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위대한 이야기꾼의 영화
이 ‘걸작의 재발견’ 시리즈를 위해 영화를 고르는 건 쉬운 일이 아니다. 무엇보다도 흥미롭고 좋은 영화가 매우 많다. 하지만 지금까지 ‘걸작의 재발견’에서 다뤘던 24편의 영화 중 단 한 편도 아주 매력적인 시대인 1950년대에 속하거나 혹은 거장 신상옥 감독이 만든 게 아니라는 걸 깨닫는 순간, 이 25번째 시리즈를 위한 영화를 고르는 게 수월해졌다. 분명 의도적으로 제외하려 했던 건 아니지만, 기꺼운 마음으로 초기 멜로드라마인 <어느 여대생의 고백>(1958)에 내 진심 어린 찬사를 담아 누락시켰던 일을 보상하려 한다.
신상옥 감독의 영화적 입지를 굳힌 작품
법대를 마치기 위해 교묘한 속임수를 구사하는 여대생에 관한 이 영화는 신상옥 감독의 작품에 관한 논의에서 자주 간과된다. 2001년 부산국제영화제의 신상옥 감독 회고전에서도, 그 다음해 뉴욕 현대미술관에서 열린 신상옥 감독 회고전에서도 상영되지 않았다. 감독 본인도 자신의 영화 경력 후반기에 이 영화에 관한 언급을 거의 하지 않은 것 같다. 하지만 어떤 면에서는 이 영화야말로 그의 오랜 영화 경력을 가능케 한 작품이다. 신상옥 감독과 같은 시대를 살았던 이들에 따르면, 신상옥 감독이 이 영화를 만들기 시작한 1958년, 그의 영화적 입지는 불안한 것이었다. 지금은 소실되어버린 그의 데뷔작 <악야>(1952)와 불교영화인 <꿈>(1955)은 평단에서 좋은 평을 받았지만 아직 대대적인 상업적 성공을 거두지는 못하고 있었다. 아내인 최은희를 ‘양공주’ 역으로 해서 만든 <지옥화>는 오늘날의 영화평론가들이 자주 걸작으로 꼽지만, 그 영화가 배급된 1958년 초에는 최은희의 팬들을 외면하게 만들었고 흥행에도 참패했다. 하지만 <어느 여대생의 고백>은 큰 성공을 거두면서 최은희의 명성을 공고하게 만들고 신상옥을 주류 상업영화 감독으로 자리매김하게 했다. 이 영화는 극장에서 거의 한 달간 상영되었으며(이례적인 장기 상영이다) 서울에서만 13만 장의 영화입장권이 팔렸다. <동심초>(1959)와 <춘희>(1959)를 포함한 최은희 주연의 일련의 멜로드라마로 이어진 이 영화의 성공은 신필름을 한국영화산업의 주류 영화사로 만들었다.
시대 맥락에서 보자면 꽤 독특한 호소력
왜 오늘날 비평가들이 <어느 여대생의 고백>보다 <지옥화>에 훨씬 더 많은 관심을 보이는지 추측하기는 어렵지 않다. 나는<지옥화>가 지나친 관심을 끌고 있다는 말을 하려는 건 아니다. <지옥화>는 부인할 수 없이 매혹적인 작품이다. 그 영화는 명확한 이탈리아 네오리얼리즘의 영향을 보여주면서도 더불어 그 한 영화 안에 수많은 장르의 여러 요소가 어우러져 있다. 또한 창녀로 분한 최은희의 연기는 대담하면서도 그 시대 다른 영화들과는 확연히 다른 매우 독창적인 것이다. 하지만 최은희의 훨씬 차분한, 야심만만한 법대생 연기는 그 시대 맥락에서 꽤 독특한 감정적 호소력을 지닌다. 이 영화는 최은희가 연기하는 소영이 법대를 다니는 동안 학비를 내주던 자신의 할머니의 죽음을 애도하는 것으로 시작된다. 소영은 갑작스럽게 자신의 장래희망을 포기하고 학교를 그만둬야 하는 처지에 놓인다. 방세가 밀린 소영은 일자리를 알아보지만 직업적인 것 이상을 요구하는 남자들만 그녀를 채용하려 한다. 한편 소설가가 되고자 하는 소영의 친구 희숙은 우연히 요절한 여자가 남긴 일기장을 발견하게 된다. 그 일기장에는 영향력 있는 정치인인 최림이 결혼 전에 알던 여자에게서 난, 잃어버린 딸이 있다는 내용이 있다. 그러나 국회의원인 최림은 자신의 딸이 누구인지 전혀 모르고 있다. 희숙은 이야기를 꾸며내는 소설가의 능력을 이용해 소영이 절대 생각해낼 수 없는 것을 제안한다. 대학을 졸업하기 위해 국회의원 최림의 딸 역할을 하라는 것이다. 소영은 그 제안을 거절하지만 시간이 흐르고 상황이 더 절박해지자 그 제안이 괜찮은 듯 여겨진다.
