테리 이글턴은 <우리시대의 비극론>에서 비극의 두 가지 양식에 대해 설명한다. 그는 “거대 스펙터클을 제공하는 파국적 ‘사건’”으로서의 비극과 “희망 없는 상황이 삭막하게 지속되는 것”으로서의 비극을 구별한다. 전자가 외부의 공격에 의해 갑자기 벌어진 예외적인 사태라면 후자는 사건 이후, 파괴된 상태로 무한정 살아가야 하는 상태다. 슬라보예 지젝은 테리 이글턴의 저작을 인용하며, 첫 번째 비극의 양식을 9.11 사태에, 두 번째 비극의 양식을 팔레스타인이 영속적으로 겪고 있는 파국의 삶에 비유하기도 했다.1)
의미가 사라진 자리에서 영화는
테리 이글턴과 슬라보예 지젝이 언급한 비극의 두 가지 양식은 지난 몇 년간 다수의 한국 영화가 매혹된 경향에 대해 설명해주는 측면이 있다. 도식화의 위험을 무릅쓰고 말하자면, <추격자> 이후 한동안 상업영화들은 타자의 공격 이후, 어떻게 복수할 것인지에 몰두해왔다. 이들은 스스로를 희생자-주체의 위치에 두고 장르적 문법 안에서 복수의 행위 자체를 물신화하는 데 공을 들였다.
반면, 독립영화들의 경우는 후자의 상태를 벗어나지 못하고 반복되는 삶의 조건을 ‘사실주의적’으로 묘사하는 데 힘을 쏟아왔다. 이때의 ‘사실주의’는 내용적 차원뿐만 아니라, 미학적 차원에도 적용된다. 요컨대, 이 영화들에서는 상황을 전환시키는 극적인 사건이 최소화되거나 부재한다. 혹은 그런 전환을 가능하게 하는 인간 주체의 행위에 대한 가능성을 열어두지 않는다. 카메라는 죽은 듯이 반복되는 시간에 개입할 의지 없이, 그저 한자리에 서서, 살덩어리에 불과한 인간의 육신을 오래 쳐다보거나, 오직 섹스하고 밥 먹고 배설하는 집이라는 공간성에 천착한다. 그렇다면 행위와 사건이 없는, 의미가 사라진 자리에서 영화는 지금 무엇을 하고 있는 걸까. 우리에게 무엇을 보라고 요청하는 걸까.2)
불감증이거나 지나치게 예민한
여기, 노동하는 인간들이 있다. 밥을 먹고 잠을 자고 담배를 피우는 시간을 제외하고는 당구장에서, 세차장에서 노동하는 젊은 남자(<환호성>), 밥을 차리고 아이를 돌보고 해고된 남편 대신 세탁소에서 일을 하는 젊은 여자(<피로>),그리고 채석장에서, 석면공장에서, 마네킹 공장에서 일하는 노동자들(<보라>). 영화는 그들의 반복되는 일상, 표정 없는 얼굴을 그저 응시할 뿐이고, 우리에게 들리는 건 인물들의 말소리가 아니라, 그들을 둘러싼 기계의 소음, 일상적 소음, 매미의 울음, 아기의 울음이다. <피로>가 0부터 4까지, 총 다섯 개의 장으로 나누어져 있고, <환호성>이 여름을 지나 겨울에 이르고, <보라>의 노동자들의 옷차림새가 바뀌어도, 이 영화들에서 우리가 시간의 흐름을 체험하고 있다고 말하기는 어렵다. 카메라는 답답할 정도로 인물들의, 혹은 상황의 표면에만 머물러 있다. 이들의 노동은 그 상황에 대한 어떤 작용으로서의 주체적인 행위가 아니라, 차라리 그 자리를 견디고 또 견디는 피로의 이미지에 가깝다. 다수의 인물이 등장하든, 단 한 사람에게만 주목하든, 인간의 개별성은 여기 없으며, 우리는 익명적 타자의 수동적이고 자동화된 신체만을 본다. 그 몸들이 놓인 한국사회의 현실에 대한 언급이 없는 건 아니지만(이를테면, 산업현장의 작업환경 실태(<보라>), 4대강 사업(<피로>)), 직접적인 폭로와 고발의 형식을 띠지 않으며, 무엇보다 인간의 피로한 몸과 그런 현실 사이에 영화는 어떤 직접적인 영향관계를 만들어놓지 않는다. 영화는 인물들이 놓인 사회적 환경과 그들의 진부한 일상 사이에 거리를 두고, 둘의 서로에 대한 소외가 깊어질수록 그 간극을 견디는 건 점점 더 피폐해지는 인간의 육신이라는 사실을 말 그대로 인간의 맨몸을 통해 보여준다. 그 몸은 나무토막처럼 불감증에 걸리거나, 지나치게 예민해져서 고통에 시달린다.
