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를 비롯한 영상미디어의 제작 ․배급 환경이 디지털로 급속히 변화하고 있다. 100여년이 넘게 영화시장을 군림해오던 필름도 디지털시네마의 출현으로 그 생명이 언제까지인지 장담할 수 없게 되었고, 방송 제작․편집․송출 시스템은 이미 디지털로 전환되었거나 진행 중이다. 비디오 시장 역시 DVD로, VOD로, IPTV로 신속히 대체되고 있다.
디지털은 아날로그 환경에서는 상상조차 할 수 없었던, 무한한 이용가능성과 편리를 낳았다. 아무리 복제해도 어떠한 손실없이 무한히 복사하고 배포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언제 어디서나 컴퓨터로, TV로, 무선단말기로 각종 정보에 손쉽게 접근할 수 있는 시대가 열린 것이다.
도서관, 기록보존소, 아카이브들은 자료의 영구보존, 그리고 활용 촉진이라는 목적 하에 앞다투어 디지털 변환 작업을 추진하였고, 한국영상자료원 역시 2000년대 초부터 적지않은 예산을 투입하여 필름 등 각종 영상자료를 디지털 변환하고, 변환․가공된 콘텐츠를 영상자료실 멀티미디어서비스 및 인터넷(www.kmdb.or.kr)을 통해 서비스함으로써, 나름대로 큰 성과를 일궈냈다.
디지털 성공의 함정
그러나 이러한 디지털 성공의 이면에는 심각한 위험이 도사리고 있다. 아날로그 매체의 마멸, 열화 등 화학적 손상을 대체할 영구보존 수단으로 여겨졌던 디지털은 실상 영구보존에 더욱 취약하다는 점이 속속 들어나고 있는 것이다. 인터넷 사이트 중 44%가 1년이 못되어 사라지고 있으며, 사이트의 평균수명은 44일에 불과하다. 물론 이들은 제대로 아카이브되고 있지 못하다. 그리고 수년 전에 저장한 디지털정보가 이를 재생하기 위한 소프트웨어나 하드웨어가 없거나, 아니면 저장 매체가 손상되어 열어볼 수 없게 된 경우를 종종 경험해봤을 것이다.
디지털 정보는 콘텐츠, 소프트웨어, 하드웨어가 서로 연결, 통합되어 있다. 모든 디지털 정보는 디지털 기술 체계의 한 요소나 결과로서 존재한다. 따라서 디지털 정보를 인간이 육안으로 식별하고 이해하기 위해서는 컴퓨터 하드웨어와 소프트웨어의 매개가 필요하며, 디지털 정보를 보존하기 위해서는 디지털 기술체계 전체를 보존할 수 있어야 한다. 그러나 애석하게도 “오늘날 디지털 자산의 장기적인 보존 및 접근을 합리적으로 보장할 어떠한 미디어, 하드웨어, 소프트웨어도 존재하지 않는다”. 영화필름이 적정한 온습도를 갖춘 보존고에 보관될 경우 100년도 넘게 버틸 수 있다는 점을 생각해보면, 이처럼 미래를 예측하기 어려운 디지털 보존이 얼마나 위험하고 비용 대비 효과를 기대하기 어려운지 알 수 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디지털 아카이빙은 ‘선택’이 아닌 ‘필수’이며, 조금이라도 늦출 수 없는 중차대한 과제이다. (※ ‘디지털아카이빙’이란 디지털로 제작되었거나 디지털로 변환된 콘텐츠가 장기적으로 보존되고 검색․접근․이용될 수 있도록 보장하기 위한 정책, 전략, 행동 모두를 의미한다.) 이미 미디어의 생산․유통 체제가 디지털 체제로 이동하였고, 디지털영상물이 급속히 생산․유통되고 있어, 하루빨리 디지털 아카이빙을 서두르지 않으면 많은 우수한 디지털 영상물이 멸실되는 ‘디지털 재앙’에 직면하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자료원은 디지털영상 아카이빙 추진 중
영상자료원은 2004년부터 본격적으로 디지털 영상 아카이빙에 대한 연구조사를 시작하였다. 2004년 말 디지털영상아카이브 기본계획을 수립하고, 2005년에는 디지털 영상 아카이브 시스템 구축을 위한 모델링 연구 작업을 추진하였다. 필름과 같은 고해상도 영상을 디지털화하고 아카이빙하기 위한 시스템을 구축하기 위해서는 수십억 단위의 막대한 예산이 필요하다. 2005년부터 예산을 확보하기 위해 노력하였으나 결실을 보지 못하다가, 2007년 말 영화발전기금 4억원 지원을 시작으로 드디어 디지털영상아카이브 사업을 시작할 수 있게 되었다. 우선 제작사에서 제각기 보관하고 있는 디지털시네마 파일 수집에 착수했다. 영화 1편에 1.5TB내외에 달하는 디지털원본소스가 몇 개의 외장 하드디스크에 복사된 채 아무런 대책없이 방치되다시피 하고 있었기 때문에, 하루빨리 수집해서 데이터 유실에 대비할 필요가 있었다.
