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공포영화] 귀신들은 어디로 가고 있나?
올여름에 개봉되는 <여고괴담 다섯 번째 이야기: 동반자살>은 ‘<여고괴담> 10주년 기념작’이라는 꼬리표를 달고 홍보되고 있다. 첫 번째 <여고괴담>은 1998년 여름에 개봉되었으니 정확히 말하면 11주년이다. 10주년이건 11주년이건, 슬슬 지난 10년을 돌이켜볼 때가 되었다. 10년이면 백지 상태에서 시작된 장르가 한 나라의 영화시장에서 자리 잡기 충분한 시간이다.
백지 상태라고? <여고괴담> 이전에 한국엔 호러 영화가 없었나? 그것은 우문이다. 하지만 <여고괴담>이 개봉되었을 때 한국 호러 영화가 칼로 자른 것처럼 뿌리가 끊긴 상태였다는 사실을 자신 있게 부인할 수 있는 사람은 없다. 아무리 팬들이 <전설의 고향> 시리즈나 <여곡성>, <월하의 공동묘지>, <깊은 밤 갑자기>를 달콤하게 회상해도, 그들이 1998년 이후에 만들어진 한국 호러 영화에 끼친 영향은 미미하거나 존재하지 않는다. 심지어 <전설의 고향>이라는 타이틀을 달고 나온 2006년 영화에서도 옛 한국 호러 영화의 영향력은 찾기 어렵다. 그 영화는 그 시기에 나온 대부분의 영화들이 그렇듯 <링>과 같은 가도가와 영화들에서 아이디어 대부분을 구걸해 가지고 왔다. (영화 자체보다 재미있는 알리바이가 있다. 사다코 귀신들이 사실은 <전설의 고향>에서 아이디어를 얻은 게 분명하다는 주장.)
그럼 이 영화들은 어디에서 왔는가? 위에서도 말했듯, 일본 호러영화들에서 대부분의 언어를 빌려왔다. 한동안 <스크림>류의 슬래셔 영화들이 자생할 것 같은 기미를 보이기도 했고 최근 유행하는 고문 포/르/노의 유입 시도가 드문드문 눈에 띄지만 아직 주류로 정착하지는 못했다. 지난 10년 동안 만들어진 한국 호러 영화는 일본이 주도하는 ‘아시아 호러 영화’라는 커다란 울타리 안에 존재한다. 2000년대 초반에 피크를 이루었던 이 장르는 지금은 반쯤 소강상태다. 이런 상태는 자연스럽다. 10여 년이라면 하나의 유행이 시작했다가 사그라지기에 충분한 시간이다. 해머 영화나 유니버설 호러 영화의 인기 시절이 얼마나 되었는지 생각해보라. 같은 사이클을 아시아 호러 영화 역시 겪고 있는 것이다. 이 점은 처음부터 예상해야 했던 것이다.
하지만 한국 호러 영화의 현실은 다른 아시아권 나라에 비해 훨씬 심각하다. 예를 들어 우린 일본이 더 이상 모범적인 J-호러물을 만들지 못한다고 걱정할 필요는 없다. 일본 영화계의 장르 시장은 거대하고 서브 장르 역시 풍부하다. 구로사와 기요시와 같은 거장들은 시장이 어떻게 흘러가건 그 상태로 계속 가면서 자기 길을 찾을 수 있다. 지금의 태국 호러 영화는 이전만큼 재미있지 않지만 그들에겐 여전히 풍부한 자국 문화의 소스와 젊은 에너지가 있다. 그런데 지금 한국은 어떠한가? <고사>나 <외톨이>를 만들고 있다. 장르의 기초를 다질 10년이나 되는 충분한 시간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그동안 긴 머리 귀신 주변을 뱅뱅 돌기만 했다. 한국 호러 영화가 어디로 가고 있느냐고? 이들 영화들만 봐도 답이 나오지 않는가? 과연 여기서 뭐가 더 나올 수 있을까?
한국 호러 영화, 이른바 K-호러는 어이가 없을 정도로 실체가 없는 장르다. 일단 기초적인 조사부터 해보자. 1998년 이후 두 편 이상 장편 호러 영화를 만들었거나 만들고 있는 감독은 몇 명이나 되는가? <폰>의 안병기, <령>의 김태경, <여우계단>의 윤재연, <알포인트>의 공수창 정도다. 그 외의 호러 영화들은 능력이 입증되지 않은 신인의 실험대였거나 장르에 별 관심 없는 감독의 의욕 없는 도전에 불과했다. 호러 영화의 시사회 때 감독이 ‘나는 호러에 관심이 없다’ 또는 ‘나는 호러를 싫어한다’고 말하는 것에 익숙해지기 시작한다면 이 나라의 호러 장르는 심각한 문제가 있다.