시간이라는 웅덩이에 빠진 영화들
이 세 편의 영화가 지독한 피로의 서사를 어디서 끝내는지를 보는 건 그런 의미에서 중요하다. 그러니까 이들은 그 (익명적 개인의) 피로감을 (시스템에 대한, 혹은 자신에 대한) 분노와 저항, 혹은 다른 무언가로 이행시키는가. 이들은 자신을 짓누르는 필연적인 무력감을 어떤 식으로 마주하고 있는가. <피로>의 여자는 자신에게 성적으로, 경제적으로 기생하는 남편에게 칼을 든다. 그러나 피를 흘리는 자는 여자 자신이며, 그녀는 결국 스스로 숨통을 죈다. 남편과 4대강은 유령처럼 여전히 살아있다. <호수길>의 젊은 남자는 영화의 마지막 숲 속에서 마치 외계인이 조난신호를 보내듯, 간절한 빛으로 구조를 기다리는 것 같다. 그리고 뒤이어 화면 가득 강렬한 빛이 용솟음친다. <보라>의 노동자들은 공장을 나와서 공원에서 사진을 찍는다. 그들은 여가를 즐기며, 비로소 무언가를 ‘한다.’ 이 영화들의 마지막은 물론, 여전히 노동의 시간 안에 있거나, 간교한 시스템의 작동 안에서의 자기 파괴적인 명멸에 불과하다고 말할 수도 있다. 이 영화들의 목적은 어쩌면 피로의 서사를 끝내 피로하게 버티는 데 있지, 그것을 쉽게 해결하는 데 있지 않을 것이다. 다만, 여기에는 시스템을 거슬러 올라가, 근원을 대면하고 극복하려는 의지를 불가능하게 만드는 대신, 그런 현실의 시간을 영화적인 시간으로 전환해, 호소하고 견디려는 안간힘 같은 것이 있다. 선형적인 시간이 아니라 그 자리에 고인, 시간이라는 웅덩이에 빠진 이 영화에 과거로 돌아가서 지금의 현실을 설명하고 해소하려는 플래시백은 그 안간힘을 포기하는 안이하고 나쁜 유혹이다.
흥미로운 플래시백의 사용
그런데 2011년 개봉한 독립영화들에서 이 플래시백을 영화의 해법으로 사용하는 몇몇 흥미로운 예도 있다. 이들의 플래시백은 서사적인 맥락과 미학적인 맥락에서 다소 직접적이고 적극적으로 사용되고 있으나, 플래시백의 관습적인 사용으로 규정하기만은 어려운 지점들을 시도하고 있다. <돼지의 왕>은 주인공들의 불우한 어린 시절과 그만큼 불우한 현재를 교차하며, 인물들의 현재에 깃든 체념적이고 폭력적이고 냉소적인 공기의 근원을 추적해간다. 영화의 후반, 철이의 죽음에 얽힌 충격적인 비밀이 드러난 지 얼마되지 않아, 경민이 과거 철이가 서 있던 같은 곳에서 몸을 던져 죽는다. 이 장면의 충격은 사건의 무기력한 목격자가 사건을 반복하게 하고야 마는 순간, 사건의 비밀이 폭로된 자리에서 현재를 다시 똑같은 방식으로 사건화하고야 마는 순간을 목도한 데서 온다. 이 비극적인 사건의 반복, 두 번의 죽음은 몇 십 년이라는 시간의 간극, 인물들의 그간의 삶의 행로를 무참하게 지워버린다. <돼지의 왕>의 플래시백은 과거로 돌아가 현재의 궁지를 해결해주는 역할이 아니라, 현재의 자리에서 과거의 트라우마를 다시 끔찍하게 실행하는 역할을 한다. 즉 이것은 기억이 되기를 거부하는 플래시백이다. 보다 복잡한 형식으로 플래시백에 기대는 작품은 <파수꾼>이다. 