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창근
Lee Chang-chun / 李昌根 / 1908  ~  1999
대표분야
감독, 제작/기획, 시나리오
데뷔작품
산괴령 1931
활동년대
1930, 1940, 1950, 196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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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모그래피 (6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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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독 :
마법선 (이창근, 1969)
투명인의 최후 (이창근, 1960)
세쌍동 (이창근, 1959)
인생화보 (이창근, 1957)
건국십년 (이창근, 1954)
북한의 실정 (이창근, 1949)
신라의 고적 (이창근, 1942)
처의 모습 (이창근, 1939)
도회의 비가 (이창근, 1936)
죄지은 여자 (이창근, 1935)

주요경력

1930년 서선키네마 설립
촬영감독협회 고문
1960년 한국영화감독협회 부회장
1963년 프로듀서 클럽 감사
1964년 한국영화인협회 감독분과위원회 감사
1964년 한국영화인협회 기술분과위원회 부위원장
1968년 한국영화최고회의

기타정보

영화계 입문배경
평안남도 평양이 고향이다. 1908년 1월 2일에 평양 신창리 68번지에서 출생했다. 부친 이기원은 평양 종로에서 큰 석유상을 하고 있어서 매우 여유가 있는 살림을 할 수가 있었다. 그렇게 공부에 많은 열정을 가지지 못했지만 발명을 잘한다거나 그런 면에서 어릴 때 무척 남다른 소질을 가지고 있었다고 생각이 든다. 그렇게 학교생활에 흥미를 느끼지 못하던 10살 때 숭덕학교에 5학년으로 편입했고 5학년을 마치자 역시 숭덕학교 고등과에 진학 2년을 마쳤다. 이 숭덕학교 시절에도 그렇게 공부에는 두곽을 드러내지 못했다. 20세의 청년 시절에 일본동경으로 유학을 가게되었다. 특히 누님이 유학을 먼저 간 상태였다. 그는 電氣基 礎理論과 기술을 익혔다. 그것은 나에게 큰 흥미를 유발하는 새로운 학문이었다. 이무렵의 공부가 후에 크게 나에겐 도움이 되었다.
주요 영화작품
산괴령(1931,이창근,촬영)
돌아오는 영혼(1934,이창근)
죄지은 여자(1931,이창근)
都會의 悲歌(1934,이창근)
처의 모습(1939,이창근)
신라의 古蹟(1942,이창근)
북한의 實情(1949,이창근)
건국십년(1954,이창근)
人生畵報(1957,이창근)
세雙童(1959,이창근)
투명인의 최후(1960,이창근)
애정삼백년(1963,윤봉춘) 촬영, 편집
마법선(1969,이창근
유목동(197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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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음반 가사지에만 남은 아내의 모습 1930년대 조선 영화계에서 기인이라 할 만한 이를 꼽자면 이창근(李昌根)을 빠뜨릴 수 없을 것이다. 여러 사람이 세세하게 업무를 나누어 맡는 요즘과 달리 당시 영화계에서는 한 사람이 여러 분야의 일을 아울러 맡아 하는 경우가 적지 않은 편이었으나, 그렇다 치 ... by.이준희(대중음악비평가) 2012-08-14

