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거와 현재의 이중노출, 기이한 통시성에 대하여
26년이 지난 지금, <남부군>(정지영, 1990)을 복기하는 것은 이상한 기시감(旣視感)을 불러일으킨다. 이게 과연 6•25전쟁 때의 얘기인가, 아니면 영화가 만들어진 1990년을 우회적으로 보여주려는 얘기인가, 그것도 아니면 2016년 지금의 현실을 가리키는 얘기인가. 영상은 고르지 않고 영화 속 빨치산은 현대 문명의 도움 없이, M16도 아니고 M1 소총을 들고 다니며 낑낑대지만 그들이 얘기하는 스피릿(Spirit, 정신)은 지금 이 시대에 적용해도 그리 ‘촌스럽지’ 않은 기이한 ‘통시성(通時性)’, 곧 시대를 뛰어넘는 느낌을 불러일으킨다. 어쩌면 지금 우리는 이념의 색깔에 구애 없이 ‘빨치산(Partisan)’의 순혈주의적 열정이 필요한 시대에 살고 있는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그 순수의 가치를 상실하고 살아간 지 얼마나 되었는가. 과연 그 점을 인지하고 살고 있긴 한 것인가. 영화 <남부군>이 새삼 일깨워주는 대목이다.
이념을 뛰어넘는 인간의 실존에 관한 이야기
<남부군>은 주인공 이태(안성기)가 1950년 자신이 남부군 소속으로 전투에 참가한 때부터 결국 게릴라 토벌군에 의해 체포된 1952년까지, 지리산 빨치산의 생활을 일기체로 써 내려간 기록이다. 동명 원작 소설을 토대로 만든 이 영화는 두 가지 지점, 곧 용공영화와 반공영화의 진영에서 헤매지 않도록 좌표를 지키려고 애쓰는 흔적이 역력한 척한다. 그런데 속마음은 그것이 아니다. 그보다는 이태라는 인물을 통해 탈(脫)이념적 상황에서 인간의 실존에 대해 얘기함으로써 결국 탈이념화하지 못하고 있는 보수화의 기치만 내세우고 살아가는 1990년 당시의 우리 사회를 우회적이면서도 신랄하게 비판하는 작품이다. 영화 <남부군>이 지금 와서 보더라도 그리 ‘낡게’ 느껴지지 않고 오히려 신선하게 보이는 것은 어쩌면 지금의 우리 사회가 26년 전보다 더 철옹성처럼 보수화하고 극우화하는 경향을 보이고 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예전 영화가 갖는 역설의 현실화는 바로 그때의 사회 분위기에 따라 달라진다는 점을 보여주는 대목인데, 그런 논리대로라면 <남부군>이 그냥 옛날 영화쯤으로 치부될 수 있는 상황이 훨씬 더 좋다는 얘기가 된다. 그만큼 사회가 앞으로 더 나아갔다는 얘기가 되기 때문이다.
영화 <남부군>의 이야기를 관통하는 특징 하나는 ‘자발성’이라는 것이다. 억지가 없다. 그래서 어색한 것도 없다. 예컨대 주인공 이태가 조선중앙통신사의 기자였다가 지리산 빨치산인 남부군의 장교가 되는 과정은 누가 등을 떠밀어서가 아니다. 그는 자발적으로 산으로 가 게릴라가 된다. 그 마음속 태풍이 어땠는지 영화는 그것까지 기록하고 보여줄 시간이 없다고 얘기하는 것처럼 느껴진다. 그런데 실제로도 그 급박했던 시절에는 이런저런 갈등을 할 시간이 부족했을 것이다. 비교적 급작스러운 용단이 필요했을 터이다. 급작스럽게 헤어지고 급작스럽게 죽고 급작스럽게 이념을 바꾸는 일이 다반사로 벌어지던 때였다. 갈등을 오래 겪는 것 역시 분명 사치스러운 일에 속했을 것이다. 그래서 영화는 굉장히 무뚝뚝하고, 스타카토(staccato)가 매우 분명하며, 앞뒤의 감정을 거두절미한 채 앞으로 앞으로 전진해나가는 분위기로 꾸며져 있다. 예컨대, 이태는 두 명의 여자로부터 ‘넌지시’ 마음을 전해 받게 되는데 한 명은 간호 동무 박민자(故 최진실)이고 또 한 명은 자신의 상관 격인 김희숙(이혜영)이다. 보통의 상업영화 같으면 이태가 아무리 그 ‘와중에’ 겪는 사랑 얘기일지언정 감정의 매듭은 지어주고 갈 것이다. 그러나 이 영화 속 각각의 남녀, 셋 모두는 그럴 겨를을 보이지 않는다. 서로 그냥 헤어지게 되고 그냥 운명을 달리하게 된다.
