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개 속에서 만난 차가운 떨림
파주는 이제 거대한 출판단지가 있는 곳이지만, 내겐 여전히 ‘안개의 도시’다. 이른 아침 파주 인근에 가면 만나게 되는 안개는 어떤 비밀을 감춘 듯 유혹적이다. 그런 느낌을 나만 가졌던 게 아니라는 걸 박찬옥 감독의 영화 <파주>에서 확인했다. 역시 그랬어. 그 안개가 특별했어. 언니의 남자를 사랑한 소녀와 아내의 동생을 사랑한 남자, 즉 형부와 처제의 이야기. 통상적인 개념에 비추면 매우 도발적인 이 사랑은 질척이는 대신 자욱한 안개 같은 비밀을 지녔다.
학생운동을 하던 신학대학생 중식(이선균 분)은 수배를 피해 파주에 온다. 친한 형이 목사로 있는 교회 공부방에서 아이들을 가르치다가 부모를 여읜 동네 여자 은수를 만나 결혼도 한다. 하지만 은수의 동생 은모(서우 분)는 중식이 별로다. 그래서 언니가 결혼한 후 가출하는데, 그 사이 언니가 불의의 사고로 죽고 만다. 겨우 중학생이던 은모에게 형부 중식은 유일한 보호자가 된다. 가족으로 함께 살게 된 지 4년. 중식이 인권운동을 하다가 유치장에 갇히자 은모는 갑자기 인도로 여행을 떠나버린다.
<파주>에서 가장 마음에 드는 건 시간의 흐름이다. 중식과 은모가 함께하는 7년간의 시간은 이리저리 뒤틀려 있다. 3년 만에 인도에서 돌아온 20대의 은모와 철거 현장에서 농성하며 살고 있는 중식. 현재의 그들이 마주하는 순간 영화의 시간은 7년 전으로, 그리고 또 4년 전으로 돌이켜진다. 왜 은모가 갑자기 여행을 떠났는지, 중식은 왜 은모를 기다렸는지…. 현재와 과거를 대범하게 뚝뚝 떼어낸 것 같은데, 실은 교묘하게 감정의 퍼즐을 맞춰나간다. 그 방식은 불투명한 안개가 서서히 걷히며 눈앞의 사물이 드러날 때처럼 불안함을 가중시켜서 더 매력적이다.
은모가 파주에 돌아와서 알게 된 건, 형부 중식이 지금껏 언니의 죽음에 대해 뭔가 숨겨왔다는 것이다. 은모는 진실을 찾고자 하는데, 의심과 불신 속에서 더 강렬하게 느껴지는 비밀스러운 감정들. 중식 역시 마찬가지다. 그걸 차마 꺼내지 못하고 살아가야 하는 무거운 현실을 영화 <파주>는 차갑고 예민하게 그린다. 겉으론 조용하지만 내면은 곧 터질 것 같은, 새어나오는 울음소리를 입술을 깨물며 꾹 참는 듯한 이 영화의 떨림이, 나는 참 마음에 든다.
by.김혜선(영화칼럼니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