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50년대 와이드 스크린이 출현한 후 전통적인 4:3의 화면 비율은 영화관의 스크린에서는 자취를 감추었다. 넓어진 화면비율은 텔레비전의 위협을 장대한 스펙터클로 뛰어넘어보려는 기술 혁신 중의 하나였다. 외화의 영향으로 1962년부터 한국영화도 2.35:1의 시네마스코프를 받아들였고, 이후 1970년대 말까지 한국영화는 일괄적으로 2.35:1의 화면 비율로 촬영되었다. 그런데 시네마스코프 화면 비율은 테크니스코프라는 촬영방식에 의해 서도 구현이 가능했다. 해외에서는 마카로니웨스턴에서 비롯되어 저예산 영화에 소규모로 사용되었는데, 한국에서는 1967년에 시작되어 1979년까지 광범위하게 활용되었다. 현재 한국영상자료원에는 테크니스코프 영화의 네거티브 필름이 147편 보존되어 있어서 1970년대 영화의 20% 이상이 테크니스코프로 촬영되었을 정도로 널리 사용되었음을 알 수 있다.
테크니스코프 방식을 간단하게 정의하면, 네거티브 필름을 절반만 사용하여, 즉 2 퍼포레이션을 한 프레임으로 촬영하여 시네마스코프 비율을 만들어내는 방식이다. 원로 영화인들은 필름의 절반만 사용한다는 특성을 비유 하여, 테크니스코프를 ‘투 퍼프레이션’, 또는 ‘하프 사이즈’라는 명칭으로 기억하고 있다. 테크니스코프 촬영을 위해서는 카메라가 1프레임이 2개의 퍼포레이션만 받도록 조절하는 데 핵심이 있었다. 이를 위해 장석준 감독을 중심으로 아리플렉스 카메라를 개조하였다. 우선 필름을 끌어당기는 풀 다운 클로우 뒤의 삼각 캠을 반으로 줄였다. 샤프트의 간격과 필름 매거진을 끌어내리는 피드 스프라켓의 비율을 줄여 아파추어의 화면이 2 퍼포레이션만 받도록 했다. 테크니스코프로 촬영한 필름은 현상 후 인화과정에서 일반영사가 가능하도록 확대하여 시네마스코프와 동일한 방식으로 영사했다. 테크니스코프가 광범위하게 사용되기 위해서는 촬영 카메라뿐만 아니라 현상기와 인화기를 별도로 제작하여야 했다. 그렇기 때문에 한국천연색현상소의 현상, 인화 기재 발명은 테크니스코프 사용의 촉매가 되었고, 1970년대 중반 테크니스코프의 확산에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다.
열악한 환경을 벗어나기 위한 기술적 시험
테크니스코프가 광범위하게 사용된 명시적인 원인은 제작비 절감에 있었다. 테크니스코프는 네거티브 필름이 절반밖에 들지 않아서 비용이 감소하는 효과가 있었다. 그러나 당시의 평균 제작비 1200만원에 비추어 테크니스코프를 사용하여 절약한 필름 비용은 불과 60만원 내외에 불과하다. 따라서 이 촬영 방식이 특정 시기에 사회 전반에 유통된 원인 전부로 보기는 어렵다. 두 번째 요인으로는 1970년을 전후하여 영화산업의 위기를 타계하고자 시도했던 새로운 기술적 실험을 들 수 있다. 이 시기의 새로운 기술형식은 입체영화, 70mm 영화, 그리고 동시녹음이 있었다. 입체영화는 <천하장사 임꺽정>(1968) <몽녀>(1968) <지지하루의 흑태양>(1971) 3편이, 70mm 영화는 <춘향전>(1970) 한 편만이 완성되었고, 동시녹음도 <대원군>(1968) 한 편에 그치고 말았다. 이 사례들은 그다지 성공적이지도 새로운 기술표준으로 전환되지도 못했지만, 테크니스코프가 제작되는 데 중요한 요인으로 작용했다. 당시에는 열악한 기술 환경을 극복하기 위해 국내에서 조립한 카메라, 조명, 현상기 등 많은 국산기재가 있었다. 테크니스코프 관련 장비들도 이러한 맥락에서 자체 개발되었던 것이다.
테크니스코프가 성행했던 세 번째 요인으로 홍콩 무협영화와 마카로니웨스턴의 놀라운 흥행 기록을 들 수 있다. 1960년대 중반 이후 마카로니웨스턴은 한동안 한국영화계를 문자 그대로 ‘석권’하였다. 가장 큰 위세를 떨친 1967년은 외화 흥행 상위 10편 중 6편이 마카로니웨스턴이었을 정도였다. 그 결과 테크니스코프를 둘러싸고 외화 흥행과 한국영화 장르, 그리고 미학적 경향이 함께 결합하게 되었다. 권격 액션영화의 성행과 테크니스코프 촬영 방식, 그리고 줌렌즈의 광범위한 사용이 그것이다. 테크니스코프는 표준렌즈의 길이가 짧고 적은 양의 필름을 장착해도 상대적으로 오래 찍을 수 있어서 기동성이 뛰어나다는 장점이 있었다. 여기에 줌렌즈를 사용하면 더 빠르게 피사체에 접근할 수 있었다. 즉 경제적인 촬영에 적합했던 것이다. 권격, 액션영화의 결투장면 등에 이러한 촬영조건은 특허 장점이었다.
