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립애니메이션에서 ‘독립’이라는 것은 받아들이는 사람에 따라 또는 어떤 잣대를 들이대는지에 따라 그 의미가 확연히 달라질 수 있다. 때로는 형용할 수 없을 정도의 무게감으로 다가올 수도 있고, 때로는 내가 원하고 생각한 대로 내 작품을 만들어보겠다는 의지의 반영일 수도 있다. 88올림픽의 성공적 개최는 사회문화 전반의 성숙화를 이룩하는 한편, 문화 콘텐츠 개발이 문화 발전의 원동력이라는 인식을 심어주면서 그 토대 위에 재미있게도 대학에서 애니메이션 학과가 하나 둘씩 생겨나기 시작했다.
다른 나라에 비해 50여 년 뒤늦은 한국 애니메이션은 그 출발에서도 미국과 일본, 동유럽 국가와 차별적인 환경에서 시작되었다. 미국은 할리우드와 손잡은 상업적 제작 환경을 선호하며 발전해왔으며, 유럽 애니메이션은 예술적이거나 혹은 실험적이고 독립적인 제작 환경을 지향하며 발전해왔다. 또한 동유럽에서는 사회주의에 기반을 둔 정부의 적극적인 개입에 의해 제작 시스템이 이뤄져 성장했다. 그러나 한국 애니메이션은 매우 제한적인 하도급 시스템 속에서 축적해온 노하우와 아주 드물게 독립적인 시도들을 그 근간으로 하고 있다.
1950년대 중반 TV 광고로 그 첫발을 내딘 국내 애니메이션은 1960년대 중반에 이르러 장편 애니메이션 제작 경험이 전무했던 환경에서 최초의 극장용 장편 애니메이션 <홍길동>(신동헌, 1967)을 선보이게 된다. <홍길동>의 흥행 성공은 국내에서 애니메이션 장르가 가지는 가능성에 대한 확신을 가져왔고, 이로 인해 많은 장편이 뒤를 이어 줄줄이 제작되면서 한국 애니메이션은 전성기를 누리게 되었다. 그러나 당시 애니메이션은 문화산업으로 이해되기보다는 어린이를 대상으로 하는 한낱 오락용이라는 인식이 지배적이었던 탓에 제작사들은 애니메이션을 오로지 돈벌이 수단으로만 여기게 되었고, 돈이 되지 않으면 바로 제작에서 손을 떼는 상황이 비일비재했다. 또한, 1970년대를 전후로 각 가정에 TV가 본격적으로 보급되면서 극장용 장편 제작은 점차 위축되고 설상가상으로 일본이나 미국에서 수입된 애니메이션이 TV 전파를 타고 무차별적으로 방영되기 시작하자 한국 애니메이션 산업은 침체기로 빠져든다. 그러나 이런 침체된 한국 애니메이션 산업에도 볕들 날이 왔다. 1970년대 중반 제작 발표된 <로보트 태권 V>가 대성공을 거두자 극장용 장편 애니메이션 제작은 다시 활기를 띠기 시작했고, 한국 애니메이션의 양적 성장의 계기가 되었다. 물론 1980년대 이후 미국과 일본 애니메이션 작품의 본격적인 하도급 제작 시작은 한국이 세계 최대의 하도급 제작 국가로 자리매김하는 계기가 되었고, 이런 엄청난 물량의 하도급 제작 경험은 오히려 한국 애니메이션 역사에서 창작 애니메이션 시스템 구축을 방해하는 저해요소가 되었다는 견해와 이를 발판으로 애니메이션 제작 노하우를 축적할 수 있었다는 긍정적인 평가가 양립하는 이중적 잣대를 제공하는, 재미있고 독특한 애니메이션 역사를 갖게 된다.
이러한 우여곡절을 겪으며 성장한 한국 애니메이션은 1990년대 이르러 서서히 전환기를 맞이하게 된다. OEM으로 실력을 다져온 국내 애니메이션 제작 업체들은 하도급 기술만으로 급변하는 애니메이션 산업의 패러다임과 시대적 요구에 부응할 수 없다는 한계를 느끼고 제작 시스템의 개편에 주력하기 시작했으며, 1990년 중반부터 본격적으로 창작기획 애니메이션 제작으로 전환하게 되면서 한국 애니메이션은 지각 변동을 예고하며 변화를 모색해 나간다. 여기서 국내 업체의 자발적인 기획창작의 움직임을 한국 애니메이션의 한 축으로 보자면, 또 다른 한 축에는 독립애니메이션의 태동을 변화의 움직임으로 꼽을 수 있겠다.
