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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깊고 푸른 밤>
<깊고 푸른 밤>(배창호, 1985)은 감독 배창호와 배우 안성기를 떠올릴 때 익히 드는 느낌과는 사뭇 다른 에너지가 담긴 영화다. 거칠고 파괴적이며 때론 폭력적이기까지 한 설정과 모든 에너지를 쏟아내고 난 후 찾아오는 담담함까지. 영화는 예상치 못한, 그러나 그래서 더욱 깊이 다가오는 기운으로 가득 차 있다.
어떤 영화의 첫 시퀀스에 대한 이야기로 시작해보자. 딥 퍼플의 히트곡 ‘하이웨이 스타’가 흘러나오면, 동양인 남녀가 탄 새 하얀 스포츠카가 데스밸리를 질주한다. 두 사람의 표정은 무언가에 홀린 듯 들떠있다. 남자가 갑자기 사막 한가운데서 차를 세우더니 울퉁불퉁한 바위로 뒤덮인 골짜기로 여자를 데려가 거칠게 치마를 들추고는 느닷없이 섹스를 시작한다. 이어 카메라는 욕정을 막 쏟아낸 남자를 올려다보며 태양을 정면으로 응시한다. 곧 남자는 옷매무새를 가다듬는 여자의 머리채를 휘어잡고는 사정없이 걷어차며 핸드백을 뺏어 달아난다.
내가 잘못 본 게 아니다. 미켈란젤로 안토니오니의 <자브리스키 포인트 Zabriskie Point>(1970)를 떠올리게 하는 사막의 섹스와 태양을 바라보는 구로사와 아키라의 시선을 닮은 듯한 카메라 워크, 마리오 바바 영화 속 짐승 같은 남자들이 떠오르는 무자비한 폭력이 시작부터 한꺼번에 등장하는 이 영화는, 믿기지 않지만 배창호 감독이 연출한 <깊고 푸른 밤>의 첫 장면이다. 심지어 스크린 속 안하무인 강간 폭력남을 연기하는 배우는 안성기다. 그동안 내가 알아온 성인 같은 어르신으로서의 안성기와 배창호는 분명 거기에 없다.
뒤이어 전개되는 이야기를 따라가는 데 있어 이 영화의 어마어마한 첫 장면은 중요한 전제가 된다. 미국에 불법체류 중인 남자 백호빈(안성기)은 미국 영주권을 따기 위해 가짜 결혼을 계획한다.
그의 상대는 술집에서 일하는 제인(장미희)이라는 여자인데, 그녀는 여러 차례 계약 결혼으로 돈을 번 전적이 있는 전문가다. 제인은 호빈이 약속한 거액의 계약금을 제대로 받기 위해 그에게 일자리를 주선하고, 이민국의 추적도 피할 겸 자신의 집에 그를 들인다.
의도치 않은 두 사람의 기묘한 동거는 예상과는 다른 방향으로 흘러간다. 호빈이 제인의 사적 영역을 알게 되면서부터다. 호빈은 제인이 상처 많은 과거로 인해 괴로워한다는 사실을 직감하고는 그녀가 공허해질 때를 틈타 마음을 사로잡는다. 필요 이상으로 친밀해진 두 사람은 결국 계약 결혼 관계의 선을 넘게 된다.
여기까지는 아메리칸드림을 꿈꾸는 남자의 욕망과 아메리카의 허상을 알아버린 여자의 공허가 뒤엉켜 서로의 육체를 탐하는 로맨스가 전개된다. 제인이 모순 덩어리인 호빈의 정체를 깨닫고도 그를 향한 마음을 포기하지 않는 모습 역시, 자주 봐온 장르의 클리셰 역할을 한다. 하지만 영화의 결말은 클리셰고 뭐고 다 부숴버린다.
그러니까 파괴의 결말은 파격적인 시작과 궤를 같이한다. 겉과 속이 조금은 다른 영화가 된 셈이다. 연출자의 의도였을까. 소설가 최인호와 여러 차례 협업했던 배창호 감독은 <적도의 꽃>(1983)과 <고래사냥>(1984)에 이어 다시 한 번 최인호의 소설 「물 위의 사막」을 각색해 이 영화를 만들었다.
배창호 감독은 아메리칸드림이라는 허상과 욕망에 얽힌 한 남자의 비극적인 최후를 다룬 이 영화를 두고 스스로 성공의 정점에 취해 만든 실패작이라고 언급했다. 그걸 보면 그의 의도대로 완성된 건 아닌 듯싶다.
그러나 그 덕분인지, <깊고 푸른 밤>에는 묘하게도 설명할 수 없는 강렬한 기운이 서려 있다. 그것은 안성기와 장미희라는 당대 최고의 스타들 덕분이라 생각한 적이 있다.
최근 안성기가 주연한 수많은 영화 가운데 그가 연기하는 인물의 욕정이 드러난 영화는 거의 없었다. 늘 안성기라는 배우의 속살이 궁금하던 와중에 <깊고 푸른 밤>은 관객들에게 안성기의 전라를 보여준다. 로스앤젤레스의 야경을 뒤로한 채 여자와 뒤엉켜 있는 그의 모습을 기어이 보여주는 영화인 것이다.
여기에 더해, 단 열한 명의 스태프가 미국으로 건너가 만들었다는 제작 뒷이야기도 <깊고 푸른 밤>의 기이한 에너지를 설명해주는 근거일지 모른다. 감독 이하 스태프가 어떤 에너지를 쏟아부었기에 이역만리 낯선 땅에서, 한낮의 차이나타운을 거니는 안성기의 야성미를 담아낼 수 있었을까.
생애 가장 뜨겁고 격정적인 사랑을 쏟아내본 이들이 지닌 삶의 통찰, 바닥 끝까지 내려가본 이들이 하늘을 올려다볼 때의 담담함이 이 영화를 뒤덮고 있는 영화적 기운이 아닐까 생각해본다. 더 쏟아낼 게 없을 때까지 끝까지 가본 영화. <깊고 푸른 밤>을 주저 없이 걸작이라 치켜세우는 이유다.
by.
김현수(씨네21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