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시네마테크 프랑세즈, 공적 기록
1935년 앙리 랑글루아와 조르주 플랑주, 장 미트리, 폴 오귀스트 알레 등이 창설한 시네마테크 프랑세즈(Cinematheqe Fran?aise)는 지금까지 영화를 발굴하여 보존, 복원하고 상영하는 시네마테크 본연의 임무를 충실히 수행해오고 있다. 시네마테크 프랑세즈가 복원하는 필름 수는 2000년대 초반에 이미 연평균 200편에 달했고, 4만 편에 달하는 방대한 세계 영화 컬렉션을 자랑한다. 2005년 이전한 베르시 가의 새 시네마테크 프랑세즈 건물에 있는 앙리 랑글루아 관(415석), 조르주 플랑주 관(199석), 장 엡스탱 관(94석), 로테 아이스너 관 등 네 개의 상영관에서 일주일 중 6일 동안 영화를 상영한다. 위대한 감독과 배우들, 스태프들의 회고전, 테마전, 영화사전 등으로 나뉘어 상영되는 영화는 매주 50편 이상이다.
더불어 시대별 카메라, 영화 관련물, 의상, 무대 등을 모은 영화박물관과 분기별로 주제가 바뀌는 전시 공간을 따로 꾸리고 있어 영화 교육기관의 기능도 충실히 하고 있다. 1938년부터 랑글루아가 심혈을 기울여 수집하기 시작했고, 나치의 박해를 피해 파리로 망명한 로테 아이스너가 1945년부터 협업해 구성한 영화박물관 컬렉션은 2만2000점에 달하는 카메라와 18세기 이후의 영화 관련 기기, 만 레이·히치콕·채플린의 영화 도구, 루이스 브룩스와 비비안 리· 이자벨 아자니가 입었던 영화의상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영화사의 보석을 모았다. 1997년 박물관 화재 이후 일반에게 공개되지 못하고 있던 이 박물관 컬렉션은 2005년 베르시로 이전한 뒤에 다시 상설 전시되고 있다. 또, 재개관 뒤 새로 마련된 테마 전시 공간에서는 르누아르, 알모도바르, 독일표현주의 영화, 사샤 기트리, 조르주 멜리에스, 데니스 호퍼, 매그넘 전 등이 열렸다.
어린이 등을 대상으로 한 영화 교육 아틀리에를 운영하며, 국내와 해외의 여타 시네마테크들이나 영화제와의 상영 프린트 지원, 교환 등의 교류도 활발하다. 정기간행물을 비롯하여 작가 연구서, 영화 이론서 등 내실 있는 출판 사업도 계속해오고 있다. 부설 기관으로 무용 시네마테크(Cinematheque de la Dance)도 있다. 2007년 1월 바스티유에서 베르시의 시네마테크 프랑세즈 건물로 옮겨온 영화도서관(Bibliotheque du Film)은 영화서적 2만여 권, 영화 잡지 1만9000여 권 외에도 60만 점에 달하는 문서와 사진 자료, DVD와 VHS 등 영상자료 약 6000작품을 구비하고 영화 연구자들과 시네필들에게 큰 도움을 주고 있다.
시네마테크 프랑세즈는 민간 기관이지만, 문화부와 CNC의 지원이 예산의 8할에 달한다. 2003년에 예정되었던 이전이 문화부 예산 부족 등의 이유로 2005년으로 늦추어지는 등 잡음도 없진 않았으나, 현재는 지원은 받되 간섭받지 않는 권리를 특별법으로 보장받고 있다. 오랫동안 머물렀던 샤이오 궁을 떠나, 2005년 9월 새로운 보금자리인 12구의 베르시 가 51번지 구 아메리컨 센터에 시네마테크 프랑세즈가 튼 새 둥지에서, 마틴 스콜세지는 이렇게 말했다. “전 세계의 영화감독들은 시네마테크 프랑세즈를 안다. 한 번도 가보지 못했다 할지라도, 그곳은 우리 영혼의 안식처다.”