영화는 시종일관 이태의 지리산 ‘종주’가 어떻게 끝날 것인지만을 향해 나아간다. 쓰라리고 비참하며, 비극적이었던 우리의 현대사가 여기 지리산에 압축돼 있다는 듯, 영화는 그 고된 행군의 그림을 보여주려 애쓴다. 그건 영화 <남부군>이 6•25전쟁에 대한 나무의 이야기이자 숲의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이 영화를 보고 있으면 지리산 게릴라들의 궤적을 알게 되지만 동시에 6•25전쟁이 갖는 비극성 전체를 온몸으로 느낄 수 있게 되기도 한다. 이 영화를 만든 정지영 감독은 부분을 통해 전체를 그리려는 변증법적 기교를 선보이려 애쓴다.
시대의 그늘과 새로운 세계를 향한 꿈
주인공 이태가 지키려고 했던 것은 무엇일까. 이념? 북한 노동당의 승리? 지리산 남부군의 영웅적 순교 행위? 그렇다면 주인공 이태가 싸우려고 했던 것은 과연 무엇일까. 지리산 토벌대? 정통성을 상실한 남한 정부와 미국 제국주의? 분단의 고착화? 과연 그런 것이었을까. 이태가 결국 맞닥뜨린 것은 소나무 껍질까지 뜯어 먹으려 하는 생존 본능, 온몸을 썩어 들어가게 하는 동상의 공포, 그 극단적인 추위 등등이 아니었을까. 산다는 것, 이 엄혹한 역사의 한가운데서 인간으로서 살아간다는 것은 무엇인가에 대한 고통스러운 질문 같은 것이 아니었을까.
물경 26년 전에 이런 영화를 찍은 감독과 스태프, 배우 모두에게 새삼스러운 경외감이 생긴다. 알레한드로 곤잘레스 이냐리투의 영화 <레버넌트: 죽음에서 돌아온 자 The Revenant>(2015) 같은 영화를 이미 26년 전에 한국의 정지영 감독이 찍은 셈이다. 별다른 기자재도 없던 시절에, 무엇보다 CG 등 표현 기재가 그리 많지 않았던 시절에 이런 역작을 만들어냈다는 것은 결국 영화란 돈과 기술이 아니라 인간의 의지의 산물이라는 것을 다시 한번 깨닫게 한다.
영화 속 남녀 빨치산 300여 명이 계곡 폭포에서 발가벗고 목욕을 하는 신(scene)이 기억에 남는다. 실제로는 지리산 계곡이 아닌 포항 12폭포에서 촬영된 이 장면은 영화 속에서 유일하게 평화로운 모습을 선보인다. 일종의 무릉도원 같은 비현실감을 준다. 그런데 정녕 인생과 역사는 늘 그런 판타지를 꿈꾸며 살아가기 마련이다. 우리 모두가 저렇게 발가벗고, 계급과 계층의, 가진 것과 배운 것의 차이 없이 다 함께 어우렁더우렁 살아가야 하는 것 아니냐고 넌지시 얘기하는 감독의 속삭임이 그 장면 안에 담겨 있다. 정지영 감독을 두고 ‘위험한 감독’이라고 하는 이유는 토벌대에 응사하는 영화 속 게릴라들의 영웅적인 전투 장면 같은 것에 있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저런, 계곡 목욕 장면에 있다. 새로운 세계를 꿈꾸는 영화감독은 어느 시대이든 늘 위험하기 때문인데 그 위험을 포용하지 않으면 시대의 진보는 이뤄지지 않는다. 26년이 지난 지금도 당신은 <남부군>을 이해하지 못하겠는가. 이 시대에 대한 스스로의 태도를 가늠해보기에 안성맞춤인 작품인 셈이다.
by.오동진(영화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