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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울에 비친 청년의 죽음
<초록물고기>는 IMF 외환위기가 시작되던 그해(1997년) 초에 발표됐다. (투기)자본으로 누구든 부자가 될 수 있다는 꿈을 잔뜩 부추길 때다. 그런 돈이 몰려든 대표적인 곳이 부동산 개발일 터다. <초록물고기>는 일산신도시 개발을 배경으로 삼고 있다. 한쪽엔 현대식 고층 아파트 숲이 들어서고, 또 다른 쪽엔 논과 밭, 그리고 서민층 집들이 여전히 가난을 드러내고 있을 때다. 지금도 그렇듯 개발과 파괴의 의미가 대단히 혼란스럽게 뒤섞여 있는 셈이다. 말하자면 <초록물고기>는 20년 전에 발표됐는데, 여전히 한국 사회의 단면을 날카롭게 비추는 ‘우리의 거울’로 작동하고 있다.
막 제대한 막동(한석규)은 경의선 기차를 타고 집으로 가고 있는데, 기차 안에서 어느 여성(심혜진, 나이트클럽 가수)이 불량배들에게 놀림을 당하는 걸 막으려다 거꾸로 얻어터진다(이문식이 불량배로 나온다). 사회로 나오자마자 주먹질부터 당한 막동은 고향 마을 앞에서 동네 남정네들이 서로 악다구니를 쓰며 싸우는 것을 본다. 사람뿐 아니라 고향의 외관도 많이 변해 있다. 마을 주변엔 붉은색 네온사인이 번쩍인다. 아직은 군복을 입은 남자의 시선에 비친 세상인데, 사회는 군대보다 더 사납게 변해 있는 것이다.
<초록물고기>는 2000년대 이후 본격적으로 제작되던 조폭영화의 맹아이기도 하다. 조폭영화의 불온성은 제도의 부정일 테다. 기득권이라곤 전혀 없는 하층민 출신이 ‘남들처럼’ 살아보기 위해서는 ‘질서’를 지킬 수 없는 것이다. 질서를 무시하는 폭력적 위반, 이것은 조폭영화의 대중적 매력이다. 취직이 급한 막동이는 배태곤(문성근)이라는 부동산개발업자 행세를하는 조폭의 도움을 받으며 ‘자연스럽게’부하가 된다(부하로 송강호도 등장한다). 막동이가 적극적으로 조폭이 됐다기보다는 돈에 이끌려 어색한 자리에 끼어든 것이다. 당시의, 그리고 요즘의 많은 청년이 내키지 않는 곳에서 어정쩡하게 사회의 한 부분을 메우고 있듯 말이다.
조폭 두목, 그의 애인인 나이트클럽 가수, 그리고 취직이 급한 제대군인, 사회의 주류에 편입되기에 한참 멀어 보이는 이 세 사람의 삼각관계는 <초록물고기>의 멜로드라마 성격을 강화하는 틀이다. 이창동 감독의 영화는 전부 장르적으로는 멜로드라마다. 사랑으로 연결된 사람 사이의 관계가 있고, 이를 부수는 사회적 명령이 있다. 막동은 제대하자마자 가족관계가 붕괴된 현실부터 맞닥뜨린다. 일산 지역이 개발되자, 아마 농사를 지었을 막동의 엄마는 파출부로, 여동생(오지혜)은 다방 종업원으로 일하고 있다. 그러는 사이 가족들은 뿔뿔이 흩어졌다. 돈에 대한 사회적 열망은 가족 사이의 ‘자연스러운’ 관계마저 가만히 놔두지 않은 것이다.
유사가족 관계를 보여주는 조폭의 동료들도 돈에 따라 태도를 바꾼다. 두목 배태곤은 사랑한다면서 이익을 위해 애인에게 ‘성접대’를 지시하고, 막동은 두목의 애인을 사랑하지만 돈이 더 급해 그녀에 대한 마음을 접는다(막동은 사고를 치던 날, 사랑의 상징인 붉은 스카프를 불태워버린다). 나이트클럽 가수도 막동에게 마음이 있지만, 배태곤이 제공하는 경제적 편리함을 물리칠 수 없다. 어찌 보면 전형적인 멜로드라마의 공식인데, 세 인물은 모두 사회적 명령, 곧 돈의 위력 앞에서 자신의 소망을 내려놓는다.
‘개발’이라는 이름 아래 부를 좇아 내달리는 세상이 개인의 일상을 가만 놔둘 리 없다는 점을 <초록물고기>처럼 세밀하게 관찰한 작품도 드물다. 이창동의 장편 데뷔작인데, 첫 작품에서부터 감독의 영화적 태도가 분명히 드러나 있는 셈이다. 개인의 삶을 허무는 사회적 외부의 힘은 이후에도 이창동식 멜로드라마의 주요 모티프로 작동한다. 부패와 폭력의 정치(<박하사탕>(1999)), 효율성으로 치환된 사람의 가치(<오아시스>(2002)), 돌이킬 수 없이 벌어진 서울과 지역의 격차(<밀양>(2007)), 자식들을 괴물로 만드는 교육의 붕괴(<시>(2010)) 등은 그대로 개인의 삶을 황폐하게 만드는 사회적 조건이다. 경제, 개발 일방의 주술 같은 배금주의의 열망은 20년 전 <초록물고기>에서 막동이의 목숨을 앗아갔는데, 그 주술은 지금도 영험을 발휘하는 것 같다.
by.
한창호(영화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