이 영화 역시 <돼지의 왕>처럼 누군가의 예기치 못한 죽음이 이야기를 추동하지만, 여기서는 플래시백이 더해질수록 그 죽음에 얽힌 비밀은 겹겹의 기억으로 흩어진다. 영화는 그 비밀의 실체가 아니라, 그 비밀을 둘러싸고 상처 입은 소년들의 마음을 형상화하는 데 중점을 두며, 결국 누구도 상처 입지 않았던, 빛나는 어떤 순간으로 돌아가 끝난다. 이 마지막 플래시백이 과거에 대한 기억인지, 환상인지, 상상인지 모르겠지만, <돼지의 왕>과 달리, <파수꾼>은 소년들의 성장기를 사건 이전의 순수한 순간으로 되돌려놓는다. 말하자면 비밀에 근접할 수 없는 구조를 취해서, 그 비밀의 실재로부터 인물들이 파괴되는 걸 막고 그들의 정서를 지켜내는 것이다.
과거를 끌어안고 가려는 분투
상처 입은 과거와 여전히 그 상처가 아물지 않은 현재를 다룰 때, 플래시백의 두 사례가 위의 영화들이라면, <혜화,동>은 좀 다른 경우다. 여기에도 주인공들의 현재 상황에 이유를 제시해주는 플래시백이 나오지만, 그 역할은 위의 영화들처럼 어떤 결단이기보다는 일견 서사적 필요에 의한 것인데, 인상적인 순간은 역시 영화의 마지막에 있다. 모든 사건이 벌어진 다음, 구조된 개들을 차에 태우고 철거촌을 빠져나가던 여주인공은 한때 사랑했으나 지금은 고통으로 남아 있는 옛 남자친구, 그러니까 그녀의 사연 많은 과거를 지나친다. 차를 멈추고 남자가 서 있는 뒤를 돌아보며 후진하기 직전, 흔들리는 그녀의 표정을 깊게 응시하며 영화는 끝난다. 이 결론의 몸짓은 현재가 그저 과거로 퇴행하는 것도, 현재의 구멍을 설명하기 위해 과거에 기대는 것도 아니라, 현재가 비로소 과거를 끌어안고 가려는, 구체적이고, 간결하며, 단단한 다짐으로서의 새로운 형태의 플래시백이다.
이처럼 올해에도 한국 독립영화들은 ‘우리 시대의 비극’을 영화적으로 질문하고, 비극의 미학과 최선의 윤리적인 결단을 고심해왔다. 혹은 여전히 생생한 과거의 트라우마를 영화적으로 재생산함으로써, 대면하고 현재화하기 위해 분투하고 있다. 이들은 언제나 이 사회의 무기력과 체념, 냉소와 폭력을 집요하게 형상화하면서도 스스로 무기력해지거나 냉소하거나 체념하거나 폭력적이지 않을 수 있는 길을 찾아야 하는 미학적이고도 윤리적인 쟁점 앞에 서 있다. 유사한 소재를 취하는 한국 상업영화들이 점점 그 쟁점과의 싸움을 포기하고 오락이 될 때, 한국 독립영화들은 자본의 변방에서 적어도 그 싸움을 지속하고 있다. 그 싸움의 실패와 성공의 여부를 떠나, 위의 영화들이 2011년 우리가 본 그 싸움의 한 예라고 나는 말하고 싶다.
1) 슬라보예 지젝, <죽은 신을 위하여: 기독교 비판 및 유물론과 신학의 문제>, 김정아 옮김, 도서출판 길, 2007, p. 267.
2) 이 글에서 다룰 영화들은 장르에 상관없이 그 내용과 미학적 경향에 따라 묶일 것이다. 영화들의 목록은 <보라>(이강현), <피로>(김동명), <환호성>(정재훈), <파수꾼>(윤성현), <돼지의 왕>(연상호), <혜화, 동>(민용근) 등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