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나라에서는 1933년 <신동아> 6월호에 실린 최영수의 ‘토키만화가 되기까지’란 글에 처음 애니메이션이 등장한다. 이는 당시 수입되어 상영되던 토-키 만화에 대한 담론 성격을 가진 글이다. 유현목 감독의 <한국영화발달사>에 의하면 우리나라에서는 1931년부터 토키만화가 상영되었다고 한다. 그러나 우리 애니메이션의 구체적인 제작 기록은 1936년 11월 25일자 <조선일보> 기사에 등장한다. 미키마우스나 베티부프가 전 세계적으로 이름을 떨치고 있다고 전제한 뒤, 조선에서도 김용운·임석기 등에 의해 설립된 청림촬영소에서 당시 400피트(약 134m) 정도 제작되었다는 것과 개를 의인화해 표현한 캐릭터 그림을 소개하고 있다.1 하지만 안타깝게도 이후의 제작 완성과 상영 기록은 찾을 수 없다.
이후 구체적 상영 기록은 HLKZ-TV의 미술담당이던 문달부가 제작한 와 <럭키치약> CF가 나오는 1956년까지 기다려야 했다. 6?25전쟁으로 인해 피폐한 상황에서 그는 촬영을 제외한2 기획, 레이아웃, 원화, 동화, 트레스 등 모든 과정을 혼자 해냈다.
애니메이션이 본격적으로 제작되기까지는 신동헌의 공이 크다. 신동헌은 1959년 신동헌프로덕션을 설립하고 CF애니메이션을 제작하기 시작하는데, 1960년 <진로소주> CF가 크게 성공해 두 번 더 CF를 만든다. 그중 1962년 만든 <진로 파라다이스>편에서는 프리레코딩시스템(Pre-recording system)의 도입과 풀(Full)애니메이션으로 제작3해 사회적으로 큰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당시 디즈니의 애니메이션 영화를 대한극장과 세기극장에서 상영해서 좋은 반응을 얻었던 세기상사는 진로소주의 엄청난 반응에 고무되어 신동헌에게 장편 애니메이션 영화 제작을 의뢰한다. 이것이 우리나라 최초의 장편 애니메이션 영화 <홍길동(1967)>의 탄생 배경4이다.
신동헌은 그의 동생인 신동우가 당시 <소년조선일보>에 연재하던 <풍운아 홍길동>을 애니메이션 <홍길동>으로 제작한다. 1965년 가을 무렵 기획을 시작해 1966년까지 제작을 마치고, 1967년 1월 21일 세기극장과 대한극장을 시작으로 부산의 문화극장, 동보극장, 광주의 시민극장 등에서 일제히 개봉되어 2월 8일까지 상영되었고, 그해 8월 16일과 17일 이틀간 시민회관에서 재개봉되기도 했다.5 당시 광고 기록에 의하면 개봉 6일 만에 12만 명이 관람했다고 하니 2주간 개봉한 것을 감안하면 38만 명이 넘는 기록이다. 이는 현재 흥행 기록으로도 엄청난 성적이었다. 이렇게 <홍길동>의 제작과 흥행은 우리 애니메이션의 역사에 중요한 의미를 가진다. 이로 인해 1972년까지 세기상사는 8편의 장편 애니메이션 영화를 제작했고, 다른 제작사에서도 3편의 장편 애니메이션 영화가 제작되기에 이른다. 이는 우리 애니메이션의 역사가 본격적으로 시작되었음을 의미한다.
<홍길동>은 한국 최초의 장편 컬러 애니메이션 영화로 1967년 영화 흥행 2위에 올랐으며, 같은 해 대종상 비극영화상을 수상했다. 이러한 흥행 실적도 중요하지만, 작품적으로는 이중촬영기법의 촬영, 선 녹음 후 작화 방식의 풀 애니메이션 제작, 오케스트라와 합창단을 동원하는 등 우리 애니메이션의 신기원을 열었다는 데 더 큰 의미가 있다. 또한 이 작품에 참여하며 애니메이션을 시작한 김대중, 정욱, 배영랑, 유성웅 등은 이후 한국 애니메이션 영화의 주요 감독 및 제작자로 성장한다. 따라서 우수한 애니메이션 제작인력을 배출하는 데도 <홍길동>의 역할은 매우 크다.6 이로서 <홍길동>은 장편 애니메이션 영화를 만들 기술과 인력이 없던 당시 한국에서 수많은 역경을 이겨내고 완성한 작품으로 높이 평가된다.
이렇게 화려하게 시작한 우리 애니메이션의 역사는 신동헌 감독이 이듬해 대영동화제작소에서 <호피와 차돌바위>의 제작을 마지막으로 창작을 그만둠으로써 크나큰 손실을 입는다. <홍길동>의 제작사였던 세기상사 또한 이후 장편 영화를 여덟 편이나 제작했으나 흥행에는 크게 성공하지 못한다. 그러나 세기상사의 이러한 노력이 우리 초창기 애니메이션 산업의 발아에 크나큰 공헌을 했음은 분명해 보인다.
