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규환
Lee Gyu-hwan / 李圭煥 / 1904  ~  1982
대표분야
감독, 제작/기획, 시나리오
활동년대
1930, 1940, 1950, 1960, 197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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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모그래피 (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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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독 :
남사당 (이규환, 1974)
상처받은 두 여인 (이규환, 1963)
(이규환, 1962)
천하태평 (이규환, 1960)
낙화암과 삼천궁녀 (이규환, 1960)
애련의 꽃송이 (이규환, 1959)
청춘비가 (이규환, 1958)
심청전 (이규환, 1956)
춘향전 (이규환, 1955)
돌아온 어머니 (이규환, 1949)

수상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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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요경력

1922년 일본으로 건너가 도쿄 일본영화예술연구소에서 6개월 동안 수련
1927년 할리우드로 가기 위해 부산에서 화물선 헤이안환(平安丸)을 타고 상하이로 떠났다가 포기하고 다시 일본으로 가 경도(京都) 신흥(新興) 키네마촬영소에 입소, 조감독 임명 후 3년 간 연출수업
1932년 서울로 돌아온 뒤 <임자없는 나룻배>로 감독 데뷔
1937년 성봉영화사 설립
1942년 조선영화주식회사 설립으로 인해 성봉영화사가 통합되자 만주로 떠남
1944년 강제징용으로 노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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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인 정보조사

출처 : 한국영화인 정보조사
1904년 경북 대구에서 태어났다. 대구 계성중학에서 수학하고, 영화감독이 되고자 일본 제구기네마사에 입사하여 연출을 배웠다. 귀국하여 <임자없는 나룻배>(1932)로 26번째 영화감독이 되었다(이청기). 이 영화에 대해 당시 어느 평론가는 “조선 영화계에서 일찍 보지 못했던 새로운 감독과 명쾌한 촬영으로 된 영화이다. 아마도 이때까지 나온 조선영화의 패권을 잡을 만하다”고 평하기도 하였다(동아일보a). <임자없는 나룻배>에서는 문예봉을, <바다여 말하라>(1935)에서는 현순영을 데뷔시켰다(김정혁; 김한). 1937년 발표한 <나그네>로 좋은 평을 얻었다. 임화는 이 영화를 ‘토키시대’에 만들어진 가장 뛰어난 조선영화라고 극찬하며, 영화사적으로 나운규의 <아리랑>과 유사한 의의를 가진다고 평했다(임화). 1941년 <창공>을 마지막으로 시대적 여건에 의해서 해방될 때까지 영화를 만들지 않았다(이청기). 해방 직후에 라디오 드라마 <똘똘이의 모험>을 영화화하며 다시 현장에 복귀하였다. 전쟁 직후 연출한 <춘향전>(1955)으로 큰 성공을 거두며, 전후 한국영화의 기폭제가 되었다. 출자자를 구하는데 어려움을 겪었던 <춘향전>은 대법원장 김병로의 아들 김재중의 출자를 받아서 만들어졌다. 하지만 출자자인 김재중은 개봉하기 전에 사망하였다고 한다. 우여곡절 끝에 세상에 나온 <춘향전>은 전국에서 1억7천만원의 수입을 올렸을 정도로 흥행에 성공하였다(동아일보b). 1974년 주변의 도움으로 은퇴작 <남사당>을 연출하였다(동아일보c). 평생 23개의 작품을 연출한 이규환은 1982년 7월 4일에 사망하였다(동아일보d).

* 참고문헌
동아일보a 1932년 9월 14일 5면.
동아일보b 1972년 11월 29일자 5면.
동아일보c 1974년 7월 30일자 5면.
동아일보d 1982년 7월 5일자 11면.
이청기, 「韓國映畵의 前史時代 및 發生期의 特性에 關한 硏究」, 『藝術院論集』제6집, 1967, 229~248쪽.
김한, 「미술학교를 나와서, <淑英娘子傳>에서 <집 없는 天使>에 이르기까지」,『삼천리』제13권 제1호, 1941년 1월호, 222~226쪽.
임화, 「朝鮮映畵發達小史」, 『삼천리』제13권 제6호, 1941년 6월호, 196~205쪽.
김정혁, 「朝鮮 映畵監督論」, 『삼천리』제13권 제6호, 1941년 6월호, 226~229쪽.