그리고 올해 13여억원의 국고 지원을 받아, 2K급 고해상도 디지털영상파일을 비롯한 모든 영상콘텐츠를 등록/변환/카탈로깅/저장/검색/서비스하고, 아카이브 전 업무 프로세스를 통합관리하기 위한 ‘디지털영상아카이브 시스템’을 구축 중에 있다. 올해말 시스템이 완성되면 내년부터는 스토리지 등 대용량 저장장치가 추가 도입되어 수집된 디지털영상콘텐츠의 아카이빙이 본격화될 예정이다.
한편 디지털시네마 뿐만 아니라 각종 디지털 유통망으로 쏟아져 나오고 있는 온라인영상콘텐츠(ex. 온라인영화, 플래쉬, UCC 등)의 아카이브가 시급한데, 현재 온라인영상콘텐츠 수집을 시범적으로 진행하면서 아카이브 기본계획 및 지침을 마련 중이며, 내년부터는 본격적으로 수집에 착수할 예정이다.
아카이브된 각종 디지털영상콘텐츠는 영상자료실 멀티미디어서비스, 인터넷 VOD 서비스 등을 통해 대국민 서비스될 것이며, 민간의 이용 요청이 있는 경우 저작권자의 허락을 거쳐 적절한 포맷으로 마스터링을 거친 후 제공될 것이다.
일단 시작은 했지만, 앞으로 가야할 길은 더 멀고 험난하다. 디지털콘텐츠를 보존하는 작업은 최첨단의 엔지니어링 기술과 고난위도의 지적 판단력이 결합되어야 가능하므로, 전문 고급인력의 확보가 필요하다. 장기보존을 위해 최대한 오래 버틸 수 있는 영상포맷과 소프트웨어, 하드웨어에 대한 어려운 선택이 계속 요구될 것이고, 따라서 이와 관련된 지속적인 연구조사와 지원이 필요하다. 고해상도 영상콘텐츠의 안전 보존을 위해 여전히 값비싼 시스템에 대한 추가 도입 요구가 지속적으로 제기될 것이고, 경제성과 효용성을 저울질하며 고민에 고민을 거듭할 것임에 틀림없다. 아카이브하고 있는 콘텐츠를 영구 보존․활용하기 위해 지속적으로 매체이전과 에뮬레이션을 해야하고, 이를 위해 필요한 비용과 시간, 인력을 확보하기 위해 끊임없이 동분서주할 것임에 틀림없다.
디지털은 분명 우리에게 많은 기회를 제공해주었지만, 모든 아카이브 기관에 닥친 새로운, 어려운 도전이다.
1 매체이전은 한 세대의 컴퓨터 기술로부터 다음 세대로, 또는 어떠한 하드웨어/소프트웨어의 조합에서 다른 조합으로 정기적으로 디지털콘텐츠를 옮기는 것을 말한다.
2 에뮬레이션이란 디지털콘텐츠를 생산한 시점에서 사용된 하드웨어, 소프트웨어의 운용을 그대로 흉내내어 그 내용을 읽어내는 프로그램을 재현하는 보존전략을 말한다.