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플란다스의 개, ‘새로운 감수성’의 의미
사실, <플란다스의 개>를 두고 ‘재발견되어야 할 걸작’이라고 말한다면, 그건 다소 뜬금없는 이야기일 것이다. 개봉 당시, 비록 흥행에는 실패했지만, 이 영화가 품고 있는 ‘새로운 감수성’은 이미 발견되고 주목받았기 때문이다. 더욱이 이후에도 이 영화는 몇 차례에 걸쳐 해외영화제에서 수상하기도 했고, 국내에서는 꼭 다시 봐야 할 영화 목록에 오르기도 했다. 그럼에도 이 코너에서 다시 한번 이 영화에 대해 언급하는 것은, 그 ‘새로운 감수성’의 의미에 대해서 여전히 충분히 이야기되지 않은 부분이 있기 때문이다.
<플란다스의 개>에서 드러난 새로운 감수성에 대해 단지 엉뚱한 상상력 또는 재기발랄한 이야기꾼의 재능에 대해서만 말하는 것은 왠지 모르게 허전하다. 그 엉뚱함과 재기발랄함이 진정 새로운 것이라면, 그것은 봉준호의 남다른 영화적 공간 창조 능력과 정치적 감수성 때문이다. 봉준호는 현실의 일상적 공간을 영화적 공간으로 솜씨 있게 창조해낸 후, 그 영화적 공간을 현실에 대해 논평하거나 저항하는 정치적 공간으로 재창조해낸다. 봉준호 영화에서 공간은 또 하나의 캐릭터다. 그는 언젠가 좋은 공간을 발견했을 때의 영화적 흥분에 대해서 말한 적이 있다. 그것은 장르적 흥분이자 동시에 정치적 흥분이기도 하다. <플란다스의 개>에서의 아파트는 바로 그런 공간 중 하나다.
또 하나의 캐릭터, 공간
봉준호는 이 영화에서 현실의 아파트 세 개를 재조립해서 한 개의 영화적(장르적인,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장르 혼종적인) 아파트를 만들어낸다. 이 아파트는 우리에게 익숙한 그 아파트가 아니다. 분명 주변에 있지만 눈에 잘 띄지 않는, 그래서 평소에는 의식조차 하지 않는 그런 공간들(아파트 관리실, 옥상, 지하실 등)이 <플란다스의 개>의 중심 공간이다. 그는 한국에서 가장 일상적이고 흔한 아파트라는 익숙한 공간을 아주 낯설고 기이한 영화적 공간으로 변형시킨다. 동시에 그곳은 아파트 주민들에게는 눈에 잘 띄지 않는 다양한 주변인들(관리사무실 경리, 경비원, 노숙자 등)의 영토이자 생활공간이기도 하다. 그리고 그 사이에 놓여 있는 길(아파트 복도와 경사진 주변 도로)은 다양한 형태의 추격과 대결이 펼쳐지는 갈등의 공간이 된다. 아파트 복도는 스릴러-코미디를 위한 영화적 공간이자, 주변인 현남(배두나)이 타락한 소시민 윤주(이성재)를 뒤쫓는 정치적 공간이다. 아파트 ‘지하실’은 스릴러-호러 장르를 위한 영화적 공간이자 ‘아파트 부실 공사’에 대한 정치적 비평이 수행되는 정치적 공간이다(장장 6분에 이르는 변 경비원(변희봉)의 ‘뽀일라 김씨’에 대한 ‘전설’).
매스미디어로서 영화의 거울 반사 놀이
봉준호 영화 세계의 또 다른 특징 중 하나는, 미디어-대중문화에 대한 남다른 감수성이다. 이런 점에서 <플란다스의 개>에서 나타나는 가장 문제적이고 흥미로운 장면 중 하나는, 마지막 부분에 등장하는 TV 뉴스 장면이다. 그 장면에서 TV는 현남의 인터뷰 부분을 ‘커트’하고(무시 또는 왜곡), (우리가 범인이 아님을 이미 알고 있는) 신종 노숙자 최씨(김뢰하)를 범인으로 단정한다(무지). 이런 설정은 그의 단편 <지리멸렬>의 마지막 에피소드와 <괴물>의 마지막 부분에도 반복해서 나타난다. 그의 영화에서 TV는 대개 ‘진실을 말하지 않는다.’ 문제적인 것은 이러한 TV의 왜곡-무지에 대해서, 어떤 의미에서 그 피해자라 할 수 있는 사람들이 그 매스미디어의 왜곡-무지를 보지 못하거나 보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것이 단지 냉소적 비판이거나 정치적 체념이기만 할까? 흥미로운 것은, 봉준호 영화 세계에서 이런 설정이 그런 느낌을 전혀 주지 않는다는 것이다. 어떤 의미에서 그것은 일종의 저항이다. <괴물>의 마지막 장면에서 어린 세주의 말처럼, ‘밥 먹는 데 집중하기 위해서’ TV는 꺼야만 하는 것이다. 매스미디어가 재생산하는 평균적 시각에서 벗어나기. <플란다스의 개>에서 TV 뉴스에 ‘실망’한 현남은 친구와 함께 산에 오른다. 윤주가 가고 싶었지만 가지 못하는 그곳, 그곳은 어쩌면 이 영화가 꿈꾸는 매스미디어-외부의 세계일 것이다. 현남이 관객을 향해 행하는 거울 반사 놀이는, 매스미디어로서의 영화에 대한 자기 반영적/반성적인 몸짓이기도 할 것이다.
‘쫓고 쫓기는 자들’의 이야기
봉준호는 매스미디어로부터 많은 영화적 아이디어를 얻으며(<플란다스의 개>에 뜬금없이 등장하는 ‘노숙자(김뢰하)’는, 실제로 IMF경제위기 이후 등장한 ‘신종 노숙자들(이미 포화 상태가 된 지하철역 등을 피해 아파트 지하실 등에 기숙하게 된 노숙자들)’에 대한 보도에서 비롯된 인물이다), 장르 영화(특히 스릴러 영화)에 대한 취향과 교양을 갖고 있지만, 그 누구보다 섬세한 매스미디어-대중문화에 대한 비판적 감수성을 갖고 있다. 봉준호의 모든 영화는 한 마디로 ‘쫓고 쫓기는 자들’의 이야기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그 ‘추격’은 언제나 예외 없이 실패한다(<괴물>과 <마더>의 추격이 과연 성공한 것이라 말할 수 있을까? 그것은 이미 너무 늦었거나, 적은 그곳에 있지 않다). 말하자면 그는 단 한 번도 제대로 된 ‘복수의 영화’를 만든 적이 없다. 대신 그는 언제나 ‘영화의 복수’를 수행한다. 매스미디어로서의 영화로부터 얻은 것을 통해 그것에 대항하기. <플란다스의 개>는 그 ‘영화의 복수’ 중 하나다.
by.
변성찬(영화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