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완
Baek Wan / 白梡
대표분야
제작/기획
활동년대
196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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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모그래피 (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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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작자 :
최후의 대결 (김묵, 1966)
로타리의 미소 (이형표, 1965)
폭력지대 (김묵, 1965)
처가살이 (이봉래, 1965)
신촌아버지와 명동딸 (이성구, 1964)
아편전쟁 (김수용, 1964)
잉여인간 (유현목, 1964)
신식할머니 (백호빈, 1964)
여자 19세 (김수용, 1964)
연애졸업반 (이형표, 1964)

수상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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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요경력

1962년 한양영화사 대표
1963년 영화제작가협회 이사
1964년 제11회 아시아영화제 한국대표단 단장
1964년 한국영화업자협회 회장
1964년 영화산업육성촉진위원회 의장단

영화인 정보조사

출처 : 한국영화인 정보조사
백완은 1962년 <손오공>(1962), <진시황제와 만리장성>(1962) 등을 제작하면서 제작자로 활동을 시작하여, 1965년까지 3년간 30여 편의 영화를 제작했다(KMDb). 백완은 영화제작 외에도 영화산업발전을 위해 다양한 활동을 했다.
1963년 영화법시행령에 따라 제작가협회의 기능이 정지되어 새 임원을 선출해야했는데, 이때 이봉영(범아영화사)이 회장으로 선출되었고 한양영화사 대표였던 백완은 차태진(극동흥업), 정병준(동성영화사)과 함께 이사로 선출되었다(동아일보a).
1964년에는 한국영화업자협회 회장으로 활동했다. 1964년 영화법의 존폐를 둘러싸고 영화계에서 논쟁이 벌어졌다. 영화법을 폐기하자는 한국영화산업협의회(회장 윤봉춘)의 주장과 영화법의 모순을 대폭 수정하되 영화법은 유지하자는 한국영화업자협회의 주장이 팽팽히 맞섰다. 이때 한국영화업자협회 회장이었던 백완은 까다로운 시설기준과 전속제를 폐지하여 영화제작시설이 없는 군소영화업자들에게도 활동할 기회를 주자고 주장했다. 그러나 국산영화제작자에게 주는 유일한 혜택인 외화수입쿼터는 현행대로 유지해야한다고 입장을 밝혔다(동아일보b).
백완은 1964년 발족한 영화산업육성촉진위원회의 의장단으로도 활동했다. 영화산업육성촉진위원회는 한국영화업자협회와 전국극장연합회에 의해 구성, 발족된 단체였다. 이 위원회는 영화제작 및 극장업계의 전반적 위기를 타개하고 정부에 보호육성책을 건의하려는 목적에서 만들어진 단체였다(경향신문).

* 참고문헌
동아일보a 1963년 8월 12일자 6면.
동아일보b 1964년 12월 12일자 3면.
경향신문 1964년 8월 26일자 5면.

* 주요경력 출처-동아일보 1964년 6월 6일자 5면.
* 1964년 한국영화업자협회 회장-동아일보 1964년 6월 6일자 5면에 해당 직책으로 기사화되어있음. 몇 년도부터 한국영화업자협회 회장이었는지는 알 수 없음.
* 1963년 영화제작가협회 이사 출처-동아일보 1963년 8월 12일자 7면.
* 1962년 한양영화사 대표-KMDb 필모그래피를 참조하여 연도는 추정.
* 1964년 영화산업육성촉진위 의장단 출처-경향신문 1964년 8월 26일자 5면.

[작성: 김성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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