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양성
최근 한국영화계에 포스트 박찬욱·봉준호를 찾기 어렵다는 말은 요 몇 년째 심상치 않게 들리는 말 중 하나다. 박찬욱, 봉준호, 이창동, 홍상수 감독처럼 칸, 베니스, 베를린 등 세계 3대 국제영화제 경쟁 부문의 초청을 받을 수 있는 새로운 한국 감독이 보이지 않는다는 불안감. 그러나 꼭 경쟁이 아니어도 칸, 베를린 영화제에 초청돼 좋은 반응을 얻은 젊은 영화인들의 영화는 꾸준히 있어왔다. 오히려 박찬욱 봉준호의 영화처럼 감독만의 독특한 세계관을 바탕으로 대중성과 작품성을 아우를 수 있는, 개성 있는 한국영화를 만나기 힘들다는 것. 포스트 박찬욱·봉준호를 찾기 어렵다는 문제의식은 바로 이러한 위기감에서 기인한다.
<비밀은 없다>
포스트 박찬욱·봉준호를 만나기 어렵다는 말 못지않게 가장 많이 들은 이야기 중 하나는, 한국(상업)영화가 더는 새롭게 느껴지지 않는다는 것이다. 1990년대 후반부터 2000년대 초반, 박찬욱 봉준호 홍상수 이창동 임상수 김지운 허진호 류승완 장준환 등 새로운 감독의 출현과 그들 각각의 개성이 묻어난 다양한 영화가 한국영화계에 신선한 바람을 일으켰지만, 한국영화가 가장 새롭게 느껴졌다는 순간은 아직도 그 시간에 머물러 있다. 이후 새로운 영화, 감독이 아예 없었다는 말은 아니다. 흥행에는 실패했지만, 최근 어떤 한국영화보다 독창적인 연출을 보여준 이경미 감독의 <비밀은 없다>(2015), <곡성>(2015)을 통해 흥행·평단의 지지는 물론 칸영화제 비경쟁 부문에 초청돼 작품성까지 인정받은 나홍진 감독, <부산행>(2015) <염력>(2017) 등 한국형 블록버스터 장르 안에서 자신만의 세계를 구축한 연상호 감독도 있다.
하지만 몇몇 개성 있는 감독의 등장에도 불구하고, 작가 고유의 독특한 세계관과 스타일을 가진 상업영화를 만들 수 있는 신진 감독의 풀이 넓지 않다는 것은 영화계에 종사하는 대다수 사람들의 고민으로 이어진다. 인재 부족은 곧 다양성 부족으로 이어지기도 한다. 그런데 여기에는 감독 개개인의 역량 문제라기보다, 단편·독립영화를 통해 주목받은 젊은 감독들이 정작 상업영화 필드에 진출하면 기대 이상의 작품을 내놓지 못하는 최근 한국영화의 전반적인 분위기와도 맞물린다. 독립영화를 만들 때는 그(녀)만의 고유의 시선과 재치가 돋보이던 감독들이 상업영화 연출에 뛰어드는 순간, 약속이라도 한 듯 영화 공학적으로 계산된 듯한 복제된 기성품을 쏟아내는 것은 우연이 아닐지 모른다.
몇몇 영화 관계자는 이와 같은 현상을 두고, CJ엔터테인먼트, 롯데엔터테인먼트 등 투자 제작배급과 극장 사업을 병행하고 있는 대기업 영화사들의 영향력이 커짐에 따라 발생하는 다양성 부족 문제라고 제기하기도 한다. 한국영화의 흐름을 주도할 정도로 막강한 힘을 가진 대기업 투자 배급사로 인해 심화된 스크린 독과점 문제 때문에 한국 영화시장이 획일화돼가고, 다양성마저 줄어든다는 지적도 있다. 여기에 덧붙여 최근 외연적 확대를 우선시해온 한국영화가 스크린 독과점 문제와 결부돼 특정 소재, 장르 쏠림 현상이 심해졌다는 것 또한 새로운 감독, 영화를 만나기 어렵게 하는 요인으로 볼 수 있다.
