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롤로그
“나는 안개가 자욱한 거리를 혼자 걷고 있다. 길가에 늘어선 집들이 서부극 오픈세트처럼 희미하게 보인다. 몇 시쯤일까? 거리의 시계를 쳐다본다. 바늘이 없는 문자판, 회중시계를 급히 꺼내보지만 거기에도 바늘은 없다. 불안해진다. 말굽소리가 들려온다. 마부도 없이 달려오는 잠송마차 위의 관이 위태롭게 흔들린다. 땅 위에 관을 내동댕이치고 달아나는 마차. 나는 긴장과 불안에 싸여 관 속을 들여다본다. 그리고 그 안에 누워있는 내 모습을 발견한다.”
이것은 잉마르 베리만(Ingmar Bergman) 감독의 <산딸기> 도입부에 나오는 꿈의 내용이다. 나는 이런 꿈을 가끔 꾸었다. 살아있는 자가 죽은 자신의 모습을 보는. 흔히 한번 해병은 영원한 해병이라고 하지만, 영화감독이 10년 이상 쉬고 있는데 어찌 감독이라고 부를 수 있을까 생각해본다.
나의 화두
젊은 시절, 통도사(通度寺) 극락암으로 경봉스님을 찾아간 일이 있다. 이 절은 불상이 없는 것으로 유명하다. 나무의자에 반듯이 앉아 지그시 눈을 감은 스님의 모습은 흡사 부처님 같았다. 절을 하고 나니 스님이 말했다.
“인생이 필름처럼 흘러가는구나.” “어떻게 그걸 아셨습니까?”
“거울 속처럼 다 보이지.” “어떻게요?”
“마음을 비운 수도자의 직감은 그것을 볼 수가 있다.”
그때 나는 마음을 비운다는 화두를 안기 시작했다.
내가 50세쯤 되었을 때 월하스님은 종일 먹을 갈게 하더니 붓을 들었다.
靑山不墨萬古屛 流水無絃千年琴
(푸른 산은 먹으로 그리지 않았어도 만고에 병풍이요, 유수는 줄이 없어도 천년을 노래하는 거문고)
이것은 나의 해석이지만 뜻은 분명하게 받아들였다. 네가 예술을 한다지만 어찌 대자연의 아름다움을 넘볼 수 있는가? 겸허해야 진실이 보인다.
백담사 오현스님은 ‘아득한 성자’란 시를 보여주었다.
“하루라는 오늘
오늘이라는 이 하루에
뜨는 해도 다 보고
지는 해도 다 보았다고
더 이상 볼 것 없다고
알 까고 죽는 하루살이 떼.
죽을 때가 지났는데도
나는 살아 있지만
그 어느 날 그 하루도 산 것 같지 않고 보면
천년을 산다고 해도
성자는
아득한 하루살이 떼.”
어리석은 중생들아, 생명 있는 자의 절대적 원칙대로 태어났기에 이별의 순간이 오는 것을 잠시도 잊지 말고 삶의 소중함을 깨달아야 한다는 뜻일 것이다.
오현스님이 사랑하던 중광스님은 <괜히 왔다 가는구려>라는 화집을 내고 자조적인 그림을 많이 그렸고, 나는 그의 기행을 <허튼소리>로 영화화했다가 검열로 큰코다치기도 했다. 그리고 1960년대는 김동리 소설 <까치소리>를, 70년대에 같은 작가의 <극락조>를 스크린에 옮기면서 불교를 이야기해보고자 했지만 역부족이었다. 그러나 내 마음 한구석에 있는 작은 등불은 아직 꺼지지 않고 가물거린다.