드라마틱한 이야기와 최은희라는 배우
이 영화의 드라마틱한 이야기와 훌륭한 연기, 그리고 자신의 모든 것을 잃을 위험에도 불구하고 수감된 여인을 변호하고자 최선을 다하는 재능 있는 여자 변호사의 극히 보기 드문 모습을 보면, <어느 여대생의 고백>이 그 당시 여성 관객들에게 왜 그렇게 인기 있었는지 알 수 있다. 이 영화는 효과적인 서스펜스의 사용(사건이 느리게 풀려감에도 불구하고)과 함께 열악한 장비로 인해 영화기술적 시도를 하기 어렵던 시대임에도 이미지와 사운드에 대한 날카로운 감각을 보여준다. 어쩌면 오늘날의 관객들에게는 우습게 들릴 정도로 갑자기 튀어나오는 드라마틱한 음악 등 이 영화의 사운드트랙은 그다지 효과적이지 않지만. 물론 최은희의 연기가 이 영화의 중심을 잡고 있다. 최은희는 오랜 기간 활동한 배우지만, 이 영화에서 보여준 연기는 단연 압권이다. 부드럽게 이야기하는데도 새로운 방식으로 강한 의지를 드러내며 이상주의를 강변한다. 이 영화는 또한 김승호의, 내가 가장 좋아하는 연기 중 하나를 보여준다. 김승호는 계산된 대사와 신중한 태도로 자신의 새로 찾은 딸에 대한 열정적인 헌신을 보여준다.
오늘날에도 여전히 매력적인
20세기를 통틀어, 멜로드라마 장르는 한국의 영화평론가들과 역사학자들에게 진지하게 다뤄지는 일이 드물었다. 신상옥 스스로도 자신의 1950년대 멜로드라마들에 대해 사람들의 주의를 끌기를 꺼리는 태도를 보이는데, 이는 어쩌면 그러한 사실의 반영일 것이다. 하지만 <어느 여대생의 고백>은 신상옥의 다른 많은 ‘남성적인’ 영화들만큼이나 관심을 기울일 가치가 있으며, 이 영화야말로 그의 경력을 진정으로 한 단계 올려놓은 작품이다. 영화인 신상옥이 흥미로운 이유는, 그의 미학적인 야심 때문만이 아니라 그가 대중의 기호를 이해하는 재능을 가지고 있다는 데 있다. 그리고 이 영화는 그가 진정으로 관객들과 소통한 첫 번째 작품이다. 오늘날의 관객들에게도 <어느 여대생의 고백>은 여전히 매력적이다. 험난한 경제적 시기의 신분 상승 이야기로, 그리고 전후 사회에서 크게 성공한 전문직 여성의 드문 초상으로 말이다. 이 영화는 우리에게 그 당시 한국 사회에 관한 많은 것을 보여준다. 그러나 동시에 이 영화는 그 첫 상영 때부터 지금까지 가슴 뭉클한 이야기로, 태생적으로 관객을 몰입시키는 영화로 남아 있다. 이 영화는 자신의 전성기에 들어서는 위대한 이야기꾼의 작품이다.
번역: 류경미
by.달시 파켓(영화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