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세기 아시아는 전 세계 대륙에서 가장 역동적이고 창의적인 감독과 작품이 배출되는 곳이다. 급속한 경제발전과 영화산업 토대의 근대화, 민주화의 진전 등 여러 외부 요인이 이들 지역의 전통적인 문화 예술과 어우러져서, 과거 서구의 영화적 전통과 단절된 새로운 영화 미학이 탄생하고 있다. 독일의 영화학자 토마스 엘세서는 21세기 세계 영화의 지형을 ‘할리우드와 아시아, 그리고 기타’로 구분 짓고 있다. 하지만 그럼에도 아시아 영화는 여전히 검열과 정치적 억압 등 지역별로 다양한 외부적 문제들로 인해 어려움을 겪고 있다. 혼란과 새로운 도전, 이처럼 최근 아시아 영화의 흐름은 말 그대로 격변 중이다. 이 글에서는 이러한 변화를 중화권, 이란, 동남아, 일본영화 등 권역별로 살펴본다(인도와 중앙아시아도 반드시 언급되어야겠지만 지면상 생락한다).
중화권 영화의 빅뱅
21세기 들어 중국 영화산업의 팽창이 가속화하면서 홍콩과 대만 영화계를 블랙홀처럼 빨아들이고 있다. 자본이 탄탄한 반면 전문 인력이 부족한 중국은 홍콩 영화인들과 손을 잡고 제작사를 만들기 시작했고, 홍콩 영화인들은 중국시장에 진출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안정적인 자본줄을 잡을 수 있다는 점에서 너도나도 중국으로 진출했다. 이제 홍콩에 남아 홍콩 영화를 만드는 감독은 허안화가 거의 유일하다. 홍콩 영화인들이 중국에 기획, 연출 쪽으로 주로 진출했다면 대만은 제작 스태프가 주로 중국에 진출하고 있다. 홍콩 영화인들의 중국 진출 문제는 홍콩 영화의 정체성에 관한 문제를 야기하고 있다. 중국 본토와의 공동작업이 늘어나면서, 홍콩 영화인들은 홍콩 영화의 중국 본토 시장 확대라는 과실을 기대해왔다. 하지만 중국과 홍콩은 일국 양체제이기 때문에 소재에 대한 제한에서부터 검열에 이르기까지 많은 차이가 존재한다. 문제는 본토에서 작업하는 홍콩 영화인들이나, 본토 시장 진출을 꾀하는 홍콩 영화들이 중국의 환경에 순응적인 모습을 보인다는 점이다. 그렇기 때문에 홍콩의 많은 영화인은 본토 시장을 얻는 대신 홍콩 영화의 정체성을 잃어버리지 않을까 하는 우려를 하고 있다. 중국과 대만의 관계는 좀 다르다. 대만 영화는 애초부터 홍콩 영화처럼 세계시장에서 각광받는 영화가 아니었다. 일부 작가영화만이 영화제나 예술영화 시장에서 환영받을 뿐이었다. 따라서 중국 입장에서 대만의 감독들은 영입의 대상이 아니었다. 대신 제작과 관련된 전문 인력을 영입해왔다. 그 결과 지난 수년간 대만에서는 전문인력이 부족해서 영화 만들기가 힘들다는 불평이 나올 정도로 상황이 어려워졌다. 하지만 최근 들어 대만 영화 전문 인력에 대한 처우가 예전만 못해지면서 많은 대만 영화인이 다시 대만으로 복귀하고 있다.