소년 시절
들판 멀리 연기를 뿜으며 지나는 기차가 장난감처럼 보이던 우리 마을, 지금은 고속도로가 나 있는 안성 나들목 근처에서 나는 소년 시절을 보냈다. 땅이 비옥해서 좋은 쌀이 나는 그곳에 일본인 농가가 몇 집 있었는데, 그중 한 곳에서 천황이 먹는 쌀을 경작하고 있었다. 정사각형 귀퉁이에 장대를 세우고 금줄을 늘어뜨린 논에는 보통 것과 다름없는 벼가 자라고 있었는데 사람들은 그 앞을 지날 때 모자를 벗고 경례를 했다. 버스도 잠시 멎어 승객들이 고개를 숙여야 하는 그런 시대를 살았다. 여덟 살에 보통학교에 입학했는데 2학년 때 중일전쟁, 6학년 때 제2차 세계대전이 일어났다. 졸업 후 읍내 평택 심상소학교 고등과에 진학했는데 그것은 담임선생이 청한 것이다. 일본애들한테 구박을 받으며 2년간 중학속성과정을 공부했는데 그곳을 나오면 면서기나 금융조합에 취직이 되었지만 나는 집에서 빈둥거리며 놀았다. 1년 후 어른들의 성화로 다시 농업학교 시험을 봤는데 동급생들은 벌써 3학년으로 올라가 있었다. 왜 이렇게 먼 길을 돌아왔는지 나도 모르지만 얻은 것이 있다면 그것은 일본어가 능숙해졌고 독서에 취미가 붙었다는 정도다. 다시 시작한 학교에서 괴로웠던 것은 기숙사 생활과 교련이었지만 급장이 될 만큼 성적은 나쁘지 않았다. 3학년 때 광복이 되었다. 그때 우리는 거의 일본인으로 교육이 되어 있었기 때문에 그 엄청난 감격을 소화하는 데 혼란스러웠다. 그해 가을 우리 학우들은 읍내 극장을 빌려 연극을 하게 되었는데 혁명가로 김세중(조각가), 그의 아내로 내가 출연했다. 관객들은 나를 여자로 알았다.
서울로
급우들이 다투어 서울로 떠났다. 내가 연기를 뿜는 기차를 타고 처음으로 서울 구경을 한 것은 17세 때의 일. 시골아이가 도시사람이 되기까지는 몇 년이 걸렸다. 사범학교 3학년 때 수송국민학교로 교생실습을 나가 미술연구수업을 하게 된다. 그때 나는 유경채, 권옥연 선생의 지도를 받고 있었으니까 화가를 꿈꾸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아니 그림보다는 연극에 끌린 것 같다. 연극부를 만들어 학교 강당에서 춘향전을 공연하고 이몽룡으로 출연했으니까. 수업 평가는 나쁘지 않았다. 그러나 학부형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아이들 그림 지도를 신나게 하고 있을 때 내 시선이 멈춘 곳은 뚫어진 양말. 얼굴이 확 달아올랐다. 그만큼 가난했다. 하지만 동시에 행복한 시절이었다. 이튿날 학부모가 양말을 사가지고 찾아와 자기집 가정교사로 데려갔다.
전쟁
1950년 11월 말 달이 차가운 밤 나는 백연사 약사전에 있었다. “군대에 갑니다. 살아서 돌아오면 또 뵈러 오겠습니다.” 군용열차를 타고 도착한 부산은 생전 처음 보는 항구도시였다. 그곳에서 신병훈련을 마치고 대구통신대로 배속되었고 통역장교시험에 합격, 중위 계급장을 달 때까지 6개월이 걸렸으며 전선에서는 적과 아군의 포성이 멎지 않았다. 다시 부산항 제3부두에서 영어, 일어, 우리말을 혀가 닳도록 통역하다가 제주 한라산 꼭대기 통신소로 배속되어 난생 처음 대자연 속에 파묻혀 살게 되었다. 동쪽 바다에서 솟은 붉은 태양이 서쪽 바다로 가라앉는 천체의 운행을 바라보면서 1년을 살았다. 미군과 한국군을 합쳐 20여 명이 근무했지만 전우애는커녕 서로 반목하며 지냈고, 산기슭은 빨치산이 출몰해서 공중투하 보급으로 연명하던 시절이었다. 54년 국방부 정훈국으로 전보된 것은 순전히 은사의 배려였으며 남산 영화과 촬영소에서 근무하기 위해 몇 년 만에 서울로 돌아왔다.