편식증 앓는 한국 공포영화
이 장르의 지독한 편식증에 대해서는 모두가 알고 있다. 한국 호러 영화의 대부분은 15세 관람가의 귀신 이야기에 집중되어 있다. 가끔 일탈을 시도하는 방향이 슬래셔인데, 일탈 방향이 주류 장르라면 장르적 상상력이 바짝 말라붙어 있다고밖에 할 수 없다. 처음부터 남들한테서 빌려온 영역 안에서 상상력도, 비전도 없이 그냥 삽질만 해왔던 것이다. 그렇다고 그나마 있는 장르 팬들은 이 상황을 마음 놓고 이죽거릴 자격이 있을까? 그 역시 심히 의심스럽다. 그 증거로, 악명 높은 <전설의 고향>의 감독 김지환은 영화를 만들기 전까지만 해도 명성 높은 골수 장르 팬이었다. 남 탓할 일이 아니다! 결국 우린 나오는 영화들에 대해 이죽거리고 빈정거리기만 할 뿐 어떤 구체적인 대안을 제시할 수 없는 위치에 몰리게 되었단 말이다. 그러는 동안 <장화, 홍련>과 같은 몇몇 영화가 나름 아시아 호러 영화의 대표작으로 인정받는 성과를 거두었다는 것 자체가 신기한 일이다.
이런 상황에서 미래가 있을까? 몇 가지 방향성이 있다. 하지만 그중 어떤 것도 분명한 답은 되지 못한다.
박찬욱의 <박쥐>는 그중 하나의 답이다. 이 작품의 성과에 대해서는 논란이 많고 본격 호러라기보다는 또 하나의 박찬욱 영화로 분류되는 게 더 정확한 작품이지만 그래도 전통적인 호러 소재인 뱀파이어를 가져와 이 정도로 주목받을 수 있고 논쟁적인 영화를 만들 수 있다는 것은 호러 장르의 유용성이 아직 떨어지지 않았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피와 살육, 사지절단이 난무했던 올해 칸 영화제의 흐름에서도 읽을 수 있듯, 호러 장르는 선택할 수 있는 하나의 예술적 도구로 존재가치가 있다. 장르 내부에서는 비전문 장르 감독의 장르 도전에 대해 늘 조금씩 냉소적이지만 우리처럼 처음부터 장르를 제대로 통제하는 전문 장르 감독이 존재하지 않고 장르가 신인 감독의 실험대 역할을 하는 곳이라면 도구로서의 역할은 장르의 안정과 확장에 늘 도움이 된다. 하지만 아직 이런 선택은 박찬욱과 같은 감독 정도나 되어야 가능하다는 단점이 있다.
<여고괴담>시리즈에 대한 기대
<여고괴담> 시리즈 역시 하나의 답이 될 수 있다. 나는 아직 <여고괴담 5- 동반자살>을 보지 못했고, 그 완성도에 대해 크게 기대하고 있지 않으며, 이 영화 이후 이 프랜차이즈가 계속 유지될 수 있을지에 대한 확신도 없다. 하지만 지금까지 거둔 성과만으로도 이 시리즈를 주목할 만하다. 시작은 모방이었고 늘 자기 복제의 의심을 받았던 작품들이지만 사실 이 시리즈만큼 시리즈 자체의 개성과 개별 영화의 개성이 조화를 이룬 예도 드물다. 이 모든 건 시리즈의 가치에 대한 안정된 자신감에서 비롯되는데, 이 자신감은 한국에서 만들어지는 주류 호러 영화들에서 찾아보기가 쉽지 않다. 10년이나 되는 세월이 흘렀음에도 불구하고 아직 K-호러에 대한 자기 확신이 없는 우리에게 <여고괴담> 시리즈는 익숙하지만 여전히 가치 있는 하나의 대안으로 존재한다. 하지만 무조건 모방할 대상은 절대로 아니다.
아마 대안은 충무로 호러 밖에 존재하는지도 모른다. 지난 여름 KBS에서는 <전설의 고향>을 새 시리즈로 내놓았고 MBC에서는 올해 10부작 호러 미니 시리즈 <혼>을 내놓는다. 이 두 작품들은 모두 K-호러의 탄생 이전부터 이미 텔레비전 세계에 존재했던 호러의 전통을 되살리면서 매체를 확장한다는 데에 의미가 있다. <전설의 고향>의 완성도는 그리 높은 편이 아니었고 <혼> 역시 익숙한 아시아 호러 영화의 공식을 반복할 가능성이 크지만 그래도 지금 꽉 막혀 있는 것처럼 보이는 충무로 호러보다 가능성이 있을 수도 있다.
아마 우리가 모르는 장르 재주꾼이 보이지 않는 곳에 있을지도 모른다. 최근 들어 내가 재미있게 본 한국 장르물들은 장편영화들이 아니라 장훈의 <불한당들>이나 이인의의 <기프트>, 남다정의 <아이들은 잠시 외출했을 뿐이다>와 같은 중단편들이었다. 물론 이들 역시 장편영화로 넘어와 전쟁을 시작하면 어떤 결과를 내놓을지 아무도 모른다. 하지만 그래도 희망은 남겨두는 것이 좋으리라.
by.듀나(영화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