2. 사적 기억 1998~2003
1) 랑글루아의 고양이
1998년 가을 무렵부터 드나든 시네마테크 프랑세즈 샤이오 상영관에서 어느 날 나는 한 마리의 고양이를 만났다. 자신의 영토를 순찰하는 영주처럼 털을 빳빳하게 세우고 객석을 한 바퀴 도는 고양이와 눈이 마주친 순간, 동물을 좋아하지 않는 내 털도 곤두섰다. 곧 불이 꺼지고 영화가 시작될 텐데, 그 놈이 내 다리 사이라도 스치며 지나간다면… 극장에, 그것도 시네마테크 프랑세즈에 고양이가 웬 말이냐! 그런 상상을 했기 때문이다. 그 뚱뚱한 놈이 길고양이인가 싶었던 나는, 영화가 끝난 뒤 상영관 스태프에게 고양이가 극장에 들어왔다고 알렸다. 자주 오가며 얼굴이 익은 그 스태프는 의외로 심드렁하게 반응했다. 그 고양이는 영화 상영 전후에는 상영관 안을 산책하지만, 영화 시작 전에 반드시 상영관 안에서 제가 알아서 나오고, 영화 상영 중에는 극장을 출입하지 않으니 안심하란다. 아무리 고양이가 영물이라지만 그의 말을 전적으로 믿을 수 없었던 나는, 그래도 뭔가 조처를 취해야 하는 것 아니냐며 한 번 더 항의했다. 그랬더니 딱하다는 듯 들려주는 그의 얘기는 꽤 놀라웠다. 최근 시네마테크에 출현한 그 고양이는 익숙한 자신의 집인 듯 시네마테크를 둘러보곤 했단다. 처음 몇 번은 쫓아냈지만, 몽파르나스 묘지에 잠들어 있는 랑글루아를 보러 간 많은 이가 그 고양이를 랑글루아의 묘에서도 보았고, 시네마테크를 보살피는 듯 조용히 머무는 그 고양이의 태도에 어느덧 관계자들도 랑글루아가 그 고양이를 보냈다고 믿게 되었단다. 1977년에 죽은 랑글루아가 시네마테크에 고양이를 보냈다고, 게다가 그 고양이가 센 강 좌안 14구 몽파르나스에서 우안에 있는 17구 샤이오 궁까
지 알아서 왔다갔다 한다고? 그 말을 나더러 믿으라니. 어쨌든 그 뒤로는 고양이와 자주 마주쳐도 전처럼 놀라진 않았다. 그리고 몇 년이 흘러 2001년인가 2002년인가. 한동안 고양이를 보지 못했음을 깨달은 나는 다른 한 스태프에게 고양이 소식을 물었다. 그랬더니 고양이가 죽었단다. 랑글루아의 묘 옆에서 사체가 발견되었다고 했다.
2) 장 루슈의 딱정벌레
1998년부터 2003년 말까지 내가 시네마테크 프랑세즈를 드나들던 시절, 랑글루아의 카리스마를 이어받았던 이는 시네마테크 프랑세즈 명예대표 직을 수행하던 다큐멘터리 감독 장 루슈였다. 고령인 탓에 거동이 좀 불편해 보이기도 한 그는 흰색 폭스바겐을 손수 운전해 시네마테크로 오곤 했다. 재미있는 것은 그를 맞는 젊은 시네마테크 프랑세즈 스태프들의 반응이었다. 그들은 관객들이 옆에 있어도 아랑곳 않고 상영 중간에 - 마치 한국 대학생들이 공강 시간에 자판기 앞에서 종이컵 차기 놀이를 하듯 - 종이컵으로 컵 차기를 하곤 했다. 그러다 앞마당에서 장 루슈의 딱정벌레차 엔진 소리가 들리면 어린아이처럼 뛰어나가 루슈의 품에 안겼고 루슈는 그들을 병아리 품는 어미닭처럼 품어주며 특유의 부드러운 미소를 짓곤 했다.
1999년 봄, 운 좋게도 루슈의 전작 회고전을 시네마테크 프랑세즈에서 볼 수 있었다. 대학 시절 시네마 베리테의 표본처럼 회자되던, 그래서 제목은 수없이 들었으나 정작 작품을 볼 수 없어 궁금했던, 에드가 모랭과의 합작 <어느 여름의 연대기>가 그때 내가 본 루슈의 첫 작품이었다. 작품이 제작된 1950년대 후반은 드골의 5공화국이 출범한 시기로, 정치적으로 지극히 예민하던 시절이었다. 상영관을 꽉 채운 젊은 관객들은 그러므로 당시 당국의 검열과 사회적 반응을 매우 궁금해 했다. 열기 어린 질문을 받은 장 루슈는 예의 부드러운 미소를 띠며 말했다.
“검열이 걱정된 나는 요리스 이벤스를 불러 가편집본을 보여주면서 무삭제 통과가 가능할지 의견을 물었습니다. 그런데 요리스는 대답은 않고 영화 속, 나치 수용소 생존자 아가씨를 소개해달라고 조르는 겁니다. <어느 여름의 연대기>를 보고 그 아가씨에게 반한 요리스는 결국 그녀, 마르셀린 로리당과 만나 마지막 작품인 <바람의 이야기>까지 함께 했지요. <어느 여름의 연대기>가 내게 중요한 이유는, 이 작품 덕에 내 소중한 친구인 그들이 만나 사랑에 빠졌기 때문입니다.” 루슈는 파리의 어떤 곳에서 요리스 이벤스의 작품을 상영하든 관객과의 대화가 있으면 달려가, 말주변 없던 마르셀린 로리당 이벤스 곁에서 그녀의 이야기를 돕곤 했다.