영화와 만나다
내가 거기서 처음 느낀 것은 영화는 소설이나 그림처럼 맨손으로 혼자서 할 수 있는 작업이 아니라 기계의 힘을 빌리지 않으면 완성할 수 없는 매체라는 것이었다. 카메라에 필름을 장전하고 영상을 수록하면 화학약품인 현상액에 넣었다가 편집을 끝내고 녹음으로 소리를 만들어 극장용 프린트를 완성하고 그것이 영사기를 통해 스크린으로 투사되었을 때 비로소 영화라고 부를 수 있다는 것. 그 과정은 예술과는 전혀 관계없는 기계적인 기술의 힘을 빌려야 한다. 그래서 이 기술을 이해하지 못하면 영화예술을 논할 자격이 없다. 10년 가깝게 조감독 생활을 하는 것도 그런 이유에서일 것이다. 그때 그곳은 규모는 작았지만 전화에서 오직 하나 남은 영화 제작 시설이었으며 문관이란 이름으로 영화기술자들이 일하고 있었다. 나는 처음으로 필름을 만지고 문관들에게 수모를 겪으면서 영화 기술을 하나하나 습득해갔다. 촬영, 조명, 편집, 녹음… 6개월쯤 지났을 때 나는 자작 시나리오를 들고 현장으로 떠났다. 10분짜리 영화였지만 완성품은 전국의 극장에서 상영될 수준이었다. 10여 편의 홍보영화, 군사계몽영화를 만들면서 8년이 지났을 때 충무로에서 러브콜이 왔다. 고려영화사 김보철 사장이 극영화 감독을 의뢰했고 그것이 계기가 되어 나의 길고 지루한 군복무는 끝이 났다.
<공처가>에서 <침향>까지
<공처가>로 데뷔한 후 3편의 코미디를 더 찍고 <굴비>를 만들었는데 이 영화는 웃다가 눈물이 나는 비극이다. 여기서 나는 관객이 웃음과 슬픔을 함께 즐긴다는 것을 발견했다. <혈맥>은 가난하고 힘든 사람들의 이야기지만 웃음을 많이 섞었다. 그래서 김수용 영화는 늘 밝다는 평이었는데, 그것은 어두운 영화만을 예술로 알던 시절에 받았던 불편한 선입관이었다. 그러나 관객은 늘 내 영화를 즐겨, 이른바 나의 주가는 높아졌으며 연중무휴로 메가폰을 잡을 수 있었다. 지금에 와서 다작은 내세울 만한 일이 아닐지도 모르지만 필름에 파묻혀 산 영화감독 인생에 후회는 없다.
나는 연극을 좋아했다. 그래서 무대를 보고 영화로 만든 <혈맥> <산불> <만선> <물보라> <화조>가 있고 소설에서 영화로 옮긴 것은 이광수에서 구효서까지 40여 편, <저 하늘에도 슬픔이>를 포함한 10편의 아동영화, 홍콩영화, 일본영화, 그리고 모파상, 하디, 미우라 아야코의 소설까지 합쳐 109편의 영화가 나의 필름들이다.
에필로그
109편의 영화에 사용된 필름은 대략 109만 피트, 이 길이는 서울에서 대구까지의 거리를 넘는다. 충무로에서 필름 1자를 아끼며 일하던 시절에는 상상도 못할 수량이다. <유정>(1966)은 나의 첫 번째 컬러영화였는데 9,000피트(러닝타임 1시간 40분)를 완성하기 위해 1만2000피트를 사용했다. 필름을 극도로 절약하기 위한 방법으로 배우에게 연기를 시켜놓고 필요한 만큼만 카메라를 작동해서 촬영하며 편집을 한 것이다. 그 영화는 국도극장 한 곳에서 33만 명의 관객을 모았는데 당시 서울 인구는 300만이었다.
지금은 20만 피트의 네가필름을 물같이 쓰며 100개의 극장에서 동시상영, 1000만 명의 관객을 기록하는 시대가 되었다. 서울 낙원동에 실버극장이 있는데 요즘 영화에 익숙하지 못한 소위 실버관객들이 모이는 곳이다. 며칠 전 1주년 기념행사에 실버영화인 최은희 씨와 내가 초대되었다. 300석을 꽉 채운 관객들과 즐거운 대화를 나누었고 45년 전 나의 작품 <갯마을>을 상영했다. 나는 옛 친구를 만난 듯 필름을 살폈는데 그 땡볕 바닷가에서 음료수 한 모금 못 마시며 열연한 젊은 고은아, 신영균 씨는 지금 대극장을 소유한 재벌이 되었다는 사실이 꿈처럼 떠올랐다. 극장을 나와 조금 걸으면 종로통이다. 그곳에는 외계인 같은 젊은 군상들이 활보하고 있었다. 그곳에 섞인 실버감독은 생각한다. 저들에게도 다가오는 실버는 시간문제인데, 그것을 감지하는 사람이 저 중에 있을까? 필름에 파묻혀, 필름처럼 흘려보낸 김수용의 인생을 잠시 생각해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