1990년대 들어서면서 제한적으로나마 표현과 창작의 자유가 생겨나고 다양한 형태의 문화운동이 일어나면서 애니메이션도 자유로운 표현의 한 방식으로 문화운동에 참여하기 시작한 것이다. 더불어 대학에도 애니메이션과가 설립되면서 젊은 창작자들이 애니메이션계로 대거 유입되었고, 기존의 메이저 제작사와는 또 다른 방식의 접근이 이뤄지면서 예술성과 실험, 독립적인 측면들이 강화되었고 독립애니메이션은 서서히 독자적인 영역을 구축해 나간다. 그리고 여기에 한몫을 한 것이 바로 디지털 시스템의 기술적 확장이었다. 국내 CG 산업이 세계 최고를 자랑하는 IT 기반의 첨단 디지털 기술로 영상제작 환경을 대체하게 되자 애니메이션 분야도 디지털 환경을 빠르게 수용했다. 이런 급속한 변화 속에서 애니메이터들뿐만 아니라 일반인도 영상과 사운드를 자유롭게 조작하며 작업할 수 있는 환경이 마련되었고, 애니메이션 창작 활동도 활발해지기 시작했다. 특히, 웹 기반의 애니메이션, 스마트폰 등과 같은 플랫폼의 확장은 디지털 콘텐츠를 매체로 하는 영상 분야의 새로운 파생 산업으로 확대되면서 새로운 콘텐츠 개발을 요구하기에 이르렀다.
드디어 시작된 반란
2000년대를 전후로 이명하 감독의 <존재>, 계원디자인예술대학의 김은수 외 6명의 학생작품 <아빠하고 나하고> 등이 세계 유수의 애니메이션 페스티벌에서 수상하는 기염을 토하면서 전 세계에 한국의 애니메이션을 알리기 시작했고, 여기에 국내 애니메이션 제작사는 기획력 강화, 한국 고유의 애니메이션 정체성 확립 등 전문적인 제작 시스템으로 전환을 시도함과 맞물리면서 국내 애니메이션은 터닝 포인트를 맞게 된다. 한편, 애니메이션과 영상산업을 위한 기술개발과 새로운 디지털 콘텐츠 제작은 3D로 구현된 캐릭터의 사실적인 표현과 섬세한 움직임을 가능하게 했고, RG 애니메이션 스튜디오의 임아론 감독은 <엔젤>이라는 3D 단편 애니메이션으로 히로시마 국제 애니메이션 페스티벌에서 수상하게 된다. 그리고 그 뒤를 이어 3D를 기반으로 다양한 애니메이션이 활발하게 제작되기 시작했다. 이런 분위기 속에서 <마리이야기>나 <원더풀 데이즈>와 같은 극장용 장편이 제작되고, 해외 유수의 영화제에서 상영 요청 쇄도와 함께 뜨거운 반응을 얻어냈다. 그럼에도 국내 박스오피스 흥행에서는 그다지 좋은 성적을 얻지 못하면서 국내 애니메이션 제작투자는 위축되었고, 그 결과 다른 장편 후속작들의 제작이 늦어지는 시련을 가져왔다.