[작성: 김영진]
[감수: 김종원]
출처 : 한국영화감독사전
아호는 성파(星波). 1904년 2월 28일(양력) 경북 대구에서 방랑벽이 있는 아버지 이근수(李根洙)와 어머니 장옥진(張玉振)의 외아들로 태어났다. 한달에 한 번 얼굴을 비칠 뿐인 남편만 바라고 살 수 없어 만석꾼인 고모부가 사남매를 공부시키는 서울 집으로 거처를 옮겨 가정부 일을 한 어머니 덕에 홍은동 소재 보정(普正) 보통학교를 졸업했다. 이학교 교감의 추천으로 휘문의숙(徽文義塾: 휘문중학 전신)에 들어갔으나 고종사촌이 몰락하면서 학업을 중단, 서울 생활 8년을 청산하고 낙향했다. 그는 셋방을 얻어 삯바느질하는 어머니의 노력으로 대구 계성(啓星) 중학 2학년에 편입(1918)했으나 학과 공부보다는 예능 방면에 관심을 가졌다. 그중에도 특히 영화를 좋아했다. 서울에 있을 때 단성사나 우미관 등 극장을 기웃거리다가 본 영화의 장면을 떠올리며 또래의 친구들 앞에서 변사 흉내내기를 즐겨했다. 그 무렵 존 김도산 일행의 연쇄극과 서상호(徐相昊)와 같은 인기 변사가 해설하는 영화는 가슴을 설레게 했다. 더욱이 4학년 대 서울의 3 1 독립운동에 이어 일어난 대구의 항일시위에 참가한 학생들을 모두 체포한다는 말을 듣고 경남 밀양으로 피신했다가 2년 만에 돌아온 뒤 대구에서 본 D.W 그리피스의 미국영화 <침묵>은 그로 하여금 장차 영화감독이 되려는 생각을 굳히는 계기가 되었다. 그뒤 한 친구의 도움으로 일본에 건너가 동경의 영화예술연구소에서 기초지식을 쌓고 6개월 만에 귀국, 스물 네 살 때까지 한약방 등에서 밥벌이를 했다. 이듬해 중국 상해로 건너가 소설가인 김광주를 통해 이경손, 전창근을 소개받고 시나리오 <영육난무(靈肉亂舞)>의 영화화를 시도했으나 빛을 보지 못했다.
11개월 만에 상해를 떠나 일본 교토(京都)에 자리를 잡으면서 비로소 영화계 진출의 실마리를 찾게 된다. 공교롭게도 사촌 형이 다니는 염색공장 부근에 신흥키네마 촬영소가 있었는데 며칠동안 회사 정문 앞에서 기다린 보람으로 면접시험을 보고 연출부에 들어갈 수 있었다. 그는 이곳에서 뒷날 <나그네>(1937)의 연출을 도와준 스즈키 주키지(鈴木重吉)를 만나 감독 수업을 받을 수 있었다. 귀국한 뒤에는 시나리오 창작에 매달렸다 스물여덟 살 때 쓴 시나리오 <탄식하는 해골>은 조선일보 학예부에 있던 안석영의 소개로 조선일보에 게재되기도 했다. 창작에 가속이 붙자 잇따라 박효린(朴曉麟) 원작 <임자없는 나룻배>의 각본을 완성, 출자자인 강정원을 만나면서 비로소 영화 연출의 염원이 이루어진다. 1932년 28세 때였다.
나운규와 16세의 처녀 문예봉을 남녀 주인공으로 기용한 이 영화는 춘삼이라는 순박한 뱃사공이 철도가 만들어지면서 삶의 터전을 잃게 되고, 그의 사랑하는 딸이 철도 기사에게 유린되려 하자 그를 죽이고 살던 집마저 불태운 뒤 끝내는 자신도 목숨을 끊고 만다는 비극적인 내용을 담고 있다. 이 작품의 기저에는 처참한 한국적 비극이 깔려 있다. 서정적인 터치로 민족의식과 저항정신을 불어넣었다고 할 수 있다. 당시 동아일보 학예부장이던 주요섭은 ‘조선민족의 혼이 죽지 않고 빛나고 있음을 암시해 준 영화’라고 평가했고, 일본의 호찌(報知) 신문은 ‘사실주의적 기법이 두드러진 가작’이라고 호평했다. <임자없는 나룻배>의 성공 요인은 무엇보다 나운규의 천부적인 연기력에 힘입은 바 컸다. 