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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기영 10주기] 시대가 낳았지만 시대를 넘다
결국은 또 시간의 문제다. 뛰어난 예술가를 탄생시키는 조건에서 시간은 늘 주도권을 잡는다. 개인의 재능이 시간보다 앞설 때는 선구안을 갖게 되고 개인의 재능이 시간을 무시할 때는 초월성을 갖게 된다. 우리가 위대하다고 칭송하는 예술가들은 보통 두 가지를 동시에 이루어낸다. 갈수록 신화화가 더해가는 김기영 감독의 세계 역시 절반은 선구안에, 절반은 초월성에 기대고 있다.
고전기 한국영화를 생각할 때면 늘 신상옥 감독의 한 마디가 떠오른다. 보기 드물게 현실주의자였던 그는 까마득한 후예들의 감탄사에 이렇게 응수하곤 했다. “우리가 영화를 할 때는 우선적으로 잘 보이게, 잘 들리게 하는 것이 지상과제였다.” 이런, 눈부신 거장의 명성이나 찬란한 예술성, 단호한 미학적 태도는 어디 가서 질문한담? 그때의 당혹감이 잊혀지지 않는다. 그러나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은, 그렇게 기본기마저 어려운 궁핍한 조건 속에서 개척자 감독들이 하나 둘 씩 징검다리를 놓다가 잘 닦여진 대로를 건설했다는 점이다. 그러니까 오늘날 우리가 거장이라고 분류하는 감독들은 대부분 자수성가의 역사를 가지고 있어서, 그 사이에 켜켜이 쌓여있는 시간과 공간의 축을 정확히 세울 때 실체를 파악할 수 있을 것이다.
과학적 인식과 사실적 객관성의 접합
먼저 시간적으로 볼 때 김기영 감독은 영화매체에 대한 사고를 가장 먼저 시작하여, 가장 멀리 나아간 감독이다. 현실모사와 재현의 영역, 그래서 이미지보다 이야기가 더 중요했던 개척기 한국영화사에서 그는 가장 먼저 상상력과 환영성을 끌어안았다. 소재의 리얼리즘을 넘어서는 표현에 대한 자의식이 들어서는 순간이기도 했다. 1955년의 데뷔작 <주검의 상자>가 엉성한 시한폭탄의 이야기이지만 째깍째깍 시간의 분초를 쪼개는 쇼트들로 이루어진 영화라는 점은 그의 시작점이 무엇보다 ‘영상적’이었다는 점을 말해준다. 잘 알려지다시피 의사였던 그는 한국전쟁 피난지에서 기록영화를 만드는 것으로 영화매체와 만났다. 다시 말하면 과학적 인식이 사실적 객관성과 접합한 것이다. 연극반 활동으로 명성을 날렸던 서울대학 시절 번역극들도 대부분 셰익스피어의 정극이거나 스트린드베리와 입센의 자연주의 작품들이었다. 그런데 기록영화가 극영화로 전환되는 순간 그는 픽션의 장치를 적극적으로 사고했으며 허구성을 극단적으로 도입했다. 반상의 차이로 비극에 이르는 사극영화 <양산도>(1955)가 두 번째 작품인데 당시의 트랜드에 기댄 평이한 내러티브를 과감하게 일탈하는 기이한 설정들도 그 점을 잘 설명해준다.
어차피 연극이 아니고 영화라면, 또한 다큐멘터리가 아니고 극영화라면, 그 이유가 영화 안에 있어야 한다! 김기영 감독은 그 답변이 이미지이며 상상력이라는 것을 많은 인터뷰에서 강조한 바 있다. ‘한 장면만 보아도 김기영 것이라는 것을 알리기 위하여’ 고심했던 그가 일본 촬영기사 출신이 운영하는 진해의 사진관을 찾아가 조명법을 알아냈다는 일화는 기억할 만하다. 흑백영화의 질감을 입체적으로 조각하는 그 반사조명은 대표작 <하녀>(1960)를 지금 보아도 신비롭게 감싸고 있다. 그리고 시대별로 변주되는 <하녀> 시리즈가 컬러시대를 맞이하여 <화녀>(1971)로 바뀌면서 동원하는 형형색색 원색의 난반사는 도착증에서 분열증의 시대로 넘어가고 있음을 보여준다. 그는 어떤 의미에서 이미지의 과잉으로 내러티브의 결여를 메울 수 있었다고 생각한 감독이기도 하다. 그렇지 않고서야 60년 작 <하녀>의 그토록 탄탄한 내러티브가 뒤로 갈수록 허술해졌다는 점을 설명하기가 힘들다.
공간속에서 살아나는 컬트 감수성과 기이한 상상력!
압도적으로 평가받는 김기영의 컬트 감수성과 기이한 상상력은 공간적으로 풀 때 더욱 명확해진다. 이때의 공간이라는 것은 물론 그의 영화를 배태하고 요청했던 당시의 한국사회를 말한다. 상상력이라는 것은 현실의 윤곽을 떠날 수 없는 상대적 개념이다. 더욱이 자유당 정권 하에서 영화를 시작하여 군사정권 하에서 전성기를 누렸던 그의 상상력이 어떤 억압으로부터 촉발되었는지는 쉽게 짐작할 수 있다. 국가장치 뿐만 아니라 일상생활의 미시정치학을 관통하는 억압기제 위에 놓여진 그의 영화는 거의 예외 없이 왜곡된 성적 충동, 소유욕과 질투, 살인과 동반자살, 사도마조히즘을 다룬다. 인간의 본능을 해부하는 모티브였던 이런 요소들은 동시에 국가 주도의 근대화가 만들어낸 전후 한국사회의 강력한 트라우마를 숙주로 삼았다. 김기영은 중산층 배경을 끌어들임으로써 그러한 비정상의 심리를 부르주아적 욕망과 연결시키고자 했다. 요컨대 그는 인간의 본성과 시대상황이라는 상이한 두 층위를 동시에 포착하고 있으며, 개인의 괴물성을 만들어내는 것은 본능이 아니라 집단무의식의 변형이라는 것을 명백히 하고자 했다.