그럼에도 흥행을 최우선으로 생각할 수밖에 없는 상업영화 속성상 작가 고유의 색채나 미학보다는 대중이 좋아하는 요소를 우선 고려하게 되는 것 또한 간과할 수 없다. 이러한 현실에서 대중성과 작품성을 어느 정도 충족시킬 수 있는 새로운 한국 (상업)영화를 만날 수 있을까.
<한공주>를 통해 국내외 평단의 주목을 받은 이수진 감독의 <우상>(2018)은 개봉 전 베를린국제영화제 파노라마 부문에 초청받으며, 독특한 스토리텔링과 미장센을 추구한 영화로 주목받았다. 하지만 국내 개봉 이후 관객들이 이해하기 난해한 연출과 메시지라는 평을 받으며 흥행마저 성공을 거두지 못한 <우상>은 여러 논란에도 불구하고, 감독만의 시각과 스타일이 분명한 요즘 흔치 않은 한국영화라는 점에서 독특한 영화를 만나기가 더 어려워지고 있는 한국영화 시장에 아쉬움을 더한다.
배우 김윤석의 감독 데뷔작 <미성년>은 작가적 야심보다는 불륜이라는 통속적인 소재를 대중적인 영화 문법 안에서 예리하게 비튼 솜씨가 돋보이는 작품이다. 한국의 명배우 중 한 명인 김윤석이라는 이름을 떼어놓고 보더라도, <미성년>은 일상을 뒤흔드는 파열과 마주한 인물의 심리를 섬세하게 포착해내는 디렉팅과 서사의 전형성을 뒤엎는 전개, 여성 캐릭터에 대한 높은 이해도를 보여준다. 이를 감독 김윤석만의 장기라고 볼 수는 없겠지만, <미성년>이 보여준 정교한 디테일과 새롭지 않은 이야기를 낯설게 바라보게 하는 연출 방식은 특정 소재와 메시지, 규모에만 치중해 있던 최근 한국영화가 잊고 있던 영화의 기본을 환기시킨다.
굳이 상업영화 시스템에서 제작된 영화로 한정 짓지 않더라도, 최근 몇 년간 부산, 전주 등 국내 영화제를 통해 주목할 만한 신인 감독을 발견한 것 또한 요 근래 한국영화계가 거둔 수확이라고 할 수 있다. 그들의 영화가 기성 감독의 영화를 압도하는 것도 아니요, 지금까지 없던 새로운 영화를 보여줬다고 할 수는 없겠다. 그러나 박찬욱?봉준호가 혜성같이 등장한 2000년대 초반의 영화와 2019년의 영화가 같을 수는 없을 것이다. 20년 가까운 긴 시간만큼, 세상은 변했고 영화를 소비하고 사유하는 매체 환경 또한 급격히 달라져 있다. 영화를 둘러싼 환경이 시시각각 변하는 만큼 영화도, 영화를 바라보는 방식도 달라져야 한다. 박찬욱?봉준호의 아성을 단박에 뛰어넘는 괴물 신인 감독을 바라는 것은 아니다. 다만, 새로운 환경에 맞게 감독 특유의 세계관, 스타일, 개성을 가진 감독의 등장을 기대할 뿐이다. 그리고 이들이 보여준 가능성과 잠재력을 상업영화라는 틀 안에서 어떻게 발전시킬 수 있는지에 따라서, 한국영화가 좀 더 새롭게 느껴지지 않을까. 새로운 감독들이 새로운 영화를 만들 수 있는 풍토 조성까지는 아니더라도, 감독의 개성과 역량을 발휘할 수 있는 기회를 주는 것. 그것이 한국영화계가 염원하는 다양성 부족 해소와 세대교체의 출발점이라고 할 수 있겠다.
by.권진경(한국독립영화협회 비평분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