중국 영화 내부 역시 커다란 변화를 겪고 있다. 먼저, 중국 영화시장의 급팽창을 들 수 있다. 2012년을 기점으로 중국 영화시장은 세계 2위 규모로 커졌고, 해외시장 진출을 위한 다양한 시도를 하고 있다(연구 리서치 기관인 Ernst & Young Report에 따르면 2020년 중국이 세계 최대 규모의 영화시장으로 부상할 것이라고 한다). 특히, 중국 자본의 할리우드 진출이 활발해지고 있다. 그런가 하면, 새로운 대규모 영화 제작 단지가 중국의 각 지역에 앞다투어 건립되고 있다. 하지만 과잉투자로 인한 수익률 저하, 양극화의 심화(대작과 저예산 영화로 양극화) 등과 같은 부작용도 나타나고 있다. 그러나 가장 큰 문제는 갈 길을 잃은 젊은 세대 영화인들이다. 소위 5세대 영화인들이 주류 영화계에 편입된 뒤 중국 작가영화의 흐름을 지탱하던 독립영화 세대가 대거 지상으로 올라갔고, 이들 독립영화 세대를 모델로 영화계에 뛰어든 수많은 젊은 영화인이 제 길을 찾지 못하고 있다. 대체로 그들은 지아장커, 로우예, 왕샤오슈아이 등과 같은 선배 세대와는 달리 TV 영화나 비디오 영화를 만들어서 안정적인 수익을 올리는 데 치중하고 있다. 이 때문에 최근 중국 영화계에서 두드러진 젊은 피는 눈에 별로 띄지 않는다.
최근 대만 영화의 주요 이슈는 ‘시장에서의 경쟁력 확보’ 다. 이 모든 출발은 웨이더솅의 <하이자오 7번지>였다. 2008년에 발표된 <하이자오 7번지>는 5억 위안의 흥행 수입을 기록하면서 대만 영화 최고의 흥행작이 되었다. 이 기록은 대만 시장에서의 역대 흥행 기록 2위에 해당한다(1위는 <타이타닉>). 그리고,<하이자오 7번지>의 흥행 성공은 대만 영화의 자국 시장점유율을 대거 끌어올렸다. 2005년 1.59%에 불과했던 시장점유율을 2008년에 12%까지 끌어올린 것이다. <하이자오 7번지>의 후광효과는 대단했다. 니우치엔저의 <몽가>, 엽천륜의 <찌파이영웅>, 그리고 웨이더솅의 대작 <세디그 발레> 등이 흥행에 성공을 거두면서 대만 영화의 시장점유율은 2011년 17.5%까지 상승 곡선을 그렸다. 대만 영화의 미래가 긍정적인 이유는 상업적 경쟁력 확보 때문만은 아니다. <오브와, 타이페이>의 아빈 첸, <빛의 손길>의 장영치, <별이 빛나는 밤>의 린슈위, <버마로의 귀환>의 미디 지, <피노이 선데이>의 호위딩 등 실력 있는 젊은 감독들이 대거 등장하면서 대만 영화의 새로운 황금기를 예고하고 있다. 문제는 거장 감독들의 행보. 허우샤오시엔 감독은 2007년 <빨간 풍선> 이후 <섭은랑> 프로젝트에 매달려왔지만, 이제 겨우 촬영을 시작해 올 연말이나 내년 초에나 완성될 예정이다. 차이밍량 역시 2009년의 <얼굴> 이후 몇 편의 단편을 만들었지만, 장편으로는 지난해 연말에야 막 <소풍>의 촬영을 시작했다. 장초치는 여러모로 허안화 감독과 비교되는 감독이다. 허안화 감독이 홍콩을 지키면서 작품을 만들고 있듯이, 장초치는 대만 자본으로만 독립영화를 계속 만들고 있다. 그는 현재 신작 독립영화 <여름방학 숙제>를 만들고 있다. 허우샤오시엔이나 차이밍량은 일본 혹은 프랑스 자본 없이는 영화를 만들기 힘든상황이다. 이는 <하이자오 7번지>의 성공 이후 대만 정부가 대만 영화산업 진흥을 위해 다양한 정책을 내놓았지만, 아직은 갈 길이 멀다는 반증이기도 하다.