우리 애니메이션의 역사는 1972년 세기상사의 <괴수대전쟁> 개봉 이후 제 4차 영화법의 개정으로 3년여 간의 공백기를 가졌으나, 1976년 김청기의 <로보트태권V>와 1977년 임정규의 <태권동자 마루치 아라치>가 대명영화로 개봉해 다시 흥행에 성공함으로써 우리 애니메이션계는 새로운 붐을 맞는다.7 이 작품들은 당시 일기 시작한 태권도에 대한 관심에 힘입어 태권도 소재의 애니메이션이 흥행에 성공한 것이다. 이를 계기로 애니메이션 제작이 갑자기 늘어나기 시작한다. 또한 1970년대 초반부터 우리 애니메이션계는 외국의 하청작업을 시작했고, 국내 창작 애니메이션의 경쟁도 본격화한다. 하지만 창작을 위한 준비와 자본 조달에 어려움을 겪은 제작사들은 작품성의 저하와 외국 작품의 도용과 같은 심각한 문제를 가져왔다.
하지만 참신한 기획 없이 단순히 흥행만을 바라보고 여러 제작사가 난립하면서 많은 문제를 야기했다. 이는 기획력의 부족과 제작자본의 영세함 때문도 있었지만 창작에 대한 개념이 확고하게 자리매김하지 않은 탓도 있었다. 이들 제작사는 심지어 일본의 하청작품을 제목만 바꾸거나8 미국 TV 드라마의 캐릭터를 그대로 표절하는 것도 서슴지 않았다. 이런 준비되지 않은 과도한 경쟁과 부실한 작품의 양산은 극장으로 몰려오던 관객을 다시 TV 앞으로 돌려보내는 역기능만 했다.
이러한 시장 상황을 타개하기 위해 나온 것이 1979년 개봉한 김청기의 <똘이장군-제3땅굴 편>으로 반공을 주제9로 한 애니메이션이다. 1970년대 말부터 정치상황은 이러한 애니메이션을 정책적으로 활용했고, 제작자들은 초등학교의 단체관람으로 제작비를 회수할 수 있었다. 이로 인해 세계 어디에도 없는 우리나라만의 비극적인 애니메이션 영화들이 탄생한다.
이런 작품들은 반공이라는 명분으로 지나치게 황당무계하거나 상투적이었으며, 스토리는 앞뒤가 맞지 않고, 인과관계가 떨어지는 작품을 생산하는 등 그 폐해가 심각해, 극장용 작품에 대한 비판이 거세졌다.10 이렇게 창작의 노력과 기술개발 없이 버텨오던 극장용 애니메이션은 경쟁력이 떨어졌고, 1979년부터 1980년 초까지 선우프로덕션에서 기획한 꿈나무만화극장 시리즈와 같은 좋은 기획의 작품도 있었으나 점차 관객에게서 외면받았다. 또 다른 원인으로는 TV 컬러방송의 시작과 일본과 미국에서 쏟아져 들어온 비디오의 보급이 전반적인 침제를 가중시켰다.
그러다 1988년 서울올림픽을 앞두고 방송계에서 국가적 자존심과 민족적 주체성을 찾으려는 움직임이 일었다. 한국 것이 아닌 외국 것만 방송하는 우리 TV 방송에 대한 외국인들의 비판적인 시각을 의식했던 것이다. 이러한 이유에서 KBS와 MBC는 1987년부터 자체 제작 애니메이션을 기획하게 된다. <아기공룡 둘리>나 <달려라 하니> 같은 시리즈에 언론의 반응은 매우 호의적이었고, 시청자의 반응도 좋았다. 이로써 TV애니메이션의 시대11가 열려 새로운 창작의 계기가 만들어졌다.
이와 더불어 1990년대 중반부터 국가에서는 산업적으로 애니메이션을 바라보고 지원하기 시작한다. 이에 각 대학에 애니메이션 관련학과들이 개설되고 새로운 세대들이 새로운 감각으로 애니메이션을 제작한다. 이들은 기존에 셀 애니메이션 제작방식에서 벗어나 다양한 종류의 기법을 실험하고, 자신들의 이야기를 표현하기 시작했다. 또한 1996년부터 춘천애니타운페스티벌(CAF)과 서울만화애니메이션페스티벌(SICAF) 등의 애니메이션 전문축제를 통해 세계 애니메이션 영화의 흐름을 접하게 된다. 이들은 2000년 이후 다양한 작품으로 성과를 내기 시작한다.
2000년대는 우리 애니메이션의 새로운 도약기로 평가된다. 이는 컴퓨터 애니메이션 제작기술력을 바탕으로 한 작은 성과들이다. 또한 2002년 제작된 <마리이야기>와 2003년 제작된 <오세암>이 안시애니메이션페스티벌에서 각각 그랑프리를 수상함으로써 우리 애니메이션의 가능성을 열어주었다. 이후 3D로 제작된 TV 시리즈 <뽀롱뽀롱 뽀로로>와 웹을 기반으로 한 플래시 애니메이션 <뿌까> <마시마로> 등의 작품은 세계 시장에서 한국의 애니메이션을 주목하게 했다. 그러나 이러한 성과가 나오기까지는 많은 실패도 따랐다. 2000년 들어 불기 시작한 애니메이션 산업에 대한 기대로 200억원이 넘게 투자되는 극장용 장편 애니메이션 제작 프로젝트가 만들어졌지만 기술과 뛰어난 영상에 어울리는 매력적인 스토리를 개발하지 못해 실패하고 말았다. 그 여파로 장편 애니메이션 제작에 대해 투자자가 외면하게 만들었고, 다른 작품의 제작에 큰 부담으로 작용하고 있다. 매력적인 스토리의 개발과 성공사례의 부재는 아직까지도 우리 애니메이션의 가장 큰 고민과 과제가 되고 있다.
