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만희는 그의 창작활동이 질과 양 모두에서 절정에 이르렀던 1960년대 후반을 지나자 주춤한 듯 보였다. 1970년대 초부터 한국영화계에 불어 닥친 불황의 찬바람을 그 역시 피하지 못했고, 한 해 개봉작이 10편(1967년)에 이르기도 했던 작품 수는 1, 2편으로 줄었다. 그는 이 시기의 어려움을 <고보이 강의 다리>(1970) <쇠사슬을 끊어라>(1971) <일본해적>( 1972) <들국화는 피었는데>(1973) 등과 같은 전쟁/액션 스펙터클로 돌파하려 했던 것 같다.
하지만 이만희가 액션과 스펙터클에 능했던 사람은 아닌 것 같다. 오늘날 가장 인기 높은 이 시기 작품인 <쇠사슬을 끊어라>조차 액션 장면들은 정창화와 임권택이 일찌감치 과시했던 정교함이 부족하다. 물론 스펙터클에 대한 그의 몰두가 아무런 성과를 낳지 못했다고 말하는 것은 지나친 폄하일 것이다. <들국화는 피었는데>는 엉성하고 산만한 실패작에 가깝지만, 그 틈새로 분출하는 남성적 힘에 대한 매혹의 씬들은 때로 숭고하리만큼 웅장하다.
<00:40-1950>(1972)이 놓인 자리는 이상하다. 이 영화의 제목은 물론 한국전쟁의 최초 시점, 그러니까 인민군의 남침이 시작된 바로 그 시각을 뜻하며, 무대는 국방군의 최전방 초소이다. 카메라를 전쟁의 심장부에 갖다 놓은 뒤, 이만희는 이 시기 작품들을 특징짓는 스펙터클에의 몰두를 까맣게 잊은 듯, 초소 병사들의 움직임을 마치 실내극과도 같은 방식으로 찍어낸다. 전쟁의 현존은 보이지 않는 총포음으로 대체되고, 화면은 한계상황에 직면한 사내들의 침묵과 공포로 가득하다.
나는 <돌아오지 않는 해병>(1963)에서 시작되는 우리가 볼 수 있는 이만희의 모든 전쟁영화가 반공에의 태생적 강박에도 불구하고, 한국전쟁과 분단을 다룬 최근 젊은 감독들의 자유주의적 영화에 비할 수 없이 깊은 인간적 통찰과 미학적 성취에 이르렀다고 여전히 믿는다. <7인의 여포로>로 반공법 위반 혐의를 받은 뒤 “진짜 반공영화 한번 만들자”는 의도로 제작된 <군번 없는 용사>(1966)에서조차 잔혹한 인민군 장교 영훈(신성일)이 구월산 유격대 앞에서 “나를 죽여라. 내가 아비를 죽인 놈이다”라고 말하고 입을 닫을 때, 이 비극적 운명론자의 단호한 침묵이 모든 차이를 사소화하며 보는 이의 심금을 울린다.
<04:00-1950>은 많이 언급되진 않았지만 여기엔 이만희적 세계의 진경이 있다. 어린 병사들을 이끄는 박중사(장동휘)는 그 세속적 차이에도 불구하고 <군번 없는 용사>의 영훈과 한 핏줄의 인물이다. 인민군의 침공이 시작되자 곧 해일 앞의 섬이 되어버린 벙커 안에서 그는 부하들에게 이렇게 말한다. “군인은 판단하는 사람이 아니다. 다만 신념에 따라 움직인다. 아군이 다시 오리라는 신념.” 그러나 그는 알고 있다. 방어선은 완전히 무너졌고, 그들은 고립무원의 연옥 속에서 죽어갈 것이다. 판단은 금지되고 신념은 배반당한 채 죽음에 이르는 침묵의 기다림만이 허락된다.
그러므로 이 고립된 사내들의 벙커는, <귀로>의 억압된 가정, <생명>의 매몰된 탄광, <물레방아>의 비극적 순환이 영원히 되풀이되는 마을, <검은 머리>의 지하 아지트와 완전히 동질적인 공간이다. 그것은 <휴일>에서 휴일이라는 시간으로까지 확장된다. 자신의 의지와 무관하게 그 곳에 내던져졌으나 한번 도착하면 결코 벗어날 수 없는 영겁의 폐쇄회로와 같은 장소. <04:00-1950>은 전쟁 장르를 빌어, 이만희의 영화세계를 관류하는 삶이라는 장소의 폐쇄공포를 형상화한다.
영화의 3분의2는 벙커 안에서 찍혔고, 카메라는 이 왜소한 공간 안에서 믿을 수 없이 역동적인 움직임으로 공포의 침묵에 빠진 병사들의 몸짓과 눈빛을 담아낸다. 이 영화를 보면 한하사(김성옥)라는 인물을 잊기 힘들다. 어두운 표정을 지니고 있지만 몹시도 충직한 이 거구의 병사는 다가오는 죽음의 폭음을 들으며, “긴장한 거야? 왜 그렇게 말이 없어”라는 전우의 물음에 무심하게 대답한다. “긴장은 네가 하고 있어. 나는 다만 조용할 뿐이야”(한국 영화사의 명대사 10베스트를 뽑는다면 반드시 넣고 싶은 바로 그 대사.)
그는 곧 폭격에 귀먹고, 영혼이 빠져나간듯한 멍한 얼굴로 그에겐 침묵의 바다와 같을 전장의 황야를 오래도록 바라본다. 피폭 직후 그의 얼굴이 후경에 잡힌 씬은 아마도 이 영화에서 가장 인상적인 장면일 것이다. 세상의 소리를 들을 수 없으므로 비로소 죽음의 도래를 듣게 된 사내의 미동도 없는 한없는 적막의 순간. 단언컨대 이 장면은 이만희가 완성한 수많은 스펙터클을 다 끌어 모아도 결코 미치지 못할 만큼 아득하게 넓고 깊다. 그리고 한 하사는 불현듯 일어나 들판의 교회를 향해 걸어가다 총알세례를 받고 쓰러진다. 나는 다른 전쟁영화에서 이 인물만큼 헤어나올 수 없는 비애에 침잠한 인물을 본 기억이 나지 않는다.
동정은 쓰레기이고 각성은 허위이며 사랑은 억압이 된 세계, 그 출구 없는 폐쇄공간에서 이만희의 인물들은 죽어가되 원망하지 않고, 악한으로 단죄될지언정 변명하지 않는다. 40대의 이만희는 술을 거르지 않았고 육체는 안에서 무너져갔으며, 세상은 더 차가워졌다. 그는 직업인으로서의 감독으로 살아남기 위해 필사적으로 상업적 스펙터클을 추구하다, 불현듯 멈춰서 깊은 신음과도 같은 전쟁 영화 한편을 만들었다. <04:00-1950>은 장르의 도식 위에 고도의 내면적 세계를 투영해온 이만희의 걸작 중 한 편일 뿐 아니라, 한국 영화사의 빼놓을 수 없는 보석으로 재평가될 것으로 믿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