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훈
Shim Hoon / 沈熏 / 1901  ~  1936
본명
심대섭 (Shim Dae-seop)
대표분야
시나리오, 배우
활동년대
1920, 1960, 197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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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독 :
먼동이 틀 때 (심훈, 1927)
원작 :
상록수 (임권택, 1978)
직녀성 (이성구, 1968)
상록수 (신상옥, 1961)
먼동이 틀 때 (심훈, 1927)

주요경력

1915년 경성제일고등보통학교 입학
1917년 왕족인 이해영(李海暎)과 혼인
1919년 3.1운동 가담 후 투옥, 퇴학
1920년 중국으로 망명
1921년 항주 지강대학 입학
1923년 귀국
1924년 이혼 후 동아일보 입사
1925년 <장한몽> 출연
1926년 최초의 영화소설 <탈춤> 연재
1928년 조선일보 입사
1930년 안정옥(安貞玉)과 재혼
1931년 경성방송국(京城放送局)에 입사했으나 사상문제로 곧 퇴직
1932년 고향인 충청남도 당진에 낙향하여 집필에 전념
1933년 조선중앙일보사 입사
1935년 동앙일보 발간 15주년 현상모집 당선-<상록수>
1936년 장티푸스로 사망

기타정보

기타이름
심삼보, 심삼준, 해풍, 海風
저술내역
<탈춤>(1926)
<영원의 미소>(1933)
<직녀성>(1934)
<상록수>(1935)

영화인 정보조사

출처 : 한국영화인 정보조사
심훈은 경기도 시흥군에서 태어났다. 경성 제1고등보통학고에 진학했지만, 삼일운동에 참여하여 구속, 실형을 받고 수감되기도 하였다. 학교를 퇴학당한 심훈은 중국으로 가서 지강대학에 입학하였다. 귀국한 이후에는 무대예술을 연구하는 사람들이 모여 극문회(劇文會)를 조직하였는데, 이 회에 심훈도 김영팔, 이경손, 이승만 등과 함께 참여하였다. 1925년 이경손이 감독한 <장한몽>의 주인공 주삼손이 촬영 중에 행방불명되자 그 대역으로 영화 후반부에 출연하기도 하였다. 1927년 강홍식과 함께 일본으로 건너가 닛카츠 쿄토 촬영소에서 6개월 동안 영화를 공부했다고 한다. 귀국한 이후에 심훈은 1927년 하반기에 계림영화사에서 자신의 유일한 감독작인 <먼동이 틀 때>를 촬영하였다. 월래 제목은 <어둠에서 어둠으로>였지만, ‘좋지 못한 암시’를 준다는 이유로 검열당국의 압력을 받고 제목을 바꿔서 개봉하였다. 뿐만 아니라 대본에 ‘형무소’를 ‘감옥’으로 썼다는 이유로 필름을 2백 50여자나 삭제 당하기까지 하였다고 한다(동아일보; 조선일보a; 중외일보; 대중영화인 사전; 김종원). 1930년에는 이우(이재현)가 중심이 되어 조직한 엑스키네마의 고문을 맡기도 하였다(조선일보b). 영화평론가로도 활발한 활동을 벌였는데, <한국영화계의 현재와 장래>(조선일보, 1928), <조선영화총관>(조선일보, 1929) 등의 평문을 남겼다. 1936년 장티프스에 걸려 치료 도중 사망하였다.

* 참고문헌
동아일보 1925년 9월 14일 2면.
조선일보a 1927년 10월 6일 석간 3면.
조선일보b 1930년 4월 23일 석간 5면.
중외일보 1928년 7월 28일~8월 4일
<<식민지 시대 대중예술인 사전>>, 소도, 2006.
김종원, 한국영상자료원 한국영화인 정보조사 및 DB구축 감수, 2011