장 루슈는 시네마테크 프랑세즈에 이웃해 샤이오 궁에 둥지를 틀고 있던 인류 박물관, 인류학 다큐멘터리협회와도 인연을 맺고 있었는데, 격주로 토요일 아침 10시부터 인류학 다큐멘터리 공개 강의를 했다. 이 강의가 언제부터 시작되었는지는 모르지만, 내가 파리에 있었던 1998년부터 2003년까지 루슈는 강의를 계속했다. 전 세계의 다양한 다큐멘터리를 수업 재료로 삼고 현역 다큐멘터리 감독이 초청 강사로 함께 참여하는 알찬 강의 목록이 분기마다 발표됐다. 내가 살던 동네에서는 9호선 지하철로 샤이오 궁까지 한번에 갈 수 있었지만, 토요일 아침의 단잠을 포기하기는 힘들어 사실 자주 가보진 못했다. 2004년 2월, 1917년생인 루슈가 아프리카 니제르에서 타계했다는 소식을 들었다. 사인이 교통사고였음에도, 자신의 진정한 본향이라 여겼을 아프리카에서 숨을 거두며 루슈는 만족했으리라는 생각이 먼저 들었다. 동시에, 그 토요일 아침 강의에 왜 자주 가지 못 했던가, 다시 한 번 가슴을 쳤다.
3) 지금은 묻어둔 그리움
시네마테크 프랑세즈는 메신 가 상영관, 윌름 가 상영관을 거쳐 샤이오 궁에 오래 머물다 2005년 9월 지금의 아메리칸 센터로 옮겼다. 나는 온전히 샤이오 궁 시절에만 파리에 체류했는데, 주상영관은 샤이오였지만 그보다 규모가 좀 작고 로비가 없는 보조상영관인 그랑 불르바르 상영관이 스트라스부르 생드니 역 근처에 하나 더 있었다. 샤이오에서는 주로 거장의 전작 회고전, 신작 시사회를 볼 수 있었다. 여기서 비스콘티의 전작과 나루세 미키오의 남아있는 영화 전부를 볼 수 있었고, 임권택 감독도 만날 수 있었다. 다니엘 위예와 장 마리 스트로브의 <탕아의 귀환>, 요나스 메카스의 <나는 아름다움의 섬광을 보았다>를 개봉 전에 먼저 보고 눈물 흘렸던 곳도 여기였다. 샤이오 상영관에 갈 때는, 에펠탑을 보려고 관광객이 들끓는 트로카데로 역에 내리지 않고 꼭 한 정거장 앞인 예나 역에 내려 걸어갔다. 무심코 트로카데로 역에 내렸다 가방 속 여권, 지갑 등을 몽땅 털렸기 때문이다. 그랑 불르바르 상영관에서는 회고전 외에도 테마기획전이나 B무비 상영회, 아방가르드 영화 정기 상영회 등이 열렸다. 근처에는 레 알 지역으로부터 이어지는 전통적인 홍등가가 있는데, 2000년대 초반부터 중국계 마피아들이 이 지역을 접수했다는 소문이 돌더니 언제부턴가 늘씬한 아시아계 아가씨들이 지하철에서부터 시네마테크 상영관 근처까지 길가에 죽 서 있었다. 로비도 없고 입장 통로도 좁아 언제나 밖에서 매표 시간까지 기다려야 하는 그랑 불르바르 상영관에서 세르지오 레오네 회고전을 보았다. <옛날 옛적 미국에서>를 본 뒤 다음 회차에 상영할 <석양의 갱들>이 매진될까 두려워, 두 시간 동안 뙤약볕 아래 늘어선 긴 줄에 나도 서 있었던 그 여름은 얼마나 행복했던지. 당시는 인터넷 예매도 없었고 시네마테크 프랑세즈는 입장권을 현장에서만 팔 때였다. 존 카사베츠가 출연한 마리오 바바의 범죄물이나, 헤수스 프랑코의 <검은 백작 부인> 같은 B무비들이 시네마Bis 프로그램에서 상영될 때도 그랑 불르바르 상영관 앞은 사람들이 장사진을 이루었다.
2005년 옮긴 베르시의 시네마테크 프랑세즈에 한 번도 가보지 못했다. 프랭크 게리가 설계했다는 아메리칸 센터 건물 사진은 여러 번 본 적이 있지만. 그러다 2006년 9월 대학로에 있는 국민대 제로원디자인센터에서, 퐁피두 센터와 시네마테크 프랑세즈 재개관 때 시각 디자인을 담당했던 루에디 바우어 전을 우연히 봤다. 전시장에서 새 시네마테크 프랑세즈의 여러 장소를 동영상으로 볼 수 있었다. 소매치기도, 매춘객도 없는 그곳은 실로 눈부시고 호화로우면서도 모던했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사무치게 베르시에 가보고 싶진 않았다. 내 기억은 지금은 문을 닫은 샤이오 궁과 그랑 불르바르 상영관에 머물러 있기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이제 나는, 샤이오 궁 대신 새로 발굴된 유현목 감독의 <분례기>가 중국어 버전으로 상영되는 시네마테크 KOFA로 간다.
by.신은실(영화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