이외에도 1937년 김유영이 감독한 <애련송>의 음악도 홍난파가 담당하였다(동아일보b).

* 참고문헌
동아일보a 1935년 10월 4일 2면
동아일보b 1937년 10월 29일 5면.

[작성: 김영진]
[감수: 김종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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