이규환은 뒷날 이에 대해 ‘참았던 격정이 일시에 폭발하는 순간의 명연기는 정말 대단했다’고 술회한 바 있다. 그는 잇따라 농촌청년이 가난한 아이들을 가르치면서 미신타파에 앞장 서는 <밝아가는 인생>(1933)을 비롯하여, <바다여 말하라>(1935) <무지개>(1936) <나그네>(1937) <새출발>(1939) <창공>(1941) 등 8편을 일제 강점기 아래서 내놓았다. 이 가운데서 밀양강 기슭에 자리한 어촌을 배경으로 풍비박산된 한 가족의 비극을 사실주의적 기법으로 그린 <나그네> <박제행·문예봉 주연>는 특히 관심을 끌었다. 당시 매일신보(1937, 4. 23)에 실린 남궁옥의 평이 이를 잘 말해 주고 있다. 이땅이 아니고서는 보지 못하고 듣지 못할 만큼 강렬한 향토색으로 두껍게 칠을 한 이 사진의 그 어느 누구에게서도 비조선적 정신과 표현을 발견하지 못하는 이상 도리어 평가해야 할 최고봉으로 추천하고 싶다는게 그 요지이다.
일제 말기에는 뚜렷한 활동을 하지 못했다. 기울기 시작한 가세 속에서 농부인 부모를 외면했던 두 아들의 개심을 그린 <창공>(1941)을 내놓고 해방이 될 때까지 4년 동안 극단 ‘건설무대’(단장 김소랑)의 연출을 잠시 맡은 것을 제외하면 메가폰을 잡지 않았다는 이야기가 된다. 이는 일제의 이른바 국책영화 제작에는 가담하지 않았음을 의미하는 것으로 매우 주목할 만한 일이다. 그대신 징용장을 발부받고 경기도 평택으로 끌려가 강제노동을 했다. 징발된 1천여 명의 동포와 함께 비행장을 닦았다. 새벽에 나가 밤에 돌아오는 중노동이었으나 1년 반을 견뎌내었다. 불혹의 나이인 마흔 살 때였다. 해방된지 1주일 후 상경하여 재기를 준비하였다. 그 첫번째 결실이 바로 김영수 원작 각색으로 흥행에 크게 성공한 아동영화 <똘똘이의 모험>(1946)이었다. 광복 후 최초의 극영화로 기록되는 이 작품은 창고에서 쌀을 훔쳐내 북한으로 보내려는 일당의 계획을 탐지하고 일망타진하는 초등학교 소년의 용감한 모험기이다. 이를 계기로 <민족의 새벽>(1947),<그들의 행복>(1947),<갈매기>(1948),<돌아온 어머니>(1949)등 잇따라 연출의 봇물이 터진다. 사회로부터 냉대받은 문제아동을 교화시키는 처녀의 이야기를 담은 <갈매기>에선 조미령을 주연으로 발탁하여 스타로 만든다. 영화 중흥기의 신호탄이 된 히트작 <춘향전>(1955)은 이 신인을 정상의 자리로 끌어올리는 계기가 된다. 그는 이후 1982년 7월 6일 79세의 나이로 별세하기까지 <심청전>(1956),<청춘비가>(1958),<애련의 꽃송이>(1959),<낙화암과 삼천궁녀>(1960),<정>(1962),<상처 받은 두 여인>(1963),<배따라기>(1973),<남사당>(1974)등 8편을 발표하였다. 이중 인간의 무지와 오해가 빚은 비극을 그린 <배따라기>는 현장을 떠난지 10년 만에 재기의 의욕을 불태운 작품으로 <남사당>은 일부 기자들과 영화인들이 뜻을 모아 고희를 맞은 원로 감독에게 연출의 기회를 부여한 마지막 영화라는 점에서 큰 의미가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는 해벙전 8편,광복후 14편 등 모두 22편을 남겼으며, 유현목,최훈,하한수 감독을 영화계에 배출하였다. (김종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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