애니메이션은 각 국가의 제작 환경에 따라 독특한 형태로 발전해 왔지만, 결국 독립애니메이터들의 홀로서기는 어느 나라이건 비슷한 양상을 보인다. 일본은 상업애니메이션과 독립애니메이션의 두 축이 비교적 수평적 조화를 이루며 발전해온 경우에 속한다. 미야자키 하야오와 다카하사 이사오처럼 상업적인 측면에서 일본의 애니메이션을 지키고 있는 감독군이 한 축을 이루고 있다면, 또 다른 한 축에는 바로 얼마 전에 타계한, ‘일본 독립애니메이션의 거장’이라 칭송받고 있는 가와모토 기하치로 감독과 같은 독립애니메이션 그룹들이 있다. 물론 가와모토 감독 역시 살아생전 독립애니메이션 제작을 위해 때로는 TV 시리즈나 광고를 제작하는 등 자신의 창작 세계를 지켜나가기 위해 끊임없이 노력해왔으며 팔순이 훌쩍 넘은 나이에도 왕성한 작품 활동을 해 ‘작가주의’라는 수식어가 어울리는 감독으로 기억되고 있다. 미국의 경우에도 빌 플림턴 감독처럼 메이저 제작사들의 달콤한 유혹을 뿌리치고 독자적인 작품세계를 구축해 나가는 독립애니메이션 작가군이 존재한다. 빌 플림턴 감독은 독립적 창작의 자유를 위해 상업애니메이션 제작시스템에 안주하기보다는 강연이나 워크숍, 광고제작을 통해 벌어들인 수입을 모두 자신의 독립작품 제작에 ‘재투자’하는, 결코 쉽지 않은 길을 택하며 창작활동을 지속해왔다. 1998년 <나는 이상한 사람과 결혼했다>와 2001년 <뮤턴트 에일리언>으로 안시페스티벌에서 장편부문 그랑프리를 수상했으며 아카데미 어워드의 애니메이션 단편부문에도 여러 차례 노미네이트되는 등 엽기적인 유머와 엉뚱한 상상력으로 미국의 거대 주류 상업주의 애니메이션과는 차별적인 작품세계를 구축해나가고 있는 독특한 독립애니메이션 감독으로 정평이 나 있다. 최근에도 <천사와 바보>라는 장편 개봉과 함께 여전히 왕성하게 활동하고 있다.
그렇다면 한국의 독립애니메이션 제작 상황은 어떤가? 2000년대 중반 이후 극장용 장편 애니메이션 제작의 휴지기 속에서도 독립애니메이션 감독들의 작품 제작은 조용히 진행되고 있었다. 물론 창작 애니메이션 산업 기반이 흔들리는 상황에서 독립애니메이션 제작은 어려운 일이었지만 애니메이션이 문화 콘텐츠로 인식되면서 국가의 단편 애니메이션 지원정책으로 독립애니메이션은 본격적으로 날갯짓을 시도하게 된다. 그리고 2005년, 그간 소모임으로만 지속되던 독립애니메이션 창작자들 간의 만남이 결실을 보게 되고, 이들이 의기투합해서 드디어 한국의 유일한 독립애니메이션 영화제인 ‘제1회 인디애니페스트(Indie-AniFest)’ 행사를 개최하기에 이른다. 이 행사는 독립, 실험, 열정, 비전이라는 캐치프레이즈를 내걸고 독립애니메이터들의 작품 활동을 육성, 지원하고 나아가 서로 소통하며 미래의 비전을 제시하는 열린 영화제로 발전할 것을 다짐하며 올해로 6회째를 맞이했다. 인디애니페스티에서는 재미있고 다양한 독립애니메이션 작품을 모두 만나볼 수 있다. 일본 히로시마 국제 애니메이션 페스티벌에서 <존재>라는 작품으로 신인감독상을 수상하면서 독립애니메이션계의 유망주로 떠오른 이명하 감독의 차기작 <스페이스 파라다이스>는 여느 독립애니메이션 작가들처럼 제작비 마련에 어려움을 겪기도 했으나, 다니던 애니메이션 회사마저 1년간 휴직하면서 완성한 감독의 열정이 고스란히 담겨 있는 작품이다. 이번 인디애니페스트 영화제에서 상영된 한국영화아카데미 제작연구과정 졸업 작품이자 극장에서 개봉된 장편 애니메이션 <로망은 없다>는 제작에서 배급까지 독립애니메이션이 나아가야 할 또 다른 방향을 제시한 독특한 작품이기도 하다.
여러 독립 작가가 해외 영화제에서 수상을 하고, 그 작품성을 인정받아도 여전히 차기작 제작비 마련에 고심하고 있다. 특히 제작비 회수에 대한 보장이 거의 없는 단편 애니메이션의 경우 더욱 어려운 제작 환경이지만, 식지 않는 열정과 도전정신은 상업애니메이션과 함께 한국 애니메이션을 이끄는 힘이 되고, 바로 이런 이유로 독립애니메이션의 선전이 반갑다. 단기간에 일궈낸 디지털 기술의 발전과 새로운 소재와 한국적인 정서, 작품의 완성도를 위한 노력이 어우러지고, 그 바탕 위에 새로운 시스템의 시도들이 계속된다면 독립애니메이션계도 ‘쨍’하고 볕드는 행복한 시대가 곧 도래하지 않을까 한다. 그리고 나는 지금 그런 시도들을 하나 둘씩 보고 있는 것 같아 자꾸 기분 좋은 기대를 갖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