테크니스코프와 줌렌즈는 활극 장르의 중심적인 구성요소가 되었고 이후 다른 영화로 확장되었다. 테크니스코프와 결합한 줌렌즈는 1960년대 말부터 사용빈도가 크게 늘어나면서 1970년대에는 카메라 이동을 대체하였다.
즐거움을 충족시켜주던 테크니스코프
1970년대는 TV의 영향에서 벗어난 틈새 관객을 찾기 위해 장르가 분화되는데, 이 시기의 권격, 액션영화도 전성기를 누렸다. 테크니스코프는 저예산 장르영화에 주로 사용되면서 관객의 오락적 욕구를 충족할 수 있는 수단이었다. 테크니스코프 작품에는 <섬개구리 만세>(정진우, 1972) <눈물의 웨딩드레스>(변장호, 1973) <청녀>(이만희, 1974) <소>(최하원, 1975)처럼 국제영화제에 출품되었거나 주목받았던 영화들도 있다. 그러나 대부분 제목만 들어도 B급 권격 액션영화 또는 무협영화라는 것을 짐작할 수 있는 작품이다. <동경의 밤하늘>(이성구, 1970) <삼국대협>(임권택, 1972) <죽어서 말하는 여인>(고영남, 1973) <새벽에 온 방문객>(노진섭, 1975) <흑거미>(김시현, 1975) 등이다. 정진우 감독은 “<삼국대협>이 외팔이 시리즈 같은 중국영화들이 흥행되어서 만든 영화라서 스피디하게 검술도 들어가고 하니까” 이 영화를 테크니스코프로 촬영하였다고 전한다. 저예산 액션장르, 테크니스코프, 줌렌즈의 결합은 당시의 주요한 경향을 제시하고 있다. 테크니스코프 영화는 화질에서는 악평을 받았다. 이 방식이 1970년대 국산 컬러 시네마스코프의 화질 저하를 초래했다는 것이 일반적인 견해다. 대부분의 촬영감독들은 테크니스코프 촬영방식에 대해 부정적인 의견을 피력한다. 쉽게 생각하면, 이미지가 실리는 필름 면적이 작기 때문에 화상의 선명함이 떨어진다는 논리가 성립할 수 있다. 그러나 1950년대 이후 영화필름은 질이 개선되어 이미지가 실리는 필름의 면적이 화질에 큰 영향을 미치지 않았다. 오히려 1970년대 영화들에서 흔히 발견하는 나쁜 화질은 열악한 제작환경과 영화장비들이 낡아 기술적인 정교함이 가능하지 않았던 제반 상황에서 찾는 것이 더 적당해 보인다. 전반적인 영화산업의 침체와 문화는 테크니스코프가 성하게 된 배경으로 자리 잡고 있었다. 테크니스코프가 컬러 시네마스코프 시대 영화의 질이 하락한 원인이라는 평가를 완전히 피할 수는 없다. 그러나 테크니스코프 자체의 기술적 결함 때문이 아니라 기재 노후화, 날림 제작과 편법 등의 문제가 상대적으로 저예산인 테크니스코프 촬영작에집중되어 나타났기 때문이라는 평가가 더 정확할 것이다.
테크니스코프가 광범위하게 제작된 1971~79년은 유신시대와도 일치한다. 달리 생각해보면, 테크니스코프가 광범위하게 활용된 원인에는 유신시대를 지배했던 ‘기술국산화’, ‘자립경제’, ‘수출 지상주의’ 담론의 영향도 었음을 알 수 있다. 테크니스코프는 1972년 한국천연색현상소에서 테크니스코프 현상기를 자체 개발하여 홍콩 등에 수출한 후, 영화기술의 국산화, 수출용 신기술의 하나로 인정받게 되었고, 대규모로 사용되는 계기가 되다. 반면, 1970년대 말 테크니스코프의 급격한 퇴조는 1.85:1의 비스타비전 영화가 새로운 화면 비율로 등장하면서 시네마스코프 영화가 감소한 것에 원인이 있다. 또한 1978년부터 영화진흥공사가 장비 대여, 녹음, 현상 등의 기술사업을 본격적으로 시작하여 적은 예산으로 자체 제작한 기재의 효용성이 사라진 것에서도 그 원인을 찾을 수 있다. 영화기술에도 유신시대의 정책과 담론이 여실히 작동하고 있었던 것이다.
안타까운 점은 테크니스코프 필름을 현상 인화할 수 있는 기재가 보존되어 있지 않아 상영 프린트를 뜰 수 없다는 사실이다. 대부분 네거티브 필름만 보존되어 있고 상영 프린트가 있는 작품은 <섬개구리 만세> 등 일부에 불과 했다. 이번 영상자료원의 작업을 통해 한국영화사의 한 시기를 장식했으나 기억되지 못했던 기술형식과 영화를 감상할 수 있는 기회가 마련되어 그 의미가 깊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