암흑기의 이란 영화
이란 영화의 암흑기는 정치적인 상황에서 시작되었다. 2005년 마흐무드 아미드네자드가 제9대 대통령에 선출되면서 정치적인 지형은 개혁파에 대한 탄압으로 이어졌고, 야당을 지지하는 문화예술인에 대한 폭정이 시작되었다. 영화인도 예외는 아니었다. 모흐센 마흐말바프 감독과 그의 가족이 프랑스로 망명했고, 자파르 파나히 감독은 2009년에 체포되어 수감되었다가 지금은 가택연금 상태다. 바흐만 고바디 감독은 터키로, 그의 누이인 나히드 고바디 감독은 이라크로 이주해 살고 있다. 독립영화에 대한 탄압도 이어지고 있다. 이라니안 인디펜던츠나 SMI 등과 같은 이란의 독립영화 세일즈 회사를 견제하기 위해, 이란 정부의 지원을 등에 업은 정체불명의 세일즈 회사가 생겨나 이란의 독립영화 세일즈 판권을 빼앗아가고 있다. 예술영화를 지속적으로 소개하는 ‘하우스 오브 시네마’도 폐쇄 명령을 받았다가 다시 문을 열기도 했다. 아미드네자드 정부는 자파르 파나히의 석방을 요구하는 국제사회의 탄원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영화인을 계속 탄압하고 있다. 올해는 이란의 전통적인 국제영화제인 파지르 국제영화제마저, 지금까지 운영을 맡아왔던 파라비 영화재단을 배제시키고 장부에서 직접 운영을 맡는다고 한다.
이러한 상황 때문에 많은 감독이 해외를 돌며 작품 활동을 계속하고 하고 있다. 압바스 키아로스타미 감독은 <사랑을 카피하다>(2010)를 이탈리아에서, <사랑에 빠진 것처럼>(2012)은 일본에서 만들었고, 차기작 역시 다시 이탈리아에서 제작할 예정이다. 신중한 성격의 압바스 키아로스타미 감독은 아미드네자드 정부의 폭압적 행태에 대해 어떠한 비판적인 언급도 하지 않고 있지만, 작품 활동을 해외에서 계속 이어가면서 무언의 항의를 하고 있는 것이다. 모흐센 마흐말바프 감독은 이란의 적대국인 이스라엘로 가서 <정원사>(2012)를 만들어서 세계 영화계를 놀라게 했고, 자파르 파나히는 연금 상태에서도 <이것은 영화가 아니다>(2011)와 <닫힌 커튼>(2013)을 만들어 역시 많은 이에게 놀라움을 안겨주었다. 바흐만 고바디는 망명지인 터키에서 <코뿔소의 계절>(2012)을 만들었고, <씨민과 나데르의 별거>로 베를린 영화제 황금곰상을 수상한 아쉬가르 파르하디 역시 신작 <과거>를 이란이 아닌 프랑스에서 찍고 있다. 반면에 안타깝게도 이란 국내에서 계속 활동하는 명망 높은 감독들의 신작들은 대부분 범작에 머물고 있다. 에브라힘 포르제쉬, 다리우스 메흐르쥐, 알리레자 다부드네자드 등의 작품들이 그러하다. 오는 6월에 있을 대통령 선거에 많은 영화인이 기대를 하고 있지만, 종교지도자 아야톨라 하메네이가 건재하는 한 정치, 사회적 변화는 쉽지 않을 것이라는 견해가 지배적이며, 이란 영화계의 겨울도 그만큼 더 길어질 것이다.