2006년 재개봉한 <로보트태권V>는 복고의 유행으로 60만 명 이상의 관람객을 끌어 모으기도 했지만 최근 창작은 아니다. 이를 바탕으로 실사영화가 준비되고 있지만 한국 애니메이션의 극장 상영작은 아직도 새로운 도약의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극장용 작품은 2000년 들어 세계 시장에서 많은 애니메이션이 성공을 거두는 동안 우리는 입맛만 다셔왔다. 세계가 우리의 기술력에 관심을 가지게 되면서, 애니메이션이 가진 본래의 매력보다 기술과 그래픽에만 관심을 가져온 때문이 아닌가 한다. 관객은 이야기를 향유하고, 그 이야기의 매력으로 캐릭터를 기억한다. 매력 없는 이야기의 캐릭터가 성공한 사례는 아직 없다. 최근 TV시리즈 <뽀롱뽀롱 뽀로로>의 성공을 눈여겨본다면 잘 만들어진 이야기와 캐릭터가 어떻게 결합하는지, 앞으로 우리 애니메이션의 방향이 어디로 가야 할지 가늠하게 될 것으로 보인다.
* 이 글은 시장에서 유통되고 있는 애니메이션만을 다루었음을 밝힌다.
1 허인욱 저, <한국애니메이션 영화사>, 신원미디어(서울:2002)p.16~17
2 허인욱과 황선길 등은 모든 과정을 문달부 혼자 했다고 기록하고 있으나, 문달부에게 확인한 바로는 촬영은 16mm 볼렉스 카메라로 당시 촬영기사인 마종원이 했다고 한다.
3 황선길, 허인욱 등은 1960년 만들어진 <진로 소주> CF부터 선 녹음에 의한 프리레코딩 시스템과 풀 애니메이션으로 제작한 것으로 기록하고 있으나 본인이 인터뷰(한승태 편, <홍길동, 그리운 얼굴>애니메이션박물관(춘천: 2004))한 바로는 1960년 4월19일 4.19학생의 거가 일어난 날 시사회를 가졌던 최초의 CF는 지프차가 가다가 연료가 없어 진로소주를 넣고 간다는 내용이었고, 두 번째 진로소주 CF인 1962년 <진로 파라다이스>편 부터 이런 제작 기법이 도입되었다고 한다.
4 한승태 편, <홍길동, 그리운 얼굴>,애니메이션박물관(춘천: 2004)p.63
5 허인욱 저, 앞의 책, p.38
6 한승태 편, 앞의 책, p.50
7 김청기는 1976년 <로보트태권V>를 시작으로 1997년 7월<임꺽정>까지 무려 25편이라는 애니메이션을 감독하는 기록을 세운다.
8 1979년 송정훈의 <동물 보물섬>은 일본의 <보물섬>을 제목만 바꿨다.
9 1976년 문공부에 심의를 받은 <로보트 태권V>의 시나리오에는 ‘아동방공주체사상을 고취하기 위한 계몽물’로 작품의 성격을 분명히 하고 있다. 이는 1973년 제 4차 영화법의 개정 이후 규제를 벗어날 목적으로 만든 것으로 보인다. 직접적으로 반공을 주제로 삼았다기 보다는 안타고니스트를 막연하게 붉은 제국으로 표현하여 암시만 주었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본격적인 반공을 주제로 하여 북한과 대립관계를 설정한 것은 <똘이장군-제3땅굴 편,1979>부터 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10 <한국일보> 1982년 8월 19일자에는 ‘漫畵 영화 어린이 視力 해친다’는 제목의 특집기사가 실려 있다. 내용에는 인터뷰 기사를 포함하고 있는데, 다음과 같다……. ‘세종문화회관 별관에서 두 아이와 함께 <수퍼삼총사>를 보았다는 金榮妊씨(39·서울 恩平區 津寬外洞)는 “세 소년이 우주의 악당 안드로 제국에 맞서 싸워 이긴다는 내용도 허무맹랑하지만 原畵를 적게 사용해 주인공의 동작이 유연한 맛이 없다”고 지적했다. 또 주인공이 어느 나라 사람인지 모르게 묘사돼 있고 색상이 너무 강렬해 눈이 금세 피로해졌다고 말했다……’ 기사에는 그 외에도 제작자였던 유현목 감독의 인터뷰도 싣고 있다. 반공을 주제로 제작된 <수퍼삼총사>는 우주를 배경으로 한 이야기로 그 자체로 황당 무계한 작품이다.
11 황선길 저, 앞의 책, p.16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