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춘광
Kim Choon-gwang / 金春光 / 1900  ~  1949
본명
김조성 (Kim Jo-seong)
대표분야
시나리오, 감독
활동년대
1920, 1940, 1950, 196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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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독 :
놀부흥부 (김조성, 1925)
원작 :
민검사와 여선생 (전범성, 1966)
검사와 여선생 (윤대룡, 1958)
촌색씨 (박영환, 1958)
청춘행로(촌색시, 一名 며누리의 설음) (장황연, 1949)
검사와 여선생 (윤대룡, 1948)

주요경력

1924년 7월 13일 조선극장 주임변사
1929년 금성오페라단 창립단원
1930년 삼천가극단의 요청으로 비가극 <평화>를 쓰면서 극작 활동 시작
1935년 2월 극단 예원좌를 조직
1938년 본명 김조성을 춘사 나운규와 춘원 이광수의 이름을 따서 김춘광으로 개명
1945년 8월 광복과 더불어 예원좌 해산
1945년 10월 해산되었던 예원좌 단원을 재정비하여 극단 청춘극장을 조직
1946년 4월 예원결의친목회 조직
1947년 11월 전국연극예술협회 창립대회에서 부이사장으로 선출
1949년 7월 19일 열병으로 사망

기타정보

기타이름
소원(笑園)

영화인 정보조사

출처 : 한국영화인 정보조사
초창기 변사 중에 한 명이자, 영화배우이다. 변사로서 “경쾌하고도 애달픈 봄날의 피리소리”를 가졌다는 평가를 받았다고 한다. 연극계에서 활동하다가 조선극장 주임 변사가 되었다. 극장주인 하야카와 코슈(早川孤舟)가 동방문화협회를 조직하고 제작한 영화에 잇달아 출연하며 명성을 얻었다. 1923년에 만든 <춘향전>에서 이몽룡 역을 맡았으며 영화해설도 담당하였다. 1924년에는 서울에 실재하였던 기생 강명화의 슬픈 이야기를 소재로 한 <비련의 곡>에서도 주연으로 출연하고 영화해설도 맡았다. 마찬가지로 1925년의 <흥부놀부전>에도 주연과 영화해설을 담당하였다. 당시 영화 출연과 영화해설로 상당한 인기를 끌었다고 한다(동아일보b; 영화감독사전; 대중예술인 사전).
이후 그는 주로 연극계에서 활동하였다. 1929년 권금성을 중심으로 조직된 가극단 금성오페라단에서 임생원 등과 함께 활동하였다. 1930년에는 금성오페라단의 명칭을 삼천가극단으로 변경하고, 최성좌의 전 주간인 김소랑을 주간으로 하목, 단장은 권삼천이 맡는 등 일부 진용을 개편하였다(동아일보a). 1935년에는 임생원, 김세종 등과 함께 넌센스, 노래, 만담, 조선영화, 해설극 등 다양한 분야를 전문으로 하는 예원좌를 조직하는데 중심적인 역할을 하였다(동아일보c).
해방 이후에는 청춘극장 단장으로 활동하였다. <김상옥 사건>을 상영하여 유족들에게 바치기도 하였다. 중앙극장을 이끌고 호화선, 황금좌, 극예술협회, 극우회 등과 함께 전국연극예술협회를 결성하는데 참여하여 부이사장에 선출되기도 하였다. 극단 대표이자 극작가로 활동했던 그의 대표작으로는 <황금수레>, <동방의 길>, <촌색시>, <미륵왕자>, <단종애사>, <검사와 여선생> 등의 작품이 있다. 이 가운데 <검사와 여선생>(1948)과 <촌색시>(1949, 영화명 : 청춘행로)가 윤대룡 감독과 장황연 감독에 의하여 각각 영화화 되었다(김종원). 1949년 7월 29의 나이에 사망하였다(동아일보a; 경향신문; 대중예술인 사전).

* 참고문헌
동아일보b 1931년 7월 25일 5면.
동아일보a 1931년 7월 11일 4면.
동아일보c 1935년 2월 14일 3면.
동아일보d 1945년 12월 14일 2면.
경향신문 1947년 11월 9일 2면.
김종원, <<한국영화감독사전>>, 국학자료원, 2004.
<<식민지 시대 대중예술인 사전>>, 소도, 2006.
김종원, 한국영상자료원 한국영화인 정보조사 및 DB구축 감수, 2011

[작성: 김영진]
[감수: 김종원]
출처 : 한국영화감독사전
본관은 김해이고 아호는 춘광. 1901년 9월 황해도 해주 출생으로 보성고보를 나와 보성전문(고려대 전신)을 다녔다. 일찍이 연극계에 발을 들여놓았으나 조선극장의 주임 변사가 된 것이 계기가 되어 이 극장 경영을 맡았던 하야카와 마스다로가 동아문화협회를 만들고 제작한 <춘향전>(1923)의 이도령 역을 맡으면서 영화와 깊은 인연을 맺게 된다. 뒤이어 기생 강명화를 모델로 한 <비련의 곡>(1924)에도 출연했으나 세 번째인 <놀부흥부>(1925)때부터 감독을 맡았다. 문수일과 공연한 이 영화에서 그는 주인공 놀부 역을 연기하였다. 그는 이 물벼 단성사 촬영부에도 잠시 근무했는데, 이때 소원이란 필명으로 시나리오 <심청전>을 집필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 이후에는 주로 연극계에서 활동하였다. 1937년 청춘극장의 전신인 예원좌의 좌장으로 극단을 이끈 것 외에는 극작에 주력하였다. 해방 후에 남긴 작품으로 <촌색시>,<동방의 길>,<미륵왕자>,<검사와 여선생> 등을 꼽을 수 있다. 특히 <검사와 여선생>은 1948년 예원좌의 단원이었던 윤대룡 감독에 의해 영화화 되었고, <촌색시>는 장황연 감독이 <청춘행로>로 제목을 바꿔 1949년에 화면으로 옮겼다. 변사이자 배우요 감독이며 극작가인 그는 1949년 7월 49세의 나이로 뇌염이 원인이 되어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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