영화인 정보조사

출처 : 한국영화인 정보조사
평안남도 평양이 고향이다. 부친이 평양에서 큰 석유상을 하였기 때문에 경제적으로 풍족한 생활을 하였다. 숭덕학교 고등과를 마치고, 누나가 있던 일본 동경으로 건너가 전기학원을 다녔다. 우연히 본 일본시대극 로케현장은 그가 영화에 관심을 가지게 된 계기가 되었다. 1929년 일본에서 돌아온 이창근은 영화카메라를 손수 만들며 영화제작을 준비하였다. 이 때 완성한 카메라가 일명 코첼1호라고 불리는 것이다. 1932년에 평양 창전리 18번지 자택 2층에 서선(西鮮)키네마를 창립하고, 제1회 작품으로 <산괴령>을 감독·편집·현상 등 1인 4역으로 만들어 평양 제1관에서 개봉하였다. 계속해서 <도시의 비극>과 <돌아오는 영혼>(1933)을 감독, 단성사에서 동시 상영했다. 이 영화는 ‘농촌인의 생활고로 인한 비참한 정경’을 그린 것이다. 어느 신문에는 <불멸의 영혼>이란 제목으로 알려지기도 하였다. 이창근의 회고에 따르면, 이 작품은 북간도로 이민을 간 조선인들이 중국인들의 압박에 힘들어하다가 그곳에서 죽게 되지만, 영혼만은 한국을 지키기 위해 다시 돌아온다는 내용이다. 검열과정에서 영혼이 돌아오는 것이 불손하다고 해서, 추가 비용 15원을 들여서 개작을 한 후인 1933년 개봉할 수 있었다. 이 작품의 각본, 촬영, 감독은 모두 이창근이 맡았다. (이영일; 동아일보a; 조선일보a).
그의 두 번째 작품은 <도회비가>였다. <돌아오는 영혼>의 흥행에 힘입어 1933년 가을부터 제작에 착수하였다. 함경남도 옹기에서 로케를 진행한 이 작품은 1934년 2월경에 개봉하였다. 조선에서 최초로 시도된 “필림식싸운드판”이란 평가를 받기도 하였는데, 효과음을 위한 적절한 트릭이 돋보인 작품이었다(이영일; 조선일보b). 하지만, 1934년 2월경에는 이창근이 재정권만이 아니라 제작상에 있어서도 원작ㆍ각색ㆍ감독ㆍ촬영 등을 도두 겸하려는 ‘독선적 태도’에 불만을 가지고 있던 다른 사원들이 서선시네마에서 탈퇴하는 일이 벌어졌다. 나성(羅星)을 비롯한 이들은 영리를 떠난 자유주의적 입장에서 예술작품을 제작하겠다는 포부를 밝히며 따로 칠성(七星)키네마를 창립하였다(조선중앙일보a).
1935년에는 진남포에 만들어진 서항키네마의 작품인 <죄지은 여자(罪の女)>의 감독과 촬영을 담당하였다. 당시 촬영한 작품명에 대해서는 <이향(離鄕)>이라는 기록도 남아 있지만, 본인의 회고를 따랐다(이영일; 조선중앙일보b; 동아일보b). <죄 지은 여자>를 찍고 나서, “특수영화를 해야지 뭐 이 보통 영화를 해가지고는 손님이 안든다”는 생각으로 제작한 것이 <산유령>(1935)이었다. 하지만 그의 시도는 성공을 거두지 못 하였다(이영일).
발성영화 시대가 오자, 그는 발성영화에 어울리는 카메라 제작에 매달려서 코첼2호를 만들기도 하였다. 이창근이 만든 발성영화는 <처의 모습(妻のお影)>(1937)으로 평양에서 27일 동안 장기상영되었다고 한다(이영일). 이창근의 활동지가 평양이어서 그런지 그의 활동에 대한상이한 기록들이 남아 있다. 이 시기 이창근이 감독한 영화가 <도회의 비가> 혹은 <부부>라고 하는 상이한 기록이 남아 있기도 하다(조선일보c; 동아일보c).
해방 이후에 <이창근 프로덕션>을 창립하여 <건국십년>(1954)을 시작으로 영화계 활동을 재개하였다. 1955년에는 해방기념기록영화인 <건설의 전야>의 제작을 담당하였다. 그리고 1957년에는 김내성씨의 장편소설 <인생화보>를 감독ㆍ촬영하여 영화화하여 흥행에 성공하는 등 활발한 활동을 벌였다. 1960년에 제작ㆍ감독ㆍ각본ㆍ편집ㆍ현상을 모두 했던 영화 <투명인의 최후>도 중요한 작품이다(이영일; 동아일보d; 경향신문a).
이창근의 카메라에 얽힌 이야기도 전해진다. 이창근이 1920년대 일본에서 4백76엔을 주고 사왔던 덴마크제 윌리엄슨의 카메라를 KBS TV에서 드라마 소품으로 사용했다가 손상시킨 일로 화제가 되기도 하였다(경향신문b).
이창근은 1991년에는 국민문화 향상에 기여한 공로로 옥관문화훈장을 받았다(동아일보e). 1999년 9월 15일 사망하였다. 장례식은 촬영감독협회가 주최하는 영화인장으로 치러졌다(동아일보f).

* 참고문헌
동아일보a 1932년 6월 19일 5면.
동아일보b 1935년 5월 21일 3면.
동아일보c 1938년 9월 29일 4면.
동아일보d 1955년 11월 20일 4면.
동아일보e 1991년 10월 17일 22면.
동아일보f 1999년 9월 17일 17면.
조선일보a 1933년 6월 10일 조간 4면.
조선일보b 1934년 2월 28일 부록 4면.
조선일보c 1938년 9월 8일 조간 4면.
조선중앙일보a 1934년 2월 27일 5면.
조선중앙일보b 1935년 4월 17일 3면.
경향신문a 1957년 6월 24일 4면.
경향신문b 1982년 7월 12일 12면.
<<이영일의 한국영화사를 위한 증언록-유장산, 이경순, 이필우, 이창근>>3, 소도, 2003.

[정리: 김영진]
[감수: 김종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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