간직하고 싶은 장소
예전에 영상자료원을 찾을 때에는 예술의전당이라는 주인 옆에 놓인 세입자처럼 느껴질 때가 많았다. 그래서였을까. 자료원을 찾을 때면 전망 좋은 곳을 찾아 커피 마시기를 더 좋아했고, 다른 공연 프로그램 목록을 살필 때가 많았다. 그곳의 극장에서 몇 번의 강의를 해본 기억도 새삼스럽다.
지금의 상암동은 아직 개발이 덜 되기는 했지만 분주하지 않은 환경에 더 자주 찾게 된다. 가장 큰 이유는 부산국제영화제에서 한국영화 회고전을 맡게 된 탓이겠지만 집에서 가까워진 이유도 크다. 작년 11월에는 <푸른 천사>를 보기 위해 상암동을 찾았다. 디트리히의 매끈한 다리로 유명한 영화이기는 하지만 실제로 이 영화의 변화하는 캐릭터이자 중심은 할리우드에서 독일로 돌아온 에밀 야닝스였다. 그는 독일의 1920년대와 30년대 영화의 핵심 배우로 손꼽힌다. 김나지움의 교수를 연기하는 야닝스는 불량학생들이 출입하는 ''푸른 천사''라는 술집에 갔다가 롤라라는 여인을 만나 사랑에 빠지게 된다. 영화를 연출한 조셉 폰 스터버그는 아주 통속적인 러브스토리 속에서 몰락하는 정신(교양 혹은 남성)의 세계를 보여준다.
영화도 흥미로웠지만 그날의 가장 아름다운 인상은 극장을 나서는 늦은 밤의 상암동이었다. 영상자료원이 있는 상암동은 주말의 여의도처럼 공동화 현상이 일어난다. 접근성이 떨어진다는 이유로 사람들이 드물게 찾는다. 좋은 극장과 프로그램을 갖추고 있지만 교통편을 비롯한 접근성, 극장의 브랜드 네임 등을 고려하지 않으면 안 되는 시대인 것이다. 하지만 몇 년 뒤에는 자꾸 이 시절을 그리워할 것만 같은 기분이 든다. 벌써 이곳에서 김기영 감독의 후기 페르소나였던 영화배우 이화시 선생과의 인연을 비롯하여 여러 사람들을 만났다. 가끔 영화제에서 사람들이 범람하게 되면 옛날이 좋았다고 늘어놓는 것처럼, 이 특별한 장소를 간직하고픈 생각이 드는 것은 나만의 욕심일 것이다.
by.이상용(영화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