동남아 영화의 일취월장
동남아 영화는 1990년대 태국이 미학과 상업적 성취를 거두면서 세계의 이목을 끌었다. 논지 니미부트르, 펜엑 라타나루앙, 위시트 사사나티앙으로부터 시작된 뉴웨이브는 아피찻퐁 위라세타쿤, 아딧야 아사랏, 핌파카 토위라, 아노차 수위차콘퐁, 시바로지 콩사쿤, 통퐁 찬타랑쿤, 나와폰 탐롱라타나릿 등과 같은 재능 있는 젊은 감독을 줄줄이 배출했고, <옹박>의 주연 토니 자와 프랏야 삔꺼우는 세계 무대에서 태국 영화의 상업적 파워를 보여주었다. 그리고 마침내 아피찻퐁 위라세타쿤이 2010년 <엉클 분미>로 칸 영화제 황금종려상을 수상하면서 태국 영화의 미학적 성과는 그 정점을 찍었다.
태국 영화의 성공은 이웃 동남아 국가들에도 많은 영향을 미쳤고, 이제 그 여파는 점차 확산되고 있다. 그중 필리핀은 태국 이후 가장 주목 받는 지역이 되었다. 필리핀 영화의 성과는 가히 ‘백화제방’ 이라 할 만하다. 그리고 그 핵심은 독립영화다. 필리핀 독립영화의 뿌리는 1950년대에 활동한 마뉴엘 콘데까지 거슬러 올라가지만, 현대적 의미의 독립영화는 1970~80년대의 키드랏 타히믹, 닉 데오캄포, 레이몬드 레드로부터 시작되었다. 이후 침체기를 겪다가 시네마 원 영화제, 시네말라야 영화제 등과 같은 독립영화제가 새로운 장을 펼치면서 브릴얀테 멘도사, 라브 디아즈, 라야 마틴, 존 토레스 등과 같은 기존의 독립영화 감독들에 이어 아돌포 알릭스 주니어, 아우라에우스 솔리토, 크리스 마르티네즈, 프란시스 파시온, 제롤 타로그, 셰론 다욕, 로이 아르세나스 등과 같은 수많은 젊은 작가를 배출해냈다. 다양한 리얼리즘의 형식들을 실험하면서 새로운 미학을 만들어내고 있는 이들 필리핀의 독립영화는 최근 독립영화의 틀 안에서 벗어나 또 다른 길을 모색하고 있다. 그 하나는 주류영화계와 손을 잡는 것이다. 크리스 마르티네즈가 대표적인 예다. <키미도라><내 신부 찾아줘요>는 흥행에서도 커다란 성공을 거두었고, 주류 영화계는 독립영화계에 점차 눈을 돌리고 있다. 또 하나는 마닐라를 중심으로 펼쳐졌던 독립영화 제작이 각 지역으로 광범위하게 확산되고 있다는 점이다. 지난해 6월 다바오에서 열린 시넹팜반사 영화제는 민다나오, 루손, 비사야스, 세부 등에서 제작된 지역 영화를 한자리에 모은 영화제였다. 이처럼 필리핀 전국 각 지역에서 독립영화의 붐이 거세게 일고 있지만, 다수가 해외에서 성공을 거둔 저명한 독립영화 감독의 작품 세계를 모방하는 문제도 생겨나고 있다.
말레이시아, 싱가포르, 인도네시아 등지에서도 독립영화의 움직임은 활발하다. 말레이시아에서는 걸출한 여성 독립영화 감독 야스민 아흐마디가 2009년 심장마비로 갑자기 타계했지만, 그녀의 후배, 제자들이 활발하게 그녀의 뒤를 잇고 있다. 탄추이무이, 리우성탓, 제임스 리, 아미르 무하마드 등 젊은 독립영화감독들이 모여 만든 ‘대황전영(大荒電影)’과 우밍진, 호유항 등과 같은 젊은 감독들이 새로운 영화 미학을 만들어나가고 있다. 이들 독립영화 감독들은 중국계, 말레이계, 인도계 등 다양한 인종과 문화를 배경으로 독특한 미학과 주제를 펼쳐 보이고 있다. 타계한 야스민 아흐마디가 천착했던 주제가 바로 말레이시아 사회에서 인종 간 갈등과 공존, 그리고 사회적 소수자에 관한 것이었다. 이러한 경향의 영화들은 같은 동남아권에서도 찾아보기 힘들다. 반면 중국계 독립영화 감독들의 경우 국내에서 공공기관의 지원을 받기가 힘들어 중국이나 대만, 홍콩 영화계와 네트워킹을 하면서 활로를 찾고 있다. 탄추이무이 감독의 경우 지아장커 감독의 후원을 받아 베이징에 장기간 머물면서 신작 프로젝트 개발 작업을 했고, 제작 또한 지아장커 감독이 맡을 예정이다.