그런 점에서 <고려장>(1963)은 프린트 일부의 유실에도 불구하고 중요하게 평가해야 할 텍스트이다. <하녀>와 <충녀>가 번식시킨 ‘위험한 여자’ 시리즈들이 한국사회 속의 가정, 그 지붕 밑의 여자들을 짓누르는 강박관념의 초상이라면, <고려장>은 불구가 된 가부장, 그것을 강화하려는 집단의 권력과 폭력에 관한 벽화라고 볼 수 있다. 식량위기로 인한 인구조절이 불가피했던 고대사회를 배경으로 한 <고려장>이 특히 4.19 직후의 시대정신을 직접적으로 담고 있다는 점은 상당히 파격적이다. 늙은 노모를 버린다는 익숙한 전설 사이로 드러나는 도착성의 징후들은 혁명실패 후 사회의 불온한 정상성을 공격하는 뒤틀림으로 읽혀진다. 한 시대의 분기점이 텍스트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가의 문제에서 유현목 감독의 <오발탄>(1961)과 비교할 수 있는 상호교호성이 많은 작품이라고 생각된다.
정상을 의심하는 비정상의 일침
비정상성 또는 변태성으로 정상성을 공격하는 것. 이것은 동어반복에 가까운 김기영의 내러티브에서 이상한 캐릭터를 빚어낸 동력이기도 했다. 그의 영화 대부분은 삼각관계에 놓인 세 남녀가 질투와 욕정으로 미쳐 날뛰다가 끝내는 누군가가 살해되거나 자살로 막을 내린다. 이 통속적인 삼각관계 안에 섹슈얼리티, 계급성, 근대성 등의 문제를 덧씌웠던 김기영은 특히 여자와 남자의 성을 섹스이자 화폐를 대체한 교환가치로 파악했다. 쾌락으로서의 섹스는 곧 종족보존의 욕망으로 치환되면서 서로 다른 계층의 계급 이동을 매개하는 정치적 투쟁으로 변한다. 이 투쟁에서 무기가 되는 것은 당연히 여자들의 몸이다. 그런데 이 몸은 각종 질병을 수반하거나 불구로 설정되어 있다. <하녀>의 여자가 지능지체를 보인다면 <화녀>의 여자는 간질 증세를 가지고 있다. 그밖에도 많은 영화에서 편집증과 분열증, 벙어리와 소아마비 설정이 반복된다. 반드시 여자들만 그런 것도 아니다. 많은 남자들이 성불구이거나 다리 불구로 묘사된다. 그런데 의사 출신답다고 하기에는 질병이나 불구의 종류가 상당히 제한적이며 물리적이다. 즉 인물의 형상을 망가뜨리기 위한 것이지 심리적 배수진을 위한 것은 아니다. 그의 인물들은 다리를 절룩거리거나 ‘어버버’ 거리며. 스스로 ‘병신’이라는 대사를 남발한다. 관객을 불편하게 만들기 위한 것이지 애잔한 동정심 따위는 애초부터 차단해버린다. 이것은 희생양을 그리기보다는 괴물성을 축조하기 위한 알리바이로 보인다.
엽기적인 여성들은 억압적 가부장제의 역설
영화 속 무기력한 남자들만 괴롭히는 것이 아니라 관객까지 괴롭히는 여성 인물의 출현. 바로 이 점이 김기영의 괴물 주인공들의 여성성이 스릴러 장르가 빚어낸 것이 아니라 억압적이던 한국사회의 가부장이 빚어낸 것이라는 점을 증명해준다. 언제나 비슷한 여자들의 악다구니와 패배. 뒤로 갈수록 자본과 산업화의 위력에 찢겨지던 여자들의 신체. 끝내는 너무도 분열하여 어안이 벙벙해지던 총체적인 난맥상.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녀>와 <이어도>를 만들었던 거장(여기에 <고려장>까지 더하고 싶다>)의 이상한 실패작까지 유의미하다고 보는 것은, 그의 영화 도처에서 출몰하는 비정상성들이 배후에서 침묵하고 있던 한국사회의 정상성에 대하여 질문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와 더불어 균질한 메이저 시스템 속에서 불균질한 상상력으로 승부했던 김기영의 존재는, 오늘날처럼 웰 메이드 영화만이 추앙받는 시대에서는 가당치도 않은 꿈이지 않는가? 시간이 갈수록 김기영 감독이 그리워지는 것은, 더 이상 주류영화에 과감한 흠집을 내는 용기를 찾아보기 힘들다는 점 때문이기도 하다. 사실대로 고백하자면, 뛰어난 작품 몇 편을 제외한 김기영 감독의 태작들은 몇 개의 인상적인 쇼트들을 위하여 지리멸렬한 중언부언을 참아야 하기도 한다. 하지만 지금으로선 그런 ‘막가파적 영화 만들기’도 능력의 다른 증명처럼 느껴진다. 이것도 혹시 시간의 선물인 것일까?
by.
이연호(영화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