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거 한 번만 보게 해주시면 안돼요…? 누나?
1993년의 겨울. 을씨년스러운 신촌 거리엔 사람이 없었다. 녹색 파카의 지퍼를 목까지 채워 올리고도 안심이 되지 않아 얼굴에 마스크를 써보았다. 너무 과하게 가리면 오히려 의심을 살 것 같았고, 그렇다고 맨 얼굴을 그대로 드러내는 것도 불안했다. 이럴 땐 수염이 많이 난 또래 친구들이 부러웠다. 결국 마스크를 쓰되 입술 언저리까지만 올리는 것으로 결정했다. 거대한 극장 간판엔 두 여자의 얼굴이 그려져 있었다. 한 명의 이름은 ‘델마’, 또 한 명의 이름은 ‘루이스’. 매표구 앞에 떨리는 마음으로 섰다. 작은 구멍으로 젊은 여자 매표원의 모습이 보였다. 나는 고개를 숙인 채 애써 낸 굵은 목소리로 낮게 말했다. “한 장이요.”
당시 고등학생이던 내가 <델마와 루이스>(리들리 스콧, 1993)를 보기 위해 신촌의 신영극장까지 오게 된 건 정은임의 영화음악실 때문이었다. ‘마성’의 목소리로 이 영화를 소개하던 고정 게스트 정성일 평론가의 현란한 유혹에 이 영화가 미치도록 보고 싶어졌던 것이다. 집에 비디오 플레이어가 없었고 극장에도 자주 가지 못했기에, 난 그때까지 영화음악실을 통해 소개되던 영화 대부분을 직접 본 적이 없었다. 그 무수한 영화를 오직 ‘말’로만 전해 들었기에, 내게 영화라는 매체는 마치 ‘구전동화’와 같았다. 하지만 <델마와 루이스>에 대한 소개를 들으며, 난 결심했다. 영화를 ‘듣기만’ 해서는 안 된다, 두 눈으로 직접 확인해보리라. 그렇게 비장한 마음으로 극장에 왔건만, 불행히도 <델마와 루이스>는 미성년자 관람불가 영화였다.
내가 어른인 척 굵은 목소리로 표를 달라고 하자, 매표원이 나를 빤히 쳐다봤다. 그리고 픽, 웃으며 툭, 내뱉었다. “너 중학생이지?” 난 고등학생이라 항변하고 싶었지만, 미성년자 관람불가 영화 앞에선 어차피 오십보 백보였다. 그리고 덧붙여진 한 마디. “애들은 이거 못 본다. 집에 가.” 애들? 뭔가 억울했다. 영화를 향한 열망이 너무도 쉽게 짓밟혀진 느낌과 내 처지에 대한 비루함이 동시에 밀려왔다. 울컥하는 마음에 거친 반항의 외침이 터져나올 줄 알았지만, 실제로 내게선 비굴한 울먹거림이 흘러나왔다. “이거…. 한번만 보게 해주시면 안돼요…? 누나?” 꽤 오랫동안 매표구 너머에서 침묵이 흘렀다. 그냥 가라는 신호인 줄 알고 발길을 돌리려는 찰나, 매표구에서 티켓 한 장이 나왔다. “들어갈 때 마스크 쓰고 들어가라.” 그때 매표원 아가씨가 왜 갑작스럽게 관용을 베풀었는지는 모르겠지만, 덕분에 나는 안으로 들어갈 수 있었다. 그리고 그날 ‘듣는’ 영화에서 벗어나 처음으로 영화음악실에서 소개하던 영화를 직접 볼 수 있었고, 몇 달 뒤 영화과에 가기로 마음먹었다. 그 후로 신영극장은 아트레온으로 바뀌었다가, 얼마 전 또다시 대기업 멀티플렉스 극장으로 바뀌었다. 지금은 그때의 풍경과 많이 달라졌지만, 가끔 그 앞을 지날 때마다 궁금해지곤 한다. 신영극장 매표소 아가씨의 심경 변화는, 나의 울먹거림 때문이었을까, 누나라는 호칭 때문이었을까.
by.민용근(영화감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