젊음은 스러지고 순수는 회복되지 않는다
올해 초 이성부 시인이 세상을 떴다. (완독하지 못한) 고인의 시집 <우리들의 양식>을 꺼내 들었다. ‘광주’라는 시가 맨 먼저 눈에 들어왔지만, 그보다 다음 장에 실린 ‘10년’이라는 시에 더 마음이 갔다. ‘10년’을 거칠게 풀어 쓰면 대략 이렇다. “피로 맹세하고 피의 말로 사랑하는 길을 가르쳤”던 새벽손님이 있어, “우리는 눈 부릅떠 손에 손을 맞잡고 거리를 밀어뜨렸”다. 세월이 흘러 우리는 “뿔뿔이 흩어졌”고, “아버지가 되었으며”, “몇 번이고 굴러떨어지는 언덕의 삶”에 굴종하고 있던 어느 날, “잊어버린 새벽손님은 또 나를 찾아와”, “내 어깨를 툭 치며 말을 걸었다”. 새벽손님의 급작스러운 방문에 놀란 나는 “타락한 자의 부끄러움을 느끼고 있었다”. ‘10년’은 이성부 시인이 1972년에 발표한 작품이다. 그런데 왜 ‘10년’을 읽자 이창동 감독의 <박하사탕> (1999)이 떠오르는 것일까.
이성부의 ‘새벽손님’과 이창동의 ‘기차’
<박하사탕>이 거슬러 오르는 1980년 5월의 광주와 아무런 공통분모도 없는데 말이다. 아마도 시의 마지막 대목이 일깨우는 어떤 인상 때문이 아니었을까. //그리고 나는 또 그 손님을 잊어버렸다./그리고 그 새벽은 어느 날 갑자기 죽었다고 전해졌다./겁보, 어둠, 안간힘, 짜증나는 말,/이런 것들로 뭉쳐진 나는 그 죽음을 멀리서만 바라보고 있었다. 비겁하게도/멀리서만 그 죽음의 불씨를 보고 있었다.// 시의 화자는 왜 새벽님의 죽음을 멍하게 바라보고만 있었을까. 그는 악몽처럼 찾아들던 새벽손님과의 10년을 곱씹고 있었던 것인지도 모른다. ‘10년’의 새벽손님은 <박하사탕>의 기차와 유사하다. <박하사탕>의 기차는 쉬지 않고 악몽을 실어 나른다. 악몽은 죽음보다 무섭다. 영호(설경구)는 높다란 철로 위에 올라 전속력으로 달려오는 기차를 향해 “나 돌아갈래!”라고 으르렁거린다. 영호는 지금 신과 마지막 거래를 하는 중이다. 악몽 이전의 그날로 나를 되돌려달라, 그러지 않는다면 나는 살아도 죽은 목숨이니. 그의 절규는 영혼과 육신을 송두리째 반납할 테니, 단 한순간이라도 악몽에서 벗어나게 해달라는 간절한 바람이다. 그때, 기적이 일어난다. 죽음이 영호를 덮치는 순간 시간은 멈춰 서고, 악몽의 기차는 갑자기 거꾸로 달린다. 핏발 선 영호의 눈에 야만의 시대, 환멸의 간이역들이 하나둘 보이기 시작한다.
박하사탕 같은 순수를 되찾기 위한 고통의 여정
<박하사탕>은 1999년의 봄부터 1979년 가을까지 김영호의 20년을 역으로 추적한다. 악몽의 기차는 야유회-사진기-삶은 아름답다-고백-기도-면회-소풍이라는 이름의 정거장을 지나는데, 시간의 결절점들이 불러낸 사건들은 역사(驛舍) 명이 환기하는 이미지를 배반한다. 옛 동료와의 ‘야유회’는 난장판이 되며, 첫사랑의 징표인 ‘사진기’는 팔아도 몇 푼 안 되는 고물에 불과하다. ‘삶은 아름답다’는 영호의 찬탄은 냄새나는 화장실에서 비아냥의 어조로 울려 퍼지고, 영호는 다른 여자를 품고서야 첫사랑을 입 밖으로 ‘고백’한다. 똥과 피로 더럽혀진 영호의 두 손은 ‘기도’로 씻기지 않으며, 영호를 찾아온 첫 번째 ‘면회’ 객은 싸늘한 주검이 된 여고생이다. 이창동 감독은 “처음으로 돌아가고 싶어서, 박하사탕의 색깔과 맛 같은 첫사랑의 순수한 시간으로 돌아가고 싶어서” 시간의 역순 구조를 택했다고 말한 적 있다. 순수의 종착역에 가닿기 위한 여정의 고통은 지나온 것보다 곱절의 고통을 감내해야 한다. 영호가 망각의 천으로 덮어두었던 상처의 환부에는 그토록 회피하고 싶었던 과오와 책임이 종양처럼 자라나 있고, 그래서 그는 매번 기적 소리에 절뚝거린다. 영호의 발작은 1980년 5월의 광주라는 지옥문을 통과한 뒤 출발점이었던 ‘소풍’이라는 간이역에 섰을 때 가까스로 멈춰 선다. 이때의 영호는 순진한 더벅머리 청년이고, 첫사랑 순임(문소리)은 거짓말처럼 영호에게 말을 건다.
우리 시대의 <죄와 벌>
그렇다면 이제 영호의 모든 죄는 사함을 받았고, 그의 아픔은 말끔히 사라졌는가. <박하사탕>을 우리 시대의 <죄와 벌>이라고, 일단 부를 수 있을 것이다. 시간의 순서대로 장면을 되돌려보자. 영호는 죄를 지었고, 그는 벌을 받았다. 혼자 죽기 억울해서 내 인생 망가뜨린 딱 한 놈만 쏴죽이고 싶었다지만, 어느 놈을 쏴 죽여야 할지 몰랐다고 오열할 때 영호는 이미 알고 있다. 생을 놓아야 할 이는 자신이라는 사실을 말이다. 그렇다면 이제 그는 죽음을 받아들이면 된다. 그런데 무슨 까닭에서 이창동 감독은 굳이 시간의 역순으로 이를 재현한 것일까. 가해자인 영호 역시 역사의 피해자였음을 보여주기 위해서? 그런 식의 동정과 연민을 구하고자 했던 것은 아닌 것 같다. <박하사탕>의 마지막 장면. 영호는 천변에 누워 하늘을 올려다본다. 잠시 후 그의 눈엔 그렁그렁 눈물이 고인다. 스무 살의 영호는 이때 누구를 바라보고 눈물짓는가. 마지막 장면을 첫 장면에 이어 붙여보자. 초췌하고 남루한 차림으로 철로에 올라간 영호는 여전히 술에 취해 행패를 부리고 있는가. 혹시 그의 극단적 선택은 윤리적 결단이 아닐까. 젊은 영호는 존재하지 않으며, 순수는 회복되지 않음을, 영호는 그 순간 깨달았을지도 모를 일이다. 이건 비단 영호의 자각만은 아니다. 젊은 영호의 눈동자에는 강물을 내려다보는 <시>의 미자(윤정희)도 어른거린다. 미자가 투신하기 전, 황급히 맞았던 이의 이름은 아마도 ‘새벽손님’이었을 것이다.
by.이영진(씨네21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