[작성: 김영진]
[감수: 김종원]
출처 : 한국영화감독사전
본명은 대섭(大燮)이며 금강생, 해풍 등이 필명으로 쓰이기도 했다. 1901년 9월 12일 서울 노량진 검은돌(지금의 흑석동) 출생. 1919년 경성제일고보(경기중고) 재학중 3·1운동에 참가했다는 이유로 경찰에 체포되어 복역했고, 그후 중국으로 건너가 방황하다가 항주의 지강(之江)대학에서 잠시 수확했다. 1923년 귀국하자 동아일보, 조선일보, 조선중앙일보의 기자를 두루 거치면서 학예부장을 역임했으며 안석주, 최승일 등과 신극 단체인 극문회를 조직, 연극활동에 관여했다. 그러나 1926년 동아일보에 영화소설 <<탈춤>>을 연재한 것을 계기로 중도하차한 <장한몽>(1926·이경손 감독)의 주역 주삼손의 자리를 메우면서 영화계와도 인연을 맺었다. 타고난 미남인데다 글재주가 뛰어난 그는 이듬해 <탈춤>을 영화화 하려던 계획을 접고 신문에 게재된 전과자의 로맨스 기사에서 힌트를 받아 쓴 <먼 동이 틀 때>(1927·계림영화협회 제작)를 감독 처녀작으로 내놓았다. 당초 기사 제목대로 <어둠에서 어둠으로>로 정했으나 제작 과정에서 검열의 장벽에 부딪쳐앞의 제명으로 바뀌지 않으면 안되었다. 내용은 어느 전과자의 기구한 운명과 이로 인해 파생되는 비관적인 환경을 그린 것. 강홍식, 나운규, 신일선 출연. 심훈은 <<조선영화감독 고심담>>(조선영화·1936, 창간호)이란 글에서 ‘우연히 발견한 노루꼬리만한 소재를 갖고 내가 구술하고 김태진이 필기하는 방식으로 썼다’고 했다. 영화촬영을 위해 옛 보성학교운동장에 천막을 치고 세트를 만드는 등 미술장치(이승만)에도 각별히 신경을 썼다고 한다.
작품에 대한 평가는 찬반이 엇갈렸다. 동아일보(1927, 11. 2)에 “G생‘이란 이니셜로 발표한 글에는 “사진은 대체로 원작-감독-촬영으로 나누어 보아 상당한 능력이 있는 사람의 손으로 되었다고는 하나 초작이 되어 그러한지 서양영화를 흉내 내려다가 실패하였다는 것밖에 머리 속에 남는 것이 없다”고 혹평한 반면, 당시 경향파 논객인 영화평론가 서광제는 호의적으로 받아들였다. “인간의 기구한 운명을 묘사한 것은 어느 조선작품에든지 볼 수가 없을 것이다. 그리고 제일 추한 장면이 없으며 예술적 작품이라고 하여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촬영으로부터 배우 연기에 이르기까지 나는 새삼스러이 강홍식 군이 그리워졌다. 그의 연기는 놀라웠고 조선에도 그러한 배우가 있는가를 생각할 때에 나는 무한히 기뻤다. 작품이 처음부터 예술적 감흥을 일으키며 묵직한 맛과 인간사회의 실감을 일으켜 준다. <아리랑>이 시골에서 성공한 작품이라 할 것 같으면 이 <먼동이 틀 때>는 도회에서 확실히 성공한 작품이다”(조성영화소평 <먼동이 틀 때>를 보고/ 서광제, 조선일보·1929. 1. 30)
심훈은 그뒤 1935년 동아일보 창간 15주년 기념 장편소설 현상모집 당선작인 자신의 작품 <상록수>를 각색하고 영화화하기 위해 백방으로 노력했으나 뜻을 이루지 못한 채 1936년 서른 다섯 살의 나이로 요절했다. 소설가로서 더 유명한 그의 작품으로 <불사조>(1931) <직녀성>(1934) 등 장편소설과 시집 <그날이 오면>(1949·한성도서) 등이 있으며 <<한국영화계의 현재와 장래>>(조선일보·1928. 1. 1-6) <<조선영화총관>>(조선일보·1929. 1. 1~4) 등 영화관련 글 다수가 있다. (김종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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