인도네시아는 공포영화 등 장르영화의 인기를 발판으로 자국 영화의 시장점유율을 50% 가까이 유지하는, 동남아 내에서도 드문 경우다. 그럼에도 독립영화 영역에서는 가린 누그르호와 리리 리자 이후 눈에 띄는 감독이 없었다. 하지만 최근 몇 년 사이에 에드윈, 테디 소리앗마쟈, 카밀라 안디니 등 걸출한 신인감독이 등장해 다시 주목받고 있다. 데뷔작 <날고 싶은 눈먼 돼지>로 독특한 스타일을 선보였던 에드윈은 두 번째 장편 <동물원에서 온 엽서>가 지난해 베를린 영화제 경쟁 부문에 초청되면서 인도네시아 영화의 새로운 기대주가 되었고, 테디 소리앗마쟈는 무슬림 사회에서의 퀴어의 삶을 그린 <사랑스러운 남자>(2011)로 금기를 뛰어넘는 도전을 보여주었다. 카밀라 안디니는 데뷔작 <거울은 거짓말하지 않는다>(2011)로 아버지인 가린 누그로호의 재능을 뛰어넘는다는 평가를 받았다.
태국과 필리핀, 말레이시아, 인도네시아 등 이들 동남아 국가들에서는 그동안 수많은 단편영화제, 독립영화제 등을 통해 탄탄한 저변을 쌓아왔고, 그러한 토대에서 재능 있는 젊은 감독들이 솟아오르고 있는 것이다.
충격과 시련 속의 일본 영화
일본은 전 세계에서 고령 감독이 가장 많은 국가일 것이다. 80세가 넘는 현역 감독도 여럿 있다. 스즈키 세이준, 야마다 요지, 후루하타 야스오, 그리고 신도 가네토(2012년 100세를 일기로 타계), 와카마쓰 고지(2012년 타계, 76세) 등. 이는 확실히 유별나 보인다. 일본에 현역으로 활동하는 고령 감독이 유별나게 많은 이유는 제작 시스템과 연관이 있다. 즉, 설립 100년을 훌쩍 넘긴 쇼치쿠를 비롯해 니카쓰, 도호, 도에이 등 오랜 역사를 자랑하는 제작사들이 지금도 제작과 배급망을 장악하고 있고, 이들 메이저 회사에서 제작을 담당하는 실력자들 대부분이 역시 고령이다. 그리고 이들은 노장 감독들과의 작업을 선호한다. 여기에는 두 가지 측면이 있다. 경륜과 세월의 깊이를 더한 노장 감독들의 예술 세계를 여전히 존중하는 문화적 풍토가 있는 반면, 변화와 도전을 꺼리는 일본 영화계의 부정적 측면도 있다. 그리고 일본의 영화 관객층이 점차 중장년층 중심으로 바뀌고 있다는 사실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노장 감독들이 계속 영화를 만들 수 있는 환경이 만들어지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인지 21세기 들어 일본 영화는 그다지 새롭지 않다. 흥행에 성공을 거두는 영화는 메이저 제작사와 TV 방송사와 손잡고 만드는 기획영화이거나 애니메이션이다. 이런 틀은 하나의 트렌드가 되었고, 앞으로도 쉽게 변하지 않을 것이다. 물론 구로사와 기요시, 고레에다 히로카즈, 소노 시온, 아오야마 신지, 가와세 나오미 등 작가 감독들의 활동도 여전하지만, 늘 도전적이고 새로운 영화의 보고였던 독립영화계가 예전 같지 않다는 현실은 일본 영화의 미래를 전망하는 하나의 시금석이 될 수 있다.
