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전체메뉴 바로가기
하단 바로가기
로고
통합검색
검색
상세검색
로그인
회원가입
고객서비스
ENG
업데이트
검색
DB
영화글
VOD
컬렉션
업데이트
DB
DB
DB 서브
상세검색
작품 DB
인명 DB
소장자료
리스트
영화제
영화글
영화글 서브
연재
한국영화의 퀴어한 허구들
비평, 안녕하십니까
그때의 내가 만났던
명탐정 KOFA: 컬렉션을 파헤치다
사사로운영화리스트
세계영화사의 순간들
임권택X102
기획
칼럼
한국영화 NOW : 영화 공간 아카이빙 프로젝트
종료연재
기관지
VOD
VOD 서브
VOD 이용안내
가이드
VOD 기획전
전체보기
영화
영화인다큐
컬렉션
고객서비스
고객서비스 서브
KMDB 이용안내
온라인 민원
1:1문의
영화인등록
FAQ
오픈API안내
이용안내
파일데이터
Open API
공지사항
로그인
마이페이지
GNB닫기
DB
이전
임운학
Yim Woon-hak / 林雲鶴 / 1906 ~ 1987
본명
정학종 (Jeong Hak-jong)
대표분야
배우, 감독
활동년대
1920, 1930, 1940, 1950, 1960, 1970
DB 수정요청
소장자료
기본정보
영상자료
(108)
VOD(123)
이미지
(32)
스틸(30)
스틸필름(2)
이미지 (
25
)
더보기
산
광복 20년과 백범 김구
방랑대군
나그네 검객 황금 108관
필모그래피 (
234
)
더보기
감독
:
충남만유기
(임운학, 1954)
진격만리
(임운학, 1953)
고구려의 혼
(임운학, 1949)
홍차기의 일생
(임운학, 1948)
그들이 가는 길
(임운학, 1947)
한국영화사료관
더보기
[영화잡지] 월간영화 1984년 9월호
발행일
1984-08-31
[영화잡지] 영화예술 1966년 2월호
발행일
1966-01-25
[영화잡지] 영화연예 1965년 4월호
발행일
1965-03-01
영화인 정보조사
출처 : 한국영화인 정보조사
임운학은 영화 <산채왕>(1925)에 강홍식을 대신하여 출연하면서 배우생활을 시작하게 되었다(김종원). 이후 나운규의 <아리랑>(1926)을 비롯하여, <풍운아>(1926), 황운 감독의 <낙원을 찾는 무리>(1927), <춘희>(1928), <개화당이문>(1932), <임자 없는 나룻배>(1932), <춘향전>(1935), <아리랑고개>(1935), <미몽>(1935), <집 없는 천사>(1941)등에 출연했다(매일신보; 조선일보a; 조선일보b; 동아일보). 이 영화들에서 임운학의 배역은 주로 단역이었다. 해방이후 태양영화사의 <그들이 가는 길>(1947)을 통해 감독을 맡게 되었다. 이것이 그의 감독 데뷔작이었다. 이후 <홍차기의 일생>(1948), <고구려의 혼>(1949), <총검은 살아있다>(1953)를 만들고, <황혼열차>(1957), <영원한 내사랑>(1958) 등에 출연하였다(김종원). 1987년 4월 20일 노환으로 사망하였다(경향신문).
* 참고문헌
매일신보 1935년 12월 29일 4면.
조선일보a 1935년 8월 16일 석간 3면.
조선일보b 1935년 10월 13일 석간 5면.
동아일보 1936년 7월 3일 3면.
경향신문 1987년 4월 22일 2면
김종원, <<한국영화감독사전>>, 국학자료원, 2004.
[작성: 김영진]
[감수: 김종원]
출처 : 한국영화감독사전
본명 정학종. 1906년 1월 21일 경상남도 하동 사람인 정기성의 2남 2녀 중 셋째로 출생. 부친은 종로 뒷거리 모전에서 유기(놋그릇)와 혼례식 등 관혼상제 때 쓰이는 물건들을 사다가 파는 상인이었다. 크게 재미를 못본 아버지는 이를 그만 두고 광산에 손을 댔으나 실패. 아버지 따라 평안남도 순안광산에 간 어머니마저 1918년 13세 때 여의고 만다. 8세 때부터 글방에 들어가 천자문과 동몽선습을 익히고 11세 때 지금의 중구 수하보통학교에 진학했으나 1년만에 낙원동의 초등학교로 옮겼다. 이후 간도 용정중학교를 졸업했다. 영화와 인연을 맺게 된 것은 소꼽친구의 소개로 계림영화협회의 촬영현장을 따라 다니다가 이경손 감독의 <산채왕>(1925)에 도중하차한 강홍식을 대신하여 출연하면서 부터 였다. 이 영화는 산채의 두목이 딸을 납치하려는 일당과 싸우는 이야기. 그는 싸우다가 죽는 강홍식의 대역을 맡아 하다가 산적의 무리 가운데 하나로 나오는 두 가지 역을 맡았다. 이듬해에 조선키네마 프로덕션으로 옮겨 나운규의 <아리랑?(1926)에 마부로 출연. 여세를 몰아 같은 해 <풍운아>의 성격이 급한 '급행열차'라는 대학생 역과 1927년 황운 감독의 <낙원을 찾는 무리>들을 위시하여 <춘희>(1928),<개화당이문>(1932),<임자 없는 나룻배>(1932),<춘향전>(1935),<집 없는 천사>(1941)등 많은 영화에 출연했으나 대부분 단역이었다. 일제말기 징용을 피해 신의주로 가 극단 생활을 하다가 해방이 되자 귀국. 첫 감독의 기회를 잡은 것은 1947년 촬영기사 출신인 한창섭이 제작한 태양영화사의 <그들이 가는 길>(1947.이집길,채숙희 주연)이었다. 역적으로 몰려 죽음을 당한 친구의 아들을 데려다 길렀으나 그 아들이 오히려 아버지를 박대하자 참다못해 대동강 물에 빠져 자살하려는 것을 암행어사가 구해준다는 통속 시대극. 그는 이 영화에서 암행어사 역을 맡았다. 잇따라 <홍차기의 일생>(1948.윤백남 각본)과 여주 신방사에서 촬영중 6.25발발. 삼국통일 시대에 고구려 군사들이 신라 군사들과 싸워 패하기도 하지만 고구려의 혼은 그 후예들의 머리속에 영원히 살아 남는다는 사극영화 <고구려의 혼>(1949),그리고 6.25전쟁 중에 만든 기록영화로 6.25전쟁에 참전한 장병들의 활약상을 담은 <총검은 살아있다>(1953)를 감독했다. 1960년 푸대접 받는 단역 연기자의 친목과 권익을 옹호하기 위해 영우회를 조직하여, 초대회장을 지냈다. 1987년 82세의 나이로 4월 2일 작고했다.
펼쳐보기
상단으로
초기화면 설정
초기화면 설정
검색
DB
영화글
VOD
한국영화사료관
저장
닫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