하지만 21세기 들어 일본 영화에 가장 큰 영향을 끼친 것은 역시 3•11 대지진이다. 산업적인 어려움은 금방 극복되었다. 반면 작품의 경향에 커다란 변화가 생겨났다. 많은 감독이 다큐멘터리는 물론 극영화를 통해 3•11에 대해 이야기하기 시작했고, 특히 가족의 소중함에 대해 더 깊은 관심을 기울였다. 후지와라 도시후미의 <무인지대>와 이와이 지의 <3•11: 이와이 지와 친구들>, 후나하시 아쓰시의 <핵 국가>, 오미야 고이치의 <무상소묘(無常素描)>, 나오미 가와세가 주도해 세계의 여러 저명 감독이 참여한 단편 모음집 <3•11 Sense of Home> 등의 다큐멘터리와 고바야시 마사히로의 <일본의 비극>, 우치다 노부테루의 <온화한 일상>, 소노 시온의 <희망의 나라>, 다쿠시 쓰보가와의 <하멜른>, 마사아키 다니구치의 <시그널>, 요시히로 나카무라의 <모두들 내일 봅시다> 등과 같은 극영화가 그러한 작품들이다. 이러한 작품들을 통해 일본의 감독들은 일본 사회를 새롭게 지각하고 있다.
위기를 맞이한 일본 독립영화계
그럼에도 불구하고, 독립영화계 전체의 상황은 그다지 좋지 않다. 예술영화 전용관, 미니 시어터 등이 줄줄이 문을 닫고, 관객의 취향이 점차 편협해지는가 하면, 새로운 재능을 발굴하는 보고였던 피아 영화제가 모회사의 어려움으로 힘든 시간을 보내고 있다. 이러한 외부적 환경과 맞물려 독립영화의 제작이 점차 어려워지고 있다. 2008년의 리먼브러더스 쇼크 이후 특히 독립영화의 제작비 조달이 어려워졌는데, 평균 제작비가 8000만 엔 이하로 떨어졌었다. 하지만 3•11 이후 독립영화의 제작비 조달은 더 어려워져서 현재는 4000만 엔을 넘어가면 제작 자체가 어렵다. 평균제작비는 2000만 엔으로 추산된다. 그래서 많은 독립영화 제작자, 감독들이 이제는 ‘저예산에서 무예산’ 시대가 되었다고 자조하고 있다. 이 때문에 재능 있는 젊은 감독들이 등장할 가능성이 점점 줄어들고 있다는 점에 문제의 심각성이 있다. 이리에 유, 오기가미 나오코, 이구치 노보루, 이시이 유야, 야마시다 노부히로, 구마키리 가즈요시 등 기존의 독립영화 감독들이 그나마 꾸준히 작품활동을 이어가는 정도다. 확실히 지난 수년간 일본 영화계에서 유망한 신인 감독을 찾기는 매우 어려워졌다. 메이저 제작사들은 안정적인 제작 방식을 고수하면서 재능 있는 신인 감독의 발굴에 별로 신경을 쓰지 않는다. 한때 이상적인 제작 시스템으로 여겨졌던 ‘제작위원회’ 방식은 결국 외부 투자자의 입맛에 맞는 작품만을 양산하고 있다. 지난해 제작된 구로사와 기요시의 5시간짜리 TV 영화 <속죄>는 메이저 제작사가 아닌, 위성 채널 와우와우가 제작했다. 이런 작품은 메이저 제작사에서는 결코 만들어질 수 없는 작품이다. 3•11의 트라우마, 독립영화의 침체. 이러한 현실 앞에서 일본 영화는 또 어떤 새로운